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총선이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집권 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출구조사의 최대 의석수를 크게 뛰어넘는 결과에 정치권 안팎은 놀란 기색으로 술렁였다. 더불어민주당과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이 이번 총선에서 차지한 의석은 전체 300석 중 60%에 해당하는 180석으로 정치 역사상 전례 없는 수준이다. 개헌을 제외하고 모든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국민들은 압도적인 지지로 여당에게 부여했다. 정의당, 열린민주당 등 친여 성향의 의석수까지 합하면 190석에 달한다. 이에 반해 보수 야당인 미래통합당은 존립 기반이 흔들릴 정도의 참패를 당했다. 당이 비례 정당인 미래한국당을 포함해 확보한 의석수는 103석에 그쳤다. 보수 성향의 무소속 후보 당선자를 합해도 110석이 채 되지 않는다. 이 같은 선거 결과로 검찰 개혁 등 청와대와 집권 여당이 주도하는 국정 운영은 앞으로 거침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총선이 남긴 것들을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진보 우위 이념지형 변화
이번 총선 결과를 두고 정치 전문가들은 한국의 이념지형도 변화가 시작됐다는 분석을 일제히 내놓고 있다. 그동안 보수 우위의 유권자 성향이 진보 우위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2012년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51.6%로, 문재인 대통령 48%를 앞섰다.
탄핵 직후 열린 2017년 대선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41.08%를 얻어 승리했지만, 전체 표심은 보수 우위였다. 문 대통령과 당시 정의당 후보였던 심상정 대표의 지지율 6.17%를 더하면 47.25%였는데, 당시 후보로 나섰던 범보수로 분류되는 대선 후보였던 홍준표, 안철수, 유승민 이 세 사람의 득표율 합은 52.2%였다.
하지만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더불어민주당이 이번 총선에서 받은 득표율은 49.9%로 미래통합당 41.5%를 크게 앞섰다. 득표율로 봐도 민주당 후보는 총 1434만5425표를 얻어 통합당 후보(1191만5277표)보다 243만 표 이상을 더 얻었다. 이 수치는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정당투표 득표율과는 별개로, 전국 253개 지역구 후보들의 정당별 득표율을 말한다. 2012년 대선에서 박 전 대통령은 100만 표가 넘는 수치로 선거에서 이겼다. 여기에 더해 진보 정당인 정의당의 득표율을 더하면 진보진영은 이번 총선에서 민심의 50%를 넘게 장악했다. 다만 이 이념지형의 변화가 일시적인지, 아니면 시대적 큰 흐름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이번 총선을 바라보는 시각 중 하나가 코로나19 선거인데, 진보 우위의 민심이 전염병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이번 총선 결과를 두고 “위기 극복을 위해 현 여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심리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꽤 있다.
장성철 공감과논쟁 정책센터 소장은 “만일 해외에서 우리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호평이 없었다면 현 정부의 무능력한 모습이 부각되고 이는 표심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면서 “코로나19가 선거에 미친 영향이 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제21대 총선 투표율은 2000년대 들어 역대 최고치인 66.2%를 기록했다.
젊은 표심이 대거 더불어민주당으로 쏠려 승패로 좌우된 것으로 분석됐다.
▶50대가 우리 사회의 주류?
여기서 이 이념지형 변화와 관련해 주목해야 될 것이 있다. 바로 이번 총선에 나타난 50대의 표심이다.
50대 유권자(865만 명)는 이번 총선서 단일 유권자로 최대 수를 자랑하는데, 이들은 진보 성향을 뚜렷이 나타내며 민주당에 대거 힘을 실어줬다. 이는 세대 간 대결 양상으로 전개됐는데, 선거 결과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60대 이상의 압도적 통합당 지지는 50대의 민주당 전폭적 지지에 맥을 못추었다.
우리 사회의 허리격인 이 세대는 일반적으로 보수 성향을 띤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번 총선에서 이들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같은 50대의 정치 성향 변화와 관련해 ‘세월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 한국 사회의 50대는 과거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50대가 된 이들이 아니라, 민주화 세대를 경험하면서 나이가 들어온 세대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50대는 어느덧 60대가 되었고, 진보 성향의 40대가 어느덧 50대로 올라섰다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젊은 시절부터 가졌던 진보 성향의 의식을 바꾸지 않으면서 50대의 표심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진보 성향이 강한 30,40대가 대거 가세하면서 초거대 여당이 탄생한 밑바탕이 됐다는 것이다. 실제 2012년에 치러진 18대 대선을 보면 당시 기준 20~40대는 당시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비해 확실히 높았다. 대선 직후 공개된 방송사 출구조사 현황을 보면 각 연령별 문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20대 68.5%, 30대 66.5%, 40대 55.6%를 기록했다.
이 같은 흐름은 한국 사회의 주류 교체 논쟁과도 이어진다, 산업화 시대가 확실히 저물고 민주화 세대가 사회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어온 구조적 변동의 문제”라면서 “삽 든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경제적 주류를 대신하여 IT와 벤처, 인터넷 기업 등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경제적 주체들이 이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게 됐다”고 해석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큰 흐름으로 보기도 한다. 이번 민주당의 압승이 코로나19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이라는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제21대 총선 투표율은 2000년대 들어 역대 최심재철 미래통합당 대표권한대행 등 의원들이 4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인사하고 있다.
▶1.5당 체제 등장
이 대목에서 이번 총선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등장한다. 한국에서도 일본처럼 1.5당 체제가 자리 잡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사실 정치권에서 가장 관심을 갖는 대목이기도 하다. 만일 이 흐름이라면 앞으로 보수는 진보에게 빼앗긴 정권을 상당기간 가져오지 못할 확률이 높다.
더불어민주당은 2016년 총선부터,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총선까지 지난 4년간 전국단위의 선거에서 모두 승리했다. 한국 정치사에는 전례 없던 일이다. 이를 통해 집권 여당은 청와대 등 중앙권력으로부터 지방권력, 심지어 국회까지 완전하게 장악했다. 특히 이번 총선의 180석은 개헌을 제외하고는 모든 개혁 법안을 단독 처리할 수 있어 제1야당의 견제 역할을 유명무실케 해버렸다. 준연동형비례제로 꾀했던 다당제 또한 소수 정당의 몰락으로 의미 없어져 버렸다. 더불어민주당 말고는 다른 정당의 역할이 사실상 소멸된 이 같은 상황을 두고 1.5당 체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이 1.5당 체제는 미국의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일본의 자민당이 1955년 창당한 후 55년간 장기집권을 계속하는 것을 두고 이야기한 것인데, 1은 자민당이고 나머지 정당은 0.5에 해당된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의 견제는 기대할 수도 없다. 실제 일본에서 야당은 자민당 내에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방송에 나와 “3~4개월 전만 해도 진보와 보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잡힌 여론이 파악됐지만 이번 총선 결과를 보면 한국 정치는 양당 체제가 아니라 1.5당 체제라고 볼 수 있다”면서 “다음 총선에서도 또다시 민주당이 압승한다면 한국도 일본처럼 1.5당의 정치 체제가 고착화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성철 소장은 “한국 정치를 1.5당 체제와 동일시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파의 의석수도 한때 180석이 넘는 등 압도적인 우위를 보일 때가 있었다”면서 “일본의 자민당식 1.5당 체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과한 해석”이라고 했다.
▶지역주의 강화
진보진영이 압승한 이번 총선이 지역주의를 다시 잉태시켰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역주의를 없애자는 구호는 현대 한국 정치의 대 전제였다.
그런데 보수에서 진보로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이 바뀌는 과정에서 지역주의가 다시 부활한 것이다. 실제 이번 투표 결과를 보면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은 동서를 정확히 양분했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통합당에 대한 극심한 혐오, 현 여권이 영남을 적폐세력으로 매도한 것에 대한 반감이 겹친 결과라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해 여권의 차기 잠룡 김경수 경남지사가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해 이번 선거를 두고 “지역주의 부활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혔지만 별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는 “20대 총선 당시 부울경에서 8석이던 민주당이 이번에는 7석이 돼 의석수가 조금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득표율을 부울경 전체로 보면 한 5% 정도 증가했다”면서 “부울경 지역 주민들이 이제는 지역주의가 아니라 인물과 정당, 정책으로 판단하겠다는 걸 보여준 셈”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지역 유권자는 “진보진영의 자기식 해석”이라며 “전혀 바닥 민심을 모르는 것 같다”면서 “5% 증가로 지역주의가 없어졌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또 다른 유권자는 “코로나19 사태만 아니었다면 현 정권의 무능력한 경제 실정에 지역 민심은 확연히 돌아섰을 수도 있다”면서 “지역주의 논란을 일으킨 책임은 국민을 분열시킨 집권 여당에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진중권 교수도 “민주당 득표율이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코로나19 효과로 민주당 바람이 전국을 휩쓰는 분위기 속에서도 영남에서만은 외려 의석을 잃어버린 게 사실”이라면서 “득표율이 올랐다는 단순한 사실만 가지고 ‘진영 갈라치기로 인해 20대에 비해 지역대결구도가 강화됐다’는 해석을 반박하기는 좀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