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인 40대 직장인 김현정 씨(경기도 하남)는 온라인 쇼핑으로 가정간편식을 주문하는 게 일상이 됐다. 그녀는 “코로나 이후 배달 음식 주문이 늘어 건강이 걱정되는 게 사실이다. 건강한 식사를 하고는 싶지만 따로 요리할 시간은 없어 가정간편식 주문을 자주 한다”면서 “맛은 물론이고 품질도 높은 것 같아 걱정 없이 먹고 있다”고 말했다.
가정에서 포장을 뜯어 바로 먹거나 간단한 조리를 거쳐 섭취할 수 있는 식품을 뜻하는 가정간편식(HMR·Home Meal Replacement)이 빠르게 밥상을 점령하고 있다. 가정간편식(HMR)은 그냥 먹거나 데우기만 하면 되는 ‘즉석조리식품’과 들어 있는 식재료를 간단히 조리하기만 되는 ‘밀키트’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동안 맞벌이 가정, 1인 가구 증가에 따라 꾸준히 증가하던 간편식 시장은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폭발적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일반 소비자들은 이미 가정간편식과 밀키트가 외식을 대체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한국외식산업경영연구원이 발표한 ‘2022 외식 트렌드’ 보고서를 보면 소비자 10명 중 4명은 간편식이 외식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9월 연구원이 소비자 105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간편식의 일반 외식 대체 정도를 묻는 문항에 ‘완전 대체한다(80% 이상)’는 3.8%, ‘많은 부분 대체(60~80% 미만)’는 40.2%로 나타났다. ‘보통(40~60% 미만)’이라는 응답은 32.7%, ‘조금 대체(20~40% 미만)’는 18.4%, ‘대체 불가(20% 미만)’는 4.9%로 뒤를 이었다.
1인 가구가 증가하고 감염병이 유행하면서 집에서도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을 만들어 즐길 수 있는 ‘홀로 만찬’, ‘홈스토랑’이 인기를 끄는 것이다. 최근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확산으로 이러한 외식업 트렌드는 지속되는 분위기다. 과거 초창기 HMR는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 레토르트 식품’ 정도로 인식됐다면 코로나19 이후 쏟아져 나온 HMR 제품들은 ‘상당히 먹을 만한’ 정도로 발전했고, 최근엔 ‘근사한 한 끼’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국내 간편식 시장 규모는 2016년 2조2700억원에서 2020년 4조원대로 커졌고, 올해는 5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기존 식품업계는 물론 외식 브랜드와 호텔, 가전업계까지 관련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특히 식품업계에선 “간편식 제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HMR를 주요 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CJ제일제당과 동원F&B, 대상, 오뚜기, 풀무원 등 대형 식품 기업들은 물론, 프레시지, 쿠캣 등 스타트업들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성장동력으로 떠오른 ‘레스토랑 간편식’
과거 HMR 시장은 대형 식품 업체가 자체 개발한 간편식이 중심이었으나 현재는 대부분의 업체가 시장에 뛰어들면서 메뉴 다양화와 고급화 추세가 뚜렷하다. CJ제일제당은 시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식 브랜드 ‘비비고’ 외에도 비(非)한식 간편식 브랜드 ‘고메’의 제품을 꾸준히 늘리고 있다. 2015년 치킨, 2018년 중화, 2020년 피자 HMR 제품을 출시하는 등 ‘배달 3대장’ 메뉴를 차례로 프리미엄 간편식화하는 중이다. 동원F&B는 지난해 프리미엄 한식 HMR 브랜드 ‘양반’을 36년 만에 새 단장했다.
특히 전국 유명 맛집 메뉴나 유명 셰프의 레시피를 반조리 식품으로 만드는 밀키트, 레스토랑 메뉴를 간편식으로 만든 RMR(Restaurant Meal Replacement)는 새로운 시장으로 주목받는다. 코로나19 장기화와 거리두기 일상화로 외식이 어려워지면서 가정간편식을 넘어 전국 맛집 음식을 집에서 그대로 맛보고 싶어 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RMR는 쉽게 말해 맛집의 이름을 내건 밀키트다. 매장에서 요리사가 만든 수준의 품질을 그대로 유지하되, 기술력을 통해 조리를 간편화한 형태다. 이름난 맛집들의 대표 메뉴를 간편식으로 만드는 만큼 맛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
빕스, 계절밥상, 제일제면소 등 브랜드를 거느린 CJ그룹의 외식 계열사 CJ푸드빌은 외식 사업 대신 RMR 전담 조직을 신설해 사업을 키운 결과 관련 부문의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200% 이상 급증했다. 실제 CJ푸드빌은 한식 뷔페 브랜드 계절밥상의 단 한 곳 남은 ‘코엑스몰’을 오는 6월 폐점하기로 했다. 매장 운영을 통해 쌓은 한식 노하우는 RMR 제품으로 재탄생시켜 판매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현대그린푸드는 크라우드 펀딩 기업 와디즈와 함께 지역 맛집 10곳의 대표 메뉴를 RMR 상품으로 출시했다. CJ프레시웨이도 18년 전통의 갑오징어 전문 음식점의 메뉴를 RMR로 출시하며 간편식 시장에 뛰어들었다.
유통 업체들도 자체 브랜드를 선보이고 제품군을 점차 늘리고 있다. 이마트는 자체 상표(PB) ‘피코크’를 통해 미슐랭 선정 맛집들과 손잡고 밀키트 상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전체 RMR 150여 개 중 PB 상품이 70여 개로 46.7% 수준이다. PB 상품을 중심으로 한 RMR의 약진으로 지난해 매출 성장률은 106.4%에 달했다. 미슐랭 맛집 ‘도우룸’과 협업한 ‘피코크×도우룸 까르보나라 밀키트’, 부대찌개 맛집 ‘오뎅식당’과 손잡고 만든 ‘피코크 오뎅식당 부대찌개’ 등이 대표적이다.
롯데마트의 경우 지난해 판매된 RMR 상품 매출이 2020년보다 5.8배나 증가했다. 롯데마트는 현재 운영하고 있는 57개 RMR 가운데 15개(26.3%)가 PB 상품이다. 특히 이달 초에 출시한 부산 ‘다리집 떡볶이’는 매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떡볶이 소스의 핵심 원료를 다리집 방식으로 만들어 매장에서 먹는 맛을 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롯데마트는 쌀국수 맛집 ‘미분당’과 협업한 ‘요리하다×미분당 쌀국수’도 선보였다.
마켓컬리는 이커머스 중 레스토랑 간편식을 가장 많이 취급하고 있다. 지난해 마켓컬리에서 판매된 RMR 제품 가짓수는 1000여 개에 달한다. 부산의 대표 한정식 식당인 ‘사미헌’의 갈비탕은 냉동실 ‘쟁여템’으로 인기를 끌고 있고, 전주 한옥마을의 베테랑 칼국수, 대구 반야월 초등학교 앞 골목길에서 떡볶이와 만두를 팔아온 ‘반할만떡’의 떡볶이 등도 많은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이연복 셰프의 목란 짬뽕과 멘보샤, 짜장면은 입점 1년 만에 매출 100억원에 달한다.
호텔업계에선 롯데호텔이 지난해 12월 호텔 레스토랑 요리법을 담은 밀키트 ‘롯데호텔 1979’를 출시했다. 조선호텔의 경우 최근 한·중·일식 등 각 분야 셰프의 요리법을 담은 제품을 내놨고, 호텔신라는 오는 설을 앞두고 처음으로 ‘프리미엄 떡갈비 밀키트’를 명절 선물세트로 출시했다.
삼성전자도 식품업계와의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전자레인지·에어프라이어·그릴 등이 결합된 조리기기인 ‘비스포크 큐커’를 출시하면서 프레시지·오뚜기·테이스티나인·호텔신라·CJ제일제당 등과 함께 전용 밀키트 메뉴를 공동개발하고 있다.
▶전문 스타트업, 몸집 불리고 콘텐츠로 소비자 공략
스타트업도 성장을 위한 발 빠른 대응에 나서고 있다. 국내 밀키트 1위 업체인 프레시지는 밀키트 2위 업체인 테이스티나인과 약 1000억원 규모의 인수합병(M&A) 계약을 체결했다. 지난해 11월 건강·특수식 업체인 ‘닥터키친’, 올 들어 간편식 업체 ‘허닭’, 물류 업체인 ‘라인물류시스템’에 이은 네 번째 M&A다.
프레시지는 하루에 간편식 10만 개를 생산할 수 있는 연면적 8000평 규모의 제조 인프라스트럭처를 갖추고 있다. 생산시설을 기반으로 파트너사의 밀키트 상품 기획부터 판매까지 전 과정을 지원하는 ‘퍼블리싱’ 사업에 주력해왔다. 자체 브랜드 육성보다 B2B 사업에 방점을 둔 것이다. 프레시지는 어떤 제품을 밀키트로 만들 것인지 기획할 때 고유 레시피를 보유한 사람이나 가게를 찾고, 그 레시피가 콘텐츠로서 지닌 가치를 따진다. 화제가 될 만한 레시피라면 이를 빠르게 밀키트로 만들어 판매한다. 이런 전략으로 탄생한 제품이 라이브커머스 방송을 통한 판매로 시작 1분 만에 2만여 개 물량이 전부 팔린 ‘박막례 비빔국수’다.
테이스티나인은 25개 자체 브랜드를 가지고 편의점·홈쇼핑 등에서 간편식을 판매하는 B2C(기업 소비자 간 거래) 비중이 크다. 2021년 테이스티나인은 전년 대비 102% 증가한 매출 470억원을 기록하며 업계 2위로 급성장한 밀키트 업체다. 유행에 따라 빠르게 제작하고 즉시 유통하는 패션 업계 SPA 의류처럼, 트렌드를 빠르게 포착해 기획한 상품을 3주 내에 출시해 유통할 수 있는 SPF(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Food)를 사업 모델로 삼고 있다. 생산·제조·유통·판매 전 과정을 제조회사가 맡기 때문에 재고 부담을 덜고 운용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소비자 기호를 제품에 빠르게 반영한다.
두 회사는 합병을 기점으로 해외 진출을 본격화한다. 프레시지는 현재 미국·호주·싱가포르 등 7개국에 수출 중이며, 올해 1분기 중 아시아 3개국에 추가로 진출할 예정이다. 테이스티나인은 지난해 12월 베트남에 수출을 시작했고, 인도네시아 현지 식품사와 제휴를 맺고 현지 생산시설 건립을 추진 중이다. 두 회사는 연내 수출국을 30개로 늘린다는 목표를 내부적으로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캣의 경우, 소비자 이목이 집중된 콘텐츠에서 영감을 받아 간편식을 개발하고 있다. 쿠캣은 2014년 페이스북 페이지 ‘오늘 뭐먹지’를 운영하던 푸드 콘텐츠 업체였지만 2017년 간편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70개국 3400만 명에 달하는 콘텐츠 구독자를 통해 포착한 ‘핫’한 먹거리를 간편식으로 제조해 팔면 수익 창출이 가능할 것으로 본 것이다. 실제 쿠캣은 매해 겨울 방어와 장류 관련 콘텐츠의 조회 수가 높은 점을 노려 2018년 ‘간장 대방어장’을 만들어 히트시켰고, 온라인에서 ‘김치닭쫄면’ 레시피 콘텐츠가 화제가 되자 2020년 7월 신속하게 간편식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누적 4억4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쿠캣은 2016년 10억원대 매출을 기록했지만 지난해 400억원대로 40배가량 급증했다.
쿠캣은 “음식 채널이나 콘텐츠 개발이 사업 시작이었지만, 푸드 트렌드 열기가 높아지면서 독특한 음식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연결됐다”며 “이후 독특한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이커머스로 넘어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 쿠캣은 4개의 자체 스튜디오를 보유할 정도로 콘텐츠에 매우 특화됐다. 내부 제작팀에서 직접 콘텐츠를 기획하고 촬영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푸드 트렌드를 재빠르게 대응한다. 보통의 요리채널과 달리 절도 있는 손동작과 재치 있는 자막, 독특한 음식, 통통 튀는 음악 등 네 박자가 갖춰져 영상도 부담 없이 오래 시청할 수 있다. 또 해외 구독자를 겨냥한 맞춤형 자막 서비스도 제공해 퓨전 한식을 세계인에게도 전달한다. 이 모두 한류의 영향으로 한식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져서 가능했다. 최근에는 프랑스식 ‘알리고치즈감자’나 스페인 파에야 레시피, 소고기 요리인 ‘뵈프부르기뇽’ 등 국가별 다양한 요리도 선보이고 있다. 이에 GS리테일은 최근 쿠캣을 공식 인수했다.
외식업소를 대상으로 한 간편식 B2B 시장도 형성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외식·급식 업체, 항공사, 도시락·카페 사업자 등에게 납품하는 B2B 간편식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지난해 5월 전문 브랜드 ‘크레잇(Creeat)’을 론칭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국내 B2B 가공식품 시장은 2020년 약 34조원으로 추산되고, 2025년 50조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 장기화, 요리·셰프 콘텐츠 확산, 구매 채널 간편화 등에 따라 가정간편식 시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외식산업경영원 관계자는 “간편식이라는 편의성을 경험한 소비자들이 원재료를 사서 요리하는 데 시간과 힘을 투자하는 과거로 돌아가긴 어려울 것”이라며 “1인 가구 비율의 지속적인 증가, 재택근무와 유연근무제 확산, 간편식 메뉴 다양화 등으로 내식(內食)에서 간편식이 차지하는 비율은 꾸준히 증가할 것”이라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