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역에서 테크노밸리로 가다 보면 컴퓨터용 책상과 서랍장을 결합한 듯한 형상의 웅장한 건물이 눈길을 끈다. N과 C자를 본떠 설계했다고 해서 N타워, C타워로 불리는 엔씨소프트 R&D센터다. 이 건물 1층으로 들어서면 시선은 저절로 정원으로 향하고 그 정원은 공원으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이 회사 사람들은 공원 같은 건물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근처에 자리 잡은 넥슨 사옥은 겉으로 보면 커다란 성냥갑 같다. 그러나 건물 로비로 들어서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회사 사옥이 아니라 초특급호텔 로비 같다. 건물 곳곳엔 예술작품들이 걸려 있고 로비 한쪽엔 ‘넥슨 작은 책방’이라는 이름의 아담한 이미지 라이브러리가 인테리어처럼 건물을 장식하고 있다.
이들뿐 아니라 판교밸리 내 많은 회사들이 건물을 다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판교밸리에 들어서면 외국의 어느 도시에 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답다. 이곳 기업들은 왜 이처럼 건물을 공원처럼 또는 호텔처럼 꾸몄을까.
판교밸리 공공지원센터의 한 관계자는 “판교밸리 근로자의 절반 이상이 20~30대다. 전체적으로 젊은 사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첨단과학기술이 모인 젊음의 도시, 소프트 융합의 도시가 판교다”라고 설명했다. 건물들이 끼 있는 젊은이들의 눈길을 끌면서 동시에 첨단과학기술의 특성을 살릴 수 있도록 세워졌다는 얘기다. 넥슨이 들어선 땅은 6900평이나 되는데 그 위에 올라선 건물은 지상부만 해도 정부중앙청사의 85%나 될 만큼 넓다.
엔씨소프트 사옥이 들어선 부지는 3500평에 육박하는데 부지가 공원에 이어져 있어 거의 수만 평 정도로 보인다. 카카오가 입주한 H스퀘어 건물도 부지가 5565평이나 되고, SKC&C 컨소시엄의 부지는 8133평에 달한다.
기본적으로 넒은 땅에 지어졌기 때문에 판교밸리 건물들은 대부분 바닥 면적이 넓다. 넓은 건물은 서울의 좁은 건물에선 볼 수 없는 장점이 있다. 웬만하면 한 층에서 일하다보니 예전엔 모르던 직원들과 수시로 만나게 된다는 것. 그만큼 소통이 원활해졌다는 게 이곳 입주사들의 공통된 얘기다. 그런데도 이곳 기업들은 그것도 부족하다며 소통을 돕는 갖가지 공간들을 마련했다.
최현우 넥슨 홍보실장은 “서울선 5개 건물에 분산돼 회의 한 번 하려면 건물 밖으로 나와 길을 건너기도 하는 등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여기선 간단히 할 수 있어 소통이 훨씬 잘 된다. 같은 회사 다니면서 얼굴도 몰랐던 사람들을 휴게공간이나 사내식당서 마주치고 교육 프로그램에서 만나 친해지기도 한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비용절감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카카오의 이기연 씨는 “소통을 중시하는 회사이지만 역삼동에 있을 때는 여러 개 층에 나뉘어 있어 회의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곳에 와선 한 층에서 일을 하니 오가며 인사까지 한다. 자리가 넓어 쾌적하고 야근 환경도 편리하다”고 밝혔다.
H스퀘어는 한 층에 450명이 일할 수 있을 만큼 넓지만 카카오는 보다 더 넓은 공간을 빌려 공용공간을 대폭 확충했다. 토론을 통해 풀어가는 업무의 특성상 토론방이나 회의실 등 공용공간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경광호 엔씨소프트 글로벌실 차장은 “서울에선 4개 건물에 분산돼 있었기에 회의를 하려면 건물을 왔다 갔다 했는데 이곳에선 모여서 일을 하니 훨씬 시너지가 난다. 개발자들이 집중해서 일하기에 아주 좋은 구조다”라고 설명했다.
서서 일하는 책상도 도입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서 일을 하는 업무의 특성을 감안해 휴식공간을 대폭 늘리거나 젊은 엄마 아빠 등이 많다는 점을 반영해 어린이집을 대폭 확충한 것도 판교밸리의 특징이다.
최현우 넥슨 홍보실장은 “판교로 이주하기 전에 전 직원을 대상으로 설문해 건물 배치에 반영했다. 덕분에 사무환경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밝혔다. 회사 측은 개인 사무공간을 강남의 2배 정도로 넓혔고 조명도 각자 조절할 수 있도록 했으며 업무 외의 공간도 대폭 늘렸다. 특히 직원들의 창의력을 북돋우기 위한 크리에이티브 랩을 설치해 음악이나 미술 활동을 할 수 있게 했다. 또 40명이 들어가는 ‘교실’ 3곳을 마련해 직원교육을 하고 있고 피트니스센터와 전용 보건소도 두고 있다.
미취학 아이들을 돌보는 사내 어린이집을 아침 일찍부터 저녁 9시 30분까지 운영하고 여직원 수유공간도 마련했다. 구내식당이나 카페테리아는 기본이고 남녀 수면실과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전용 ‘모션캡처실’, ‘컴퓨터교육실’ 등도 만들었다. 옥상엔 조깅트랙과 농구 배드민턴장은 물론이고 채소를 재배하는 옥상정원까지 갖췄다. 이 정원에 부서별로 상추나 치커리 등을 키워 직접 쌈을 싸먹기도 한다.
엔씨소프트도 직원들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건물을 설계했다. 특히 소통이 중요한 게임개발의 특성을 반영해 공간 배정에 힘을 썼다. 다양한 콘셉트의 회의실을 여러 개 갖췄고 창의적 디자인의 접견실이나 쉬면서 미팅까지 할 수 있는 오픈라운지도 마련했다. 특히 직원들이 스터디 모임이나 팀별 워크숍, 세미나를 열 수 있도록 마련한 엔씨유니버시티가 돋보인다.
6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세미나홀과 5개 강의실, 2개의 미팅룸, 라운지 등으로 구성됐다. 라이브러리엔 게임은 물론이고 영화나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2만 권이 넘는 책을 비치했고 영화나 애니메이션 DVD 등 멀티미디어 자료도 다수 갖췄다. 최고 수준의 영상과 음향 시설을 만들었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화할 수 있는 200석 규모 게임시연실이나 결혼식장으로도 손색이 없는 630석의 컨벤션홀도 두고 있다.
이외에도 전문의가 상주하는 메디컬센터나 밤 12시까지 여는 여성전용 휴게실, 200명까지 돌볼 수 있는 사내 어린이집 등도 다른 회사가 부러워하는 시설이다.
임대 사무실을 쓰고 있어 아직은 공간이용에 제약을 받고 있는 카카오도 직원들의 기를 살리는 시설은 최대한 갖추려 하고 있다.
남녀 수면실을 마련해 일을 하다가 편히 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꼭 사무실뿐 아니라 광장이나 휴게실 등 어느 곳에서나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직원들이 가장 편한 자리에서 최고의 생산성을 올리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직업병 예방 수단 앞다퉈 도입
장시간 컴퓨터를 써야 하는 직장인의 고충을 풀어줄 시설도 다양하다. 여러 회사들이 피트니스센터나 농구장, 배드민턴장, 골프연습장 등을 갖추고 있다. 카카오는 아예 사무실에 필요할 경우 서서 일할 수 있는 환경까지 갖췄다.
정성열 씨는 “어느 날 한 직원이 책상 위에 박스를 놓고 일하는 게 보였다.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일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데 자세히 보니 앉았다 섰다 자세를 바꿔가며 일하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아 아예 회사에서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책상을 마련했다. 지금 개발자들은 누구든 앉아서 일하다 필요하면 서서 일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최현우 넥슨 홍보실장도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피로하면 계단에서 하고 또 소파에서 하기도 한다. 넓은 책상을 주고 머리받침 있는 메시의자를 지급해 일하다 편하게 누워 쉴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넥슨은 또 피트니스센터에 전문 트레이너를 상주시켜 피트니스나 요가 등을 지도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200명을 수용할 정도의 대형 피트니트센터나 동시에 40명이 들어갈 찜질방을 갖춘 것도 부족해 아예 전문의의 치료까지 받도록 하고 있다. 사내 메디컬센터에 척추 견인치료기와 통증 레이저 치료기 등을 갖추고 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문의가 사전적으로 신경계나 근골격계 질환을 예방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자체시설이 없는 중소기업이라도 판교밸리에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느 건물이든 밖으로 나가면 바로 공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언제든 가볍게 몸을 풀고 돌아올 수 있다. 게다가 인근에 공공 또는 사설 스포츠센터나 클라이밍 시설 등이 갖춰져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판교는 출퇴근 시간도 다르다
서울의 많은 회사들이 채택한 나인 투 식스(오전9시 출근 오후6시 퇴근)는 판교밸리에선 참고사항일 뿐이다. 카카오의 이기연 씨는 “우리 근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7시까지이나 업무 필요에 따라 조절이 가능하다. 이곳에는 9시 30분에서 10시 사이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업무의 특성을 고려해 근무 시간을 잡았다는 것이다. 넥슨은 아예 출퇴근 시간을 조직별로 다르게 정했다. “홍보실 근무시간은 오전 9시 30분에서 오후 6시 30분까지지만 게임개발 부서는 8~5시, 9~6시, 10~7시 등으로 다양하다. 8~5시 근무 부서의 경우 오후에 일찍 퇴근해 운동을 하거나 자기계발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있다”고 최현호 실장은 설명했다. IT기업은 야근이 잦다는 것도 옛말이다.
요즘은 여름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해가 중천에 있을 때 회사를 나오는 직원들도 적지 않다. 회사들이 쥐어짜기보다는 창의성을 살리려고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하는 데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물론 야근을 꼭 해야 하는 날도 있다. 온라인 게임 업체들은 보통 목요일에 업데이트를 하는데 유저들이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새벽에 업데이트를 하기 때문.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야근을 해야 하는지 여부는 대부분 각자에게 맡긴다는 게 이곳 기업들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