오는 12월이면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은 지 30년이 된다. 그사이 지난 2021년까지 양국 간 교역 규모는 무려 161배가 늘었다. 1992년 5억달러에서 시작한 교역 규모는 2021년 처음으로 800억달러선을 돌파해 807억달러를 기록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베트남 선수단 참여를 계기로 접촉이 개시돼 1992년 12월 22일 한국과 베트남은 정식 수교를 맺었다. 이젠 ‘팀VK(Vietnam-Korea)’가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두 나라는 일단 제조업 분야에서 디지털과 그린(친환경)으로 무장한 업그레이드를 시도하고 있다. 그간 한국 대기업들은 베트남을 노동집약적 제조업의 대규모 생산기지로 활용해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세계 친환경 추세에 부합하는 첨단 기술 중심으로 양국 제조업을 부흥시키고 이 과정에서 베트남의 젊은 정보통신(IT) 분야 인재도 키워내는 것이 목표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과 ‘홍강의 기적’을 이룬 베트남의 인구구조도 비슷하다. 젊은 IT 인재의 창업이 늘고 있는 점이 대표적이다.
베트남 하노이
▶교역 양과 질 모두 상승
남·북 베트남이 통일된 1975년부터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단절됐지만 1992년 외교관계 수립으로 두 나라는 전기를 맞이했다. 이후 양국은 꾸준히 양자 관계를 격상했고 교류와 협력의 폭은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2001년에는 수교 이래 처음으로 당시 베트남 국가원수인 쩐 득 르엉 주석이 방한해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기존 경제 협력 위주에서 벗어나 정치·군사·문화·교육·예술·관광 등의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하기로 했다. 2009년 한국과 베트남 관계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다시 한 번 강화된다. 이로써 ▲정치·안보 협력 ▲개발·과학기술 협력 ▲사법·영사 협력 ▲사회·문화 협력 ▲지역·국제무대에서의 협력을 확대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2018년 3월 베트남을 방문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베트남 지도부 4인과 정상회담을 갖고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할 것을 제의했다. 또 2020년 교역 규모 1000억달러 달성 계획 등 6개 분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후에도 2021년 9월 미국 뉴욕에서 한국·베트남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양국은 고위급 인사 간 회담을 지속적으로 열었다.
역시 지난 30년간 두 나라의 경제 부문 협력은 가장 두드러진 성과로 꼽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대베트남 총 교역액은 1992년 한국 총 교역액의 0.3%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한국의 대베트남 수출과 수입은 각각 130배와 416배씩 증가하며 한국 총수출의 8.8%, 총수입의 3.9%를 베트남이 차지하게 됐다. 이로써 베트남은 현재 중국, 미국, 일본에 이은 한국의 4대 교역국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특히 한국의 대베트남 해외직접투자(FDI)는 1992년 1700만달러에서 2019년 약 46억달러까지 270배가량 증가하며 베트남은 미국, 케이맨군도, 중국에 이어 4대 투자 대상국으로 떠올랐다.
매일경제는 지난 2017년 베트남에서 포럼을 열어 소재·부품, 에너지 인프라스트럭처, 정보통신기술(ICT) 등 4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두 나라 협력 방안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5년이 지난 지금 그 제언은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의 대베트남 투자가 본격화한 2010년 이후 철강판과 무선통신기기가 주요 수출품이었지만 2020년 이후부터 반도체, 평판 디스플레이, 무선통신기기가 3대 수출품으로 자리 잡았다. 4차 산업혁명 기반 고부가가치 품목의 교역이 실제로 증가한 셈이다. 특히 이들 3대 수출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총수출의 50%를 넘어섰다. 수입 또한 2000년대까지 석탄과 연체동물 같은 1차산물이나 의류 등의 비중이 높았지만 지금은 무선통신기기와 컴퓨터 등 고부가가치 품목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 6월 한·베 수교 30주년을 맞아 열린 매일경제 베트남 포럼에서도 이러한 점이 집중 부각됐다.
▶백신·수자원·사이버보안 등 투자 협력 기회
도이머이 정책으로 개방 노선을 채택한 베트남은 2007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복수로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은 베트남을 세계 경제로 더욱 빠르게 편입시키고 있다. 한국과 체결한 FTA로는 한·아세안 FTA(2007년), 한·베 FTA(2015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2022년) 등이 있다.
다수의 FTA 체결은 관세뿐 아니라 원산지 규정 등 비관세 장벽 감소로 이어져 교역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한·베 FTA 협정 후 6년간 두 나라 교역액은 2015년 376억달러에서 2022년 807억달러로 114% 증가했다. 특히 올해부터 발효된 RCEP는 전 세계 교역의 약 32%를 차지하는 15개 회원국 간 단일 원산지 규정도 적용하기 때문에 한국과 베트남 간 교역·투자를 더욱 활성화시킬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1989년 대우그룹의 선도적 투자 이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등의 시기를 제외하면 한국 기업의 베트남 투자는 꾸준히 늘어왔다. 인도차이나와 중국을 아우르는 베트남의 전략적 위치, 풍부하고 저렴한 젊은 노동력, FTA 체결 등 지속적인 투자환경 개선 등이 한국 기업에 매력적인 투자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2019년은 1181개 프로젝트에 총 83억달러가 투자돼 프로젝트 수나 금액 면에서 최대 기록을 달성한 해다. 2020년 이후 코로나19로 주춤하긴 했지만 그간 꾸준한 투자로 한국은 2021년 누적 기준 9223개 프로젝트(베트남 전체 투자유치 프로젝트의 27%)에 746억달러(베트남 전체 투자유치 금액의 18%)를 베트남에 쏟아부음으로써 베트남 상대 최대 투자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양국의 경제활동 확대는 인적교류 확대로 이어졌다. 2010년 이후 베트남을 방문한 한국인 수는 연평균 17.5%씩 늘어 2015년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서 중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방문객 수를 기록했다. 한국을 찾은 베트남인 수 또한 유사한 추세를 보여 2012년 10만 명에서 2020년 55만 명까지 늘었다. 김제국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동남아대양주팀 전문연구원은 “코로나19 이후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보건·백신과 기후 변화, 수자원, 사이버 보안을 포함한 신안보 등의 부문에서 더욱 가시적인 협력을 통해 베트남의 전략적 파트너로서 한국의 중요성을 제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진출한 한국 기업 71% “투자 확대”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70% 이상은 앞으로 현지 투자를 대폭 확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베트남 정부의 각종 인·허가 규제를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올해 5월 대한상공회의소는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투자·교역) 268곳에 대한 ‘베트남 진출 기업 환경·전망 인식’을 분석했다. 조사 대상 가운데 중소기업이 절반을 넘는다. 나머지는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비슷한 비중으로 조사에 참여했다. 특히 제조업과 유통·물류업, 문화·서비스업, 금융업, 농·어·광업 등 다양한 분야 기업이 설문에 답했다. 이들 기업은 작년보다 올해 매출액이 대부분 늘어날 것으로 답했다. 매출액 전망을 ‘증가’로 답한 기업이 49.6%였고 비슷할 것이라고 본 기업은 34.3%였다. 매출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한 기업은 16% 남짓에 불과했다.
물론 매출 감소를 내다본 기업들은 현지 수요 위축과 코로나19로 인한 원자재·부품 조달 애로를 주요 이유로 꼽았다. 하지만 매출이 늘어날 것으로 내다본 기업은 대부분 베트남 현지 수요와 수출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봤다. 이들이 베트남에 투자를 결정한 이유는 베트남 내수 시장 규모와 성장성(48.5%)을 가장 많이 꼽았다. 베트남 내 생산비용 우위(35.1%)를 지적한 기업도 많았다. 베트남 내 사업환경을 부정적으로 본 응답은 15%에 못 미쳤다. 절반 이상은 긍정적이라고 답했고 보통이라 답한 기업은 33% 정도였다.
무엇보다 앞으로 베트남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의향을 밝힌 기업은 71.3%를 기록했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중견기업별로 조사해 봐도 투자 확대 의향은 각각 70~71%로 엇비슷했다. 기업 규모와 상관없이 서로 유사하게 투자 확대 의향 방침을 밝힌 것이다.
이들의 예상 투자 금액 수준은 100만달러 이상~1000만달러 미만이 42.9%로 가장 많았고, 1000만달러 이상~1억달러 미만을 답한 곳도 13%를 넘었다. 특히 3.7% 기업들은 10억달러 이상 과감한 투자 의향도 있다고 답했다. 기업이 거점 확대를 고려하는 베트남 내 선호지역으로는 경제 도시인 호찌민과 그 인근을 39.3%로 가장 많이 선택했다. 수도 하노이와 그 인근을 꼽은 기업도 39.3%로 둘이 엇비슷했다. 다만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하노이 인근을 주로 꼽았고 중소기업은 호찌민 인근을 많이 선택해 눈길을 끌었다. 베트남에서 사업하기에 유망한 산업 분야로는 역시 2차 산업인 제조업이 46.3%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서비스업과 문화산업 등 3차 산업의 가능성을 높게 본 곳도 35%를 넘었다. 정보통신기술(ICT) 등 4차 산업의 가능성을 높게 점친 기업도 14%를 넘어섰다.
다만 이들 기업도 투자 확대의 애로 사항을 지적했다. 인건비 등 베트남 내 생산비용이 과거와 달리 크게 상승하고 있다는 점을 46.8%로 가장 많이 지적했다. 미국과 중국 분쟁 등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는 점도 13%가 꼽았다. 동남아시아 등 다른 새로운 지역 입지 우위와 베트남 내 기업 간 경쟁 심화를 우려하는 기업도 있었다.
투자 때 베트남 정부의 규제도 우려했다. 이 가운데 각종 인·허가에 대한 지연이나 불허를 절반 이상(51.9%)이 지적했다. 잦은 변경이나 가산세 부담 등 각종 세무 부담 증가도 22% 기업들이 걱정했다. 환경 규제와 통관 지연, 비자(체류 허가) 등 출입국 불편은 일부 기업들이 꼽았다.
이에 기업들은 사업 인·허가 검토기간 단축과 각종 규제 완화 등을 베트남 내 기업 운영·투자 확대를 위한 가장 중요한 선결 조건이라고 답했다. 아울러 기업 관련 법 개정 때 정책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문도 많았다.
베트남 내 투자 시 한국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고 답했다. 자금 조달 등 금융 지원(34%)과 정확하고 신속한 베트남 현지 정보 제공(28.7%)을 많이 꼽았고, 현지 민간 네트워크를 강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양국 협력 사업 모델을 발굴하는 데 한국 정부 노력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사를 실시한 대한상의 관계자는 “베트남에 진출·투자한 한국 기업들은 사업 진행에 따른 국가 간 인력 교환과 베트남 인력의 한국 내 연수를 시행해 인력 수준의 고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