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여름엔 지칠 정도로 덥다고, 또 겨울엔 너무 춥다고 불평하지만 그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자연의 도도한 법칙이다. 그래서 에어컨이나 히터가 없던 시절부터 인간은 계절이라는 변수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며 생활과 복장을 의미 있게 진화시켜왔다.
겨울에 사랑 받는 캐시미어는 따뜻하고 얇은 모자나 머플러, 혹은 장갑 속의 보온재가 되어 우리들이 겨울에 너무 여러 겹의 옷을 껴입지 않도록 해준다. 여름이 오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옷장 속에 보관한 가벼운 티셔츠가 생각나고, 비즈니스 현장에서의 차림을 위해 통풍이 잘되는 시원한 소재의 재킷이나 바지를 적극적으로 둘러보게 된다.
다만 화려함보다는 정중함, 지나친 개성보다는 사회성을 앞세우는 남성 비즈니스 복장의 전통 때문에 슈트나 재킷은 베이직한 스타일을 선택하게 된다. 그렇다면 액세서리는 어떨까.
적어도 액세서리는 보수적인 옷차림에 한 가지 즐거운 일탈처럼 자유로운 느낌이 있다. 특히 가방과 장갑 같은 가죽 제품, 커프링크스와 시계 같은 보석류에서 우산과 머플러, 포켓스퀘어와 모자, 구두에 이르기까지 액세서리의 범위는 실로 다양하다. 지나치게 튀지 않으면서도 개인의 안목과 개성을 드러낼 방법은 충분히 많다.
물론 옷은 확실히 접근해가는 순서가 있다. 슈트와 재킷, 셔츠와 타이, 구두와 양말 등은 기능적인 연관성이 높아 어느 제품, 어떤 브랜드로 시작하더라도 자연스럽게 관심사가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액세서리는 그런 경향을 과감히 벗어던져도 좋다. 아니 어쩌면 순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안경부터 시작하고, 다른 누군가는 스카프에서, 아니면 모자에서 복장의 실마리를 잡아나간다. 아무렴 어떤가. 오르는 지점은 달라도 만나는 곳은 대개 산의 정상이듯,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아이템을 용기 있게 즐기는 마음에서 이미 복장의 질은 달라진다.
브랜드 아니라 조화가 액세서리의 포인트
여성복보다 다양하진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남자의 액세서리는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특히 선글라스와 모자, 스카프, 시계 같은 제품들은 실용성과 개성을 함께 표현하는 좋은 사례다.
선글라스 요즘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필수품은 지갑과 자동차가 아니라 이어폰과 선글라스다.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음악을 굳이 듣지 않아도 귀에 이어폰이 꽂혀있고, 햇빛이 눈부시지 않아도 선글라스는 언제나 눈을 가리고 있다. 이들은 본래의 실용을 구현하는 물건들이기 전에, 자신의 영역을 방해 받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의사 표현이다.
이어폰이 귀에 꽂혀있거나 선글라스 너머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이들에겐 말 붙이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이 두 가지 물건은 외부로부터 우리들을 지켜준다. 다만 이어폰이란 귀에서 돌출된 무언가로 여전히 남아있지만, 선글라스는 쓰는 순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라 우리 얼굴의 일부로 스며들어버린다. 얼굴 위에 압도적인 크기나 디자인이 놓여있다면 친구를 웃게 만들거나 스스로도 잠시 즐거울지는 모르겠지만, 도대체 그 얼굴이 무엇으로 변해버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선글라스는 마치 눈과 눈썹의 관계처럼 전체 얼굴과의 조화 여부를 기준으로 고르는 습관이 필요하다. 그것도 고유한 철학을 쉽게 변경하는 브랜드보다는 일관성 있게 자신만의 보폭으로 걸어가는 제품들을 찾는 게 중요하다. 오직 단 한 가지 제품만을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곳, 그리고 시간의 무게를 이겨내면서 변치 않는 물건을 만드는 이들 말이다. 그런 철학 없이 어떻게 역사가 만들어질까.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갓 지은 하얀 쌀밥처럼, 혹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배려심 깊은 친구처럼 우리 곁에 조용하지만 오래도록 머무는 선글라스를 찾길 바란다.
모자 모자는 선글라스보다 조금 더 신경이 쓰인다. 누군가 모자를 쓴 모습은 보기 좋지만 정작 내가 쓰게 되면 너무 튈까봐 걱정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자를 고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길 때까진 중절모보다 덜 눈에 띄는 캡(Cap)으로 시작한다.
이때 유의할 점은 보기에 멋진 스타일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과 체격에 잘 스며들고, 입고 있는 복장과 조화를 이루는 모자를 고르는 것이다. 모자 선택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예컨대, 나는 얼굴형이 마른 편이니까 머리 부분은 낮고 테가 작은 모자를 써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금지되는 사항부터 생각하면 스스로 복장의 자유를 제한하게 돼 다른 모자는 전혀 시도하지 못한다.
누구든지 다양한 디자인의 모자를 살 수 있지만, 무엇보다 모자 착용에 대해서 스스로 편해져야 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일단 용기를 내 모자를 쓰기 시작하면, 모자에 대한 불안이 바로 사라지면서 편안해질 것이다. 처음 썼을 땐 주변의 시선이 느껴질 수도 있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니라 모자를 쓴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관심의 표현이다.
스카프 보수적인 느낌이 강한 남성복 세계에서 소재와 컬러로 상당히 자유로운 제품이 스카프다. 여름에는 린넨, 겨울엔 캐시미어나 울 같은 원단이 있고, 솔리드, 체크, 스트라이프, 오버롤, 원 포인트 등 패턴도 꽤 다양하다. 무엇보다 원하는 거의 모든 컬러들로 구성된 풍부한 옵션이다.
특히 넥타이를 잘 매지 않는 여름에는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온을 지탱해주는 실용적인 역할도 담당한다.
시계 여전히 남자의 개성을 표현하는 액세서리보단 결혼 예물로 애호되는 경향이 강하다. 가끔은 시계가 최고급 미술 작품처럼 고고한 취향이나 부의 상징으로 정의되면서, 장식품이나 사치품 같은 의미만 부각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슈트와 함께 신사의 상징이었던 시계는 손목 위나 스리피스의 베스트 안에서 제 역할을 하면서 조용히 품격을 높이는 물건이었지, 다이아몬드 반지처럼 화려함을 앞세운 용맹한 액세서리는 아니었다. 일단 자신에게 어울리는 시계를 갖게 되면 그 시계는 스스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고, 착용자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시계 그 자체만 생각하기보단 함께 착용할 옷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1년 내내 슈트만 입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만이 남자가 알아야 하는 캐주얼의 정답은 아니다. 그러므로 슈트 차림에 어울리는 시계와 캐주얼 차림에 어울리는 시계는 구별해야 한다. 미국 기업의 고위 간부들은 때로 슈트 차림에 ‘TIMEX’나 ‘CASIO’처럼 디지털 고무밴드 시계를 착용하지만, 그건 실용적인 문화가 강한 그 나라 이야기지 굳이 참고할 만한 옵션은 아니다.
또한 보석이 너무 번쩍이거나 디자인만 요란한 시계는 자칫 중국 관광객처럼 열등감 해소의 방법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유행이냐, 스타일이냐 먼저 선택을
나는 진정 어떤 복장을 추구하는가. 유행보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지, 브랜드에 상관없이 시계의 가치에 매료되는지 혹은 개성과 캐릭터를 마음껏 발산하고 싶은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예컨대 차콜 그레이 컬러의 클래식 슈트를 즐기는 남자는 분명 정중한 화이트 드레스셔츠에 오래된 가구처럼 은은한 다크 브라운 가죽 구두를 신고 있을 것이다. 이 차림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선택은 그 가죽 구두의 존재감과 연결되는 심플한 브라운 가죽 스트랩 시계가 된다.
같은 논리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네이비 슈트에는 때로는 와인색 가죽 구두와 브라운 시계를, 그리고 특별히 포멀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선 검정색의 옥스포드 구두와 블랙 가죽 스트랩 시계를 선택하면 된다. 기본적인 정장용 시계를 갖춘 뒤 여유가 된다면 준 정장용 시계를 통해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유연하게 적용해보는 것도 좋다.
세상에 액세서리의 종류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하지만 우리의 시간과 예산은 한정되어 있다. 그 많은 방정식 속에서 결국 나와 만나게 되는 하나의 물건을 찾는 건 좋은 친구를 만나는 인생만큼이나 행복한 개인의 역사가 된다.
게다가 모든 제품들은 그것을 착용하는 방법에 대한 나름의 전통과 스토리를 갖고 있으니, 액세서리 하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쇼핑을 넘어 스스로를 충실하게 채우고 좋은 문화를 나름 즐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선글라스와 스카프, 모자와 시계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과 오래도록 함께할 시간의 흔적이며, 묵묵히 남자의 성장을 지켜볼 시선이다.
남훈 2005년부터 2011년까지 7년간 제일모직 ‘란스미어’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현재 패션전략컨설팅회사 ‘더 알란 컴퍼니’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서울 종로 GS타워몰에 액세서리 편집숍 ‘알란스(ALAN’S)’를 오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