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보고 있지? 잘할게”
런웨이 초입에서 노(老)디자이너가 낮게 속삭였다. 가슴에 포개진 두 손, 깊은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차분하고 능숙하게 손수 디자인하고 손뜨개질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모델의 워킹이 끝났다.
지난 4월 열린 2012 FW 서울패션위크의 피날레는 기립박수로 마무리됐다. 6년 만에 공식무대에 선 패션 디자이너 이신우는 런웨이에서 다시금 남편을 떠올렸다. 6년 전, 3선 국회의원이었던 남편 박주천 의원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구속됐다가 감옥에서 병을 얻어 투병 중이었다. 남편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에게 ‘디자인하라’고 응원했다.“앞으로 모든 게 잘될 거라고 일하라고 했어요. 이젠 정말 그래야죠. 잘할게란 다짐이 부끄럽지 않게.”
둘째딸 박윤정 디자이너의 신사동 아틀리에에서 만난 그녀는 일흔 한 살의 나이가 무색했다. 딸을 박윤정 씨라 부르며 존대할 땐 디자이너인 딸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14년 전 ‘이신우’ ‘이신우옴므’ ‘오리지날리’ ‘영우’ ‘쏘시에’ ‘이신우 컬렉션’ 등 6개 브랜드를 채권자들에게 넘겨주고 사라졌던 노(老)디자이너는 이번 쇼에서 새 브랜드 ‘CINU(시누)’를 선보였다. 이미 최고의 자리에 섰던 패션 디자이너에겐 어쩌면 보잘 것 없는 출발선이다. 십수 년간 그녀의 세월이 궁금했다. 아버지부터 딸, 손녀딸까지 4대가 디자이너로 살고 있다는 그녀는 늘 디자인하고 있었다고 수줍게 웃었다.
FW 서울패션위크의 피날레를 장식했는데, 만족스러웠나.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은데… 오랫동안 고객이자 친구였던 김혜자 씨가 굉장히 감격했던 것 같다. 진태옥 씨도 그렇고.(웃음)
기립박수가 나왔다.
그건 생각이 안 난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거든. 쇼 마지막에 인사하러 나와서 꽃다발을 받았는데 나가기 전에 박윤정 씨(둘째딸)가 그러더라고 꼭 런웨이 가운데까지 나갔다가 오라고. 막상 나가보니 조명 때문에 아무것도 안보여서 바로 들어왔지. 딸이 밀쳐서 다시 나갔다.(웃음) 그제야 아주 조금 눈에 들어오더라고. 그때 모두들 일어나셨다고 들었다.
쇼를 준비한 기간이 꽤 길었을 것 같다.
그동안… 항상 만들고 있었다. 보여드릴 기회가 없었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옷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것 밖에 없거든. 그걸 하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돼. 항상 만들고 걸어놓기를 반복했다. 박윤정 씨가 총 디렉팅하면서 날 끌어줬는데 그 시작은 늘 작업하던 것이었지. 저 뒤에 있는 옷이 그렇게 한 땀씩 손뜨개질한 작품이다.
한국 디자이너는 졸품 디자이너인가서울패션위크에서 새 브랜드 ‘CINU(시누)’를 선보였는데, 구매하겠다는 고객도 있었나.>
예전에… 유통망이 있을 땐 그랬는데 지금은 고객들과 대면할 기회가 없네. 내 것도 없고. 이곳은 박윤정 씨의 아틀리에이자 회사인데 내가 기술고문을 자처하고 있거든.(웃음) 주문을 하려면 직접 오시는 수밖에 없다.
CINU는 2006년에도 참가했는데, 이번이 공식 론칭인가.
그때는 잠시 선을 보인 것이고 이번이 공식 론칭이다. 론칭이란 게 판매까지 이뤄져야 하는데 글쎄… 아직은 공식 론칭이란 말도 미지수랄까. 박윤정 씨 회사에 새로운 브랜드가 생긴 것이지.
브랜드의 콘셉트가 궁금하다.
난 항상 소재 개발부터 디자인 작업을 시작한다. 시대정신을 놓치지 않는 디자인, 그래서 생각을 이상에 맞춘다. 디자인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혹시나 너무 달라진 현실에 디자인이 영향을 받는 건 아닐까 수시로 자각했다. 아름답고 새로운 걸 만드는 작업은 현실이 어렵거나 풍요로운 것에 상관없어야 하거든. 그런데 영향을 받더라고.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게 가장 힘들다. 그걸 넘어서려는 노력은 런웨이에 드러난다. 난 늘 그게 참 신기하다.
칠순이 지났다. 감성을 유지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사람이 타고나는 것도 있다.타고 나는 것에 노력이 더해져야지. 난 감성은 타고 난 것 같은데 디자인 외에 다른 일은 백치 수준이다.
브랜드의 반응은 어떤가
이제 봐야지. 백화점에 매장이 없으면 그런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거든. 예전에 우리 옷을 입던 고객들이 지금은 명품이라 불리는 외국 브랜드를 입으시던데…. 요즘 간혹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얘기 어디 가서 하지 말라던데(웃음), 명품이란 말을 외국 디자이너 제품에만 붙이고 있더라고.
그럼 한국 디자이너들은 명품을 못 만드는 졸품 디자이너인가.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난 아직도 철없이 그런 생각을 한다.
업계에선 1990년대 이신우 브랜드가 명품을 코앞에 두고 사라졌다고 한다. 당시를 되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있을 텐데.
회사 부도 이후 10여 년 동안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터득한 건… 모두가 뭔가 잃고 마음 아파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픔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너무 혼자 아픈 척 하는 건 사치란 생각도 들고.
그 당시 얘기를 안 할 수 없는데.
음… 디자이너의 감성으로 생활에 필요한 모든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걸 국내에선 처음으로 시작했다. 남성복, 여성복, 잡화 라인까지 갖췄으니 그런 점에선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아직도 분홍글씨처럼 남아있는 멍에사업이 기울어진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1998년 1월 9일에 기울어졌는데… 1997년 10월부터 은행에서 대출연장이 안됐다. 그걸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막히더니 결국 부도가 났다. 그땐… 박주천 의원(남편)이 있었지… IMF때였다.
10년이 훨씬 더 지났는데, 당시 브랜드는 여전히 생산되고 있다.
난 지금도 지하철역으론 다니지 않는다. 간혹 그곳에서 내 이름을 단 제품이 팔리니… 그것도 보기 싫고. 지하철역이 미로 같아서 헷갈리기도 하고 그래서 주로 버스를 탄다. 야무지질 못해서 아직 스마트폰도 못 쓰는걸 뭐.(웃음)
지금은 모든 게 정리된 건가.
심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지. 하지만 어떻게 다 정리할 수가 있을까. 사업을 잘못했으니 부도가 났겠지만 한 가지 일을 몇 십 년 하던 사람이 일부러 부도를 내려고 했을까. 분홍글씨처럼 남아있는 게… 다 잊으려 해도 멍에를 지고 산다는 게…. 잘 모르겠다. 금전이나 숫자는 지금도 별 관심이 없어서…. 외국브랜드가 수입되기 전, 그러니까 좋았던 시절에 부동산을 구입한 디자이너들은 지금도 버티고 있거든. 난 그런 걸 우습게 생각했으니 철이 없었지. 하고 있는 사업 외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선진국에서 하던 방식, 그 방향을 그대로 따라하면 우리도 언젠가 되겠지. 세계적인 브랜드 하나 만들 수 있겠지. 그 하나 밖엔 없었다.
당시 아내는 디자이너, 남편은 경영으로 화제가 되곤 했는데.
남편은 난지도 박이라 불렸지. 그때 난지도에 전과자나 노숙자들이 많이 살았거든.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곳에 전기랑 물을 끌어다 주면서 그 동네가 상암동이 됐다. 쓰레기 매립이 결정됐을 때 큰 건설회사들이 그곳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허가를 받았는데 박 의원이 3년간 그 회사들과 싸우면서 생태공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게 지금도 선하다. 가끔 올림픽도로를 지나다 그 공원을 지나칠 땐….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이긴 한데, 오래 전엔 여자들이 여권 만들기도 힘들었거든. 그때 남편이 부처 관계자와 싸워가면서 여권을 만들었는데 아마 그때부터 정치할 생각을 했던 것 같네.
지금은 둘째딸과 함께 지내는 건가
쇼를 준비하면서부터 그렇게 됐네. 너무 힘들어서 같이 지내고 있다. 박윤정 씨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얼굴도 그렇고 분석력이나 추진력, 사람을 대하는 모습도 그렇고. 그래서 더 의지하는 것 같다.
후배들의 해외진출, 보기만 해도 감격스럽다 돌아보면 이신우란 브랜드 앞엔 최초, 최고란 타이틀이 참 많았다.
1971년에 ‘파리 국제기성복박람회’에 참여했는데 그땐 우리나라에 큰 견직회사가 많았다. 정부가 5개 견직회사 제품에 부가가치가 높은 디자인을 입히는 걸 내게 맡겼지. 파리 주최 측이 한국에서 서 무슨 디자인이냐 했을 때였으니 부스 자리 잡는 것도 힘들었지. 겨우 4층 구석에 부스를 차리고 태극기가 앞에 걸렸는데 얼마나 감격스럽던지.(웃음)
당시 우리 디자인의 수준은 어떠하던가.
충격이었지. 박람회를 준비하면서도 아무리 불란서라지만 우리보다 잘하겠어? 했는데, 전시장을 돌아보면서 얼굴이 붉어지더라고. 지금도 생생하다. 4층 부스에서 계단을 내려가 3층을 돌고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펑펑 울었다. 볼 게 너무 많고 배울 게 얼마나 많던지 그 잘난 척 하던 마음이 그대로 무너졌다.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하늘이 달라 보이더라고. 우물에서 벗어났다고 할까. 이후 서너 번 더 참석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많은 걸 보고 배웠다.
이후 뉴욕에 쇼룸을 내기도 했다.
파리박람회에 들른 미국 회사가 제안해서 내가 디자인한 제품이 그 회사 뉴욕 쇼룸에 걸렸는데 반응이 좋더라고. 그래서 앞으론 ‘디자인 바이 이신우’를 넣어 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해줬다. 2년 만에 그 회사 상품이 미국 전역에 진출했지. 그런데 그 회사가 오래가지 못하더라고. 그렇게 빨리 변하는 게 패션계다. 그때 생각했지, 싸고 좋으니 경쟁력이 생긴 것이지 아직 디자이너 마켓의 가격과는 천지차이다. 그럼 부딪혀보자. 컬렉션에 들어가려고 도쿄컬렉션, 파리컬렉션을 가졌고 뉴욕에 독립 쇼룸도 냈었다.
당시가 전성기였나.
1980~1990년대 중반인데, 당시가 우리 회사로선 전성기였지. 그때 회사에선 싫어했지. 국내 시장에 집중해야 장사가 잘되는데 자꾸 외국으로 돌아다닌다고.(웃음)
그렇게 차곡차곡 경험을 쌓았는데 왜 돌아온 건가.
누가 알려주는 것도 없이 하나하나 개척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그때 파리에 홍보를 전담하던 분들이 있었는데, 서너 번 파리컬렉션을 갖고 좀 쉬어야겠다고 연락했더니 펄펄 뛰더라고. 일본 디자이너들 마다하고 당신을 선택했는데 어떻게 쉴 수가 있냐고. 헬무트 랭보다 반응이 빨리 오고 있는데 왜 지금 그만두려고 하는 거냐고.(웃음) 간신히 두 시즌만 쉬면 될 것 같다고 얘기하고 끊었는데 그게 끝이었다. 여러 변수가 닥쳤고 IMF도….
그 또한 아쉬움이 많겠다.
크든 작든 그런 아쉬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아닐까. 타고 나길 털털한 걸.(웃음) 난 아버지를 꼭 닮았는데 아버진 그림도 잘하시고 악기나 춤도 잘하셨다. 옷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서 봉제, 수출 분야 훈장도 받았는데 그 피가 그대로 이어진 것 같다. 난 할 줄 아는 건 디자인 밖에 없어. 살림이나 요리도 못해서 박주천 의원한테 너무 미안했지. 그래서 그 사람 떠나고 더 슬펐던 것 같다.
후배들의 파리 진출이 늘고 있는데.
도움도 많아졌고 성과도 좋다. 누구랄 것도 없이 너무 잘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디자인이 사람들 눈에 띄고 싶다. 그건 우리 힘으론 안 되는 건데…. 나나 우리 둘째딸이나 딸의 딸이나 모두 순도 100% 소프트웨어다. 감성 하나만 있지. 자금이나 경영, 조직이 없다. 이렇게 지면에 실리면 좋은 회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웃음)
궁극적인 목표가 궁금하다.
난 역사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100년 기업을 꿈꾼다. 최근에 손녀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SK네트웍스 오브제 디자인실 막내로 근무 중이다. 내 아버지가 옷을 만드셨고 내가 40년, 딸이 앞으로 수십 년, 손녀딸까지 더하면 이미 100년은 훌쩍 뛰어넘는 것 아닌가. 아버지부터 4대가 디자인을 하고 있으니 감성만 놓고 따진다면 지금도 충분히 자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