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수, 손길승, 강유식. 이들은 2000년대 초반 최고의 뉴스메이커에 속했다. 각각 삼성그룹, SK그룹, LG그룹의 최고위직에 올랐던 그들은 그룹경영은 물론이거니와 오너 2·3세로 이어지는 후계구도를 구축하는 데도 참여해 한걸음 한걸음이 주시의 대상이었다. 재계에서는 이들을 일컬어 ‘2인자’로 불렀다. 오너 일가를 제외하고 그룹 내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현재, 이들처럼 강력한 전권을 가진 그룹 내 2인자는 찾기 어렵다. 그룹의 규모가 커지면서 과거처럼 다른 계열사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어려워진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여전히 ‘부회장’으로 불리는 2인자들의 권한은 막강하다. 그룹 대소사를 챙기는 것은 물론, 막대한 규모의 투자계획을 직접 결재하기도 한다. 일부 기업의 경우 부재 중인 총수를 대신해 경영을 맡고 있기도 하다. 막강파워를 자랑하며 재계의 2인자로 불리는 30대 그룹 부회장들을 살펴봤다.
샐러리맨 세계의 ‘왕별’
직장인들에게 최고의 기쁨은 바로 승진일 것이다. 하지만 승진을 해도 다시 또다시 승진을 위해 일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움직이는 기업 특성상 직책이 여러 단계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원에서 과장을 달고, 부장을 넘어 이사가 되면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스타’가 된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능력을 인정받아야만 직장인들의 꿈인 ‘별(임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별을 달아도 다시 위로 층층이다. 이사-상무-전무-부사장에 이어 사장이 되면 조직의 최정상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장 위에도 또 다른 별이 있다. 바로 그룹의 2인자로 불리는 ‘부회장’이다.
보좌부터 후계구도까지 관여
직장인들이 올라갈 수 있는 최상층에 위치하고 있는 2인자의 자리 ‘부회장’은 다양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대그룹을 안정적으로 성장시키는 탁월한 경영능력이 검증돼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너 일가에 대한 투철한 충성심과 평소 끈끈하게 맺은 방대한 인맥 동원능력도 필요하다. 2인자들의 업무가 경영보좌에서부터 후계구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때문이다.
부회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이들은 총수의 경영을 지근거리에서 돕는 ‘보좌역 부회장’이다. 이들은 오너 옆에서 경영전략 수립과 결정을 주관하며, 그룹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대표적인 이가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부회장)과 김용환 현대차그룹 부회장이다. 갤럭시 시리즈를 통해 글로벌 삼성시대를 연 최지성 부회장은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그룹 내에서 ‘사령관’으로 불린다.
최 부회장이 이끄는 미래전략실은 그룹의 인사, 재무, 기획, 법무 등 굵직한 경영현안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던 이건희 회장이 경영에 복귀 이후 그룹 전체를 조율하는 ‘조정자’ 역할을 맡으며 대외활동을 삼가고 있다. 최 부회장은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그룹성장 전략과 함께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승계를 주도하고 있다.
부회장만 10여 명에 달하는 현대차그룹에서는 김용환 부회장이 눈에 띈다. 그는 ‘정몽구 회장의 복심’으로 불린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정 회장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김 부회장은 현대차그룹에서 그룹 내 살림을 책임지는 전략기획담당을 맡고 있다. 총수가 여전히 활발한 경영활동을 하고 있어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는 최근 삼성동 한전부지 인수전을 승리로 이끌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밖에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과 이상운 효성그룹 부회장, 경청호 현대백화점 부회장 등도 오랜 기간 동안 총수를 보좌해온 2인자들로 꼽힌다.
이인원 부회장은 롯데쇼핑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다. 그는 “5년 내에 해외에 20여개의 점포를 열겠다”며 롯데그룹 경영 전면에 나선 상태다. 신동빈 그룹 회장이 롯데그룹 내 금융계열사를 챙긴다면, 이 부회장은 쇼핑과 백화점, 호텔 등을 책임지는 구조다.
이상운 부회장은 주력인 ㈜효성의 대표이사로 올라서며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에 이어 2인자 자리에 올라섰다. 여러 계열사를 거치면서 그룹 살림에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청호 부회장 역시 현대백화점 그룹 내 각 부문을 거쳐 2인자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룹 경영에 관련해 아직 젊은 정지선 회장에게 신중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오너 대역 전문경영인 부회장들
보좌역 2인자들이 강력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재벌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뛰어난 실적을 바탕으로 성장한 ‘전문경영인’ 스타일의 부회장들은 끈끈한 조직력과 자생력을 갖춘 지주사 체제의 그룹에서 주로 두각을 나타낸다.
대표적인 사례가 직원에서 회장까지 올랐던 손길승 전 전경련 회장이다. 손 전 회장은 SK그룹에 사원으로 입사해 요직을 두루 거쳐 그룹 총수에까지 올랐다.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의 급작스런 타계로 회장직에 올라 재계 서열 4위의 대기업집단을 잘 이끌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래서일까. SK그룹에서는 유난히 손 전 회장과 유사한 뛰어난 경영능력을 갖춘 전문경영인들이 눈에 띈다.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을 비롯해 김재열 SK㈜ 부회장과 구자영 SK이노베이션 부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LG그룹 역시 마찬가지다. 해마다 뛰어난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과 화장품 및 생활용품 시장에 파란을 몰고 온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글로벌 감각의 이희범 LG상사 부회장, 박진수 LG화학 부회장 등 뛰어난 경영능력을 가진 이들이 많다.
또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과 김현중 한화건설 부회장, 이재경 두산㈜ 부회장, 정지택 두산중공업 부회장, 이채욱 CJ제일제당 부회장 등도 뛰어난 경영실적을 바탕으로 2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반면 오너 이상으로 경영일선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2인자들도 있다. 대부분 은둔형 경영을 하는 총수와 함께 일하고 있는 경우다. 삼성그룹에서는 강호문 그룹 부회장이 눈에 띈다. LG경영개발원의 강유식 LG㈜ 부회장과 서경석 GS㈜ 부회장 역시 총수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김연배 한화그룹 부회장은 총수 부재로 인해 의도치 않게 전면에 나서게 된 경우다.
과거 원로고문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김승연 회장의 공백이 길어지면서 한화비상경영위원회를 이끌고 있다.
2인자의 전횡은 독이 되기도
이처럼 2인자들은 때로는 총수를 보좌하며, 때로는 총수보다 한발 앞에 나서며 활약을 하지만, 때때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특히 2인자의 전횡은 그룹에 치명적인 위기를 불러오기도 한다. 대한전선이 대표적인 사례다. 설원량 회장의 갑작스런 타계로 위기에 직면했던 대한전선은 비서실 출신의 임종욱 전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켰다. 고(故) 설원량 회장의 장남인 설윤석 사장이 아직 20대인 관계로 임 전 부회장을 전문경영인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임 전 부회장은 본업인 전선 사업 외에 부동산과 해외사업 등에 관심을 보였고, 그 결과 재계에서 ‘현금왕’으로 불리던 대한전선의 통장은 텅텅 비게 됐다. 몇 년째 이자마저 감당하기 어려워진 대한전선을 놓고 결국 설윤석 사장은 지난해 10월 회사를 살려야 한다며 경영권을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