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식의 새로운 경제관리 체계를 확립할 데 대하여.’
이는 북한이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시행할 이른바 ‘6·28 조치’가 담겼다고 알려진 북한 내부문건의 이름이다.
북한 안팎에서 흘러나오는 6·28 조치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공업 분야에선 국가가 기업소에 생산을 위한 초기자금을 지원하고 생산계획, 가격, 판매방식 등은 기업소에 자율성을 주는 내용이다. 농업에서는 협동농장 수확물을 국가와 농민이 7대 3의 비율로 나눠 농민 몫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생산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자본주의 성과시스템을 도입하고 의사결정권의 상당 부분을 개인과 기업에게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6·28 조치는 북한이 2002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가 실패한 ‘7·1 경제관리 개선조치’의 연장선 위에 있다.
당시 북한은 과감한 경제개혁 조치들을 밀고 나갈 재원이 부족했다. 선군정치를 표방하며 기형적으로 커진 군부 기득권 세력의 반발도 거셌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는 2002년의 실패를 거울삼아 당·군·정에 흩어진 자금줄을 내각으로 집중시키려 애쓰고 있다.
최근 한 통일부 관계자는 “군부가 틀어쥐고 있던 외화벌이 사업들이 내각으로 이관되는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인민군이 훨씬 강도 높은 당의 통제를 받고 있는 징후들이 포착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북한의 경제회생이 김정은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제개혁을 밀고 나갈 충분한 ‘실탄’도 부족하고 중국을 빼고 나면 외자를 도입할 방법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북한 경제개혁 성공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 박 위원은 “권력 독점구조가 지속되는 한 (6·28 조치가) 연기만 크게 나는 불발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북한 경제회생 전략의 또 다른 축은 경제특구를 통한 외자 유치다. 경제특구는 전통적으로 저개발·체제전환 국가 경제개혁의 ‘신호탄’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북한이 경제특구 개발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개혁·개방을 이루려는 의도는 크지 않아 보인다. 단지 외자 유치를 위한 수단으이미지 정치에 올인
2012년은 북한이 설정한 ‘강성대국’ 원년이다. 북한은 지난 1998년부터 고 김정일의 핵심 통치구호로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을 내세워왔다.
지난해까지 북한은 한 해 정강정책을 드러내는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거듭 공언했다. 시간표대로라면 김일성 탄생 100년을 맞은 올해 북한은 진작에 “위대한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건설했노라”고 대내외에 선전했어야 했다. 하지만 현재 북한에서 강성대국이란 말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호가 폐기된 셈이다.
강성대국이란 사실 대단한 개념이 아니다. 북한이 사회주의 ‘사상대국’ ‘군사대국’이 됐으니 이제 인민들이 먹거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수준으로 경제를 개발하자는 의미다. 다른 나라들이 국민소득 3만달러 달성이니 경제성장률 8% 유지니 하는 것과 비교하면 소박한 목표다. 하지만 이마저도 슬쩍 폐기할 수밖에 없는 게 북한의 현실이다.
먼저 먹거리 문제를 보자. 북한이 설정한 강성대국의 필요조건은 알곡 생산량 700만톤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허황된 꿈이었다. 최소 수요량인 500만톤도 생산하기 어려운 농업현실에서 아무리 농민들을 쥐어짜고 학생들을 동원해봐야 효과는 미미하기 때문이다.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려면 비료 확보가 가장 중요한데 북한은 이마저도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참여정부 때까지 연간 30만~50만톤을 남측으로부터 지원받은 북한은 MB정부 들어 잇따른 무력도발과 핵개발로 비료 지원을 받지 못했다. 농업생산성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
올해는 기상이변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국제기구와 통일부는 올해 봄 가뭄과 태풍 등으로 북한의 식량생산량이 예년보다 60만톤가량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지난해 알곡 기준 생산량은 460만톤(추정치)이었는데 올해는 400만톤에 그칠 수 있다는 의미다.
주택건설도 목표에 한참 미달했다. 북한은 강성대국 원년인 올해 태양절(4월 15일)에 평양에 살림집 10만호를 완공하겠다고 공언해왔다. 체제를 유지하는 핵심계층을 위해 현대식 아파트를 선물해주려는 의도였지만 지금까지 실제로 주민이 입주한 주택은 1만호도 안 된다.
시멘트와 중장비 부족으로 공사가 계속 미뤄지고 있는 것. 이에 따라 완공 시기는 연말이나 내년 초로 미뤄졌으며 그나마 건설규모도 10만호에 못 미칠 전망이다.
강성대국의 두 축인 식량과 주택 사정이 전혀 나아지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김정은은 운이 좋다. 지난해 말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모든 책임을 떠안고 갔기 때문이다. 김정은으로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 셈이다.
춥고 배고픈 인민들에게 줄 선물이 없는 김정은은 집권 첫해 이미지 정치에 매달리고 있다. 부인 리설주와 함께 가정집을 방문해 설거지를 해주거나 놀이공원에 가서 인민들과 놀이기구를 타는 등 아버지 김정일과 다른 스킨십을 과시하는 것.
하지만 언론을 통해 선전하는 친서민 행보는 어디까지나 쇼일 뿐이다. 김정일 시대보다 더 가혹하게 탈북자와 가족들을 탄압하고 ‘신경제’를 하겠다면서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야말로 ‘김정은 1년’의 민낯이다.
로만 접근하는 모습이다. 한정된 공간을 개방하되 자본주의 풍조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장벽을 에워싸겠다는 것이다.
북한 경제특구 성공의 관건도 다름 아닌 돈줄이다. 현재 중국을 제외하면 딱히 북한의 경제특구에 돈을 댈만한 곳은 없다. 중국 민간 기업들은 중앙정부가 책임지고 기반시설을 닦아놓기 전까지는 투자를 꺼리는 분위기다.
물론 중국 입장에서 북한 경제특구에 관심을 가질 유인은 있다. 경제특구를 통한 북한 경제개방은 중국의 동북3성 개발구상에 있어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상당수의 민간 기업들이 대북투자 자체를 탐탁찮게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자원개발 업체인 시양그룹이 8월 초 중국 내 SNS인 ‘웨이보’ 등에 게재한 ‘북한 투자의 악몽’이란 글을 통해 대북투자의 위험성이 알려지면서 중국 기업들은 더욱 몸을 사리고 있다.
경제관리 개선조치 농업개혁 화폐개혁
‘6·28 조치’가 아직 본격 시행되지 않은 상태지만 북한 주민들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분위기다. 김정일 집권시절 반복된 경제개혁 실패로 불신의 골이 깊어진 결과다.
과거 경제개혁 가운데 일부는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지만 이내 권력층의 기득권 지키기로 개혁이 후퇴하곤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02년 경제관리 개선조치, 이른바 ‘7·1 조치’다. 김정일은 지난 2001년 1월 상하이를 시찰한 자리에서 “중국이 천지개벽했다”고 말한 뒤 10월 “사회주의 원칙을 지키되 최대한 실리를 도모하고 경제관리 방식을 혁신하라”고 주문했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해 7월 1일 발표된 게 바로 경제관리 개선조치다.
7·1 조치의 핵심은 시장경제 원리 도입이다. 국가계획위원회 권한을 공장과 기업에 위임하고 수익에 따라 분배를 차등화한 것. 이와 함께 배급계획을 폐지하고 임금을 현실화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다음해 4월 돌연 개혁조치를 거둬들였다. 개인과 기업소가 운영하던 상점들은 모두 간판을 내렸고 재산도 압수당했다. 시장경제 확산을 염려한 군부와 노동당 기득권층이 역공을 편 것이다.
2004년 농업개혁도 마찬가지다. 당시 북한은 중국의 가족단위 생산제도를 모방해 2~5가구가 분조를 이뤄 소규모 농지를 책임경작토록 하는 ‘포전담당제’를 도입했다. 토지사용료와 군량미 등 국가에 납부하는 물량을 제외한 나머지는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인정한 획기적 조치였다.
하지만 이듬해 북한 당국은 포전담당제를 전국으로 확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전면 폐지해버렸다. 기득권층이 사회주의 집단농장체제의 근간을 지키기 위해 개혁파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가장 가까이는 2009년 11월 전격 단행된 화폐개혁이 있다. 말이 화폐개혁이지 실상은 시장말살 테러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 조치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데는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통화가치를 100배로 높였지만 달러환율은 1년 만에 원위치로 돌아갔고 시장에서 유통되는 쌀값도 화폐개혁 이전 수준으로 치솟아버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북한 화폐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돈을 가진 사람들은 무조건 달러화나 위안화를 보유하려고 해 환율이 치솟았다. 시장을 탄압해 쌀 유통량이 줄어들자 거래가격도 급등했다. 시대역행적인 조치로 애꿎은 인민들만 고생이 배가된 셈이다. 유일한 성과라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던 시장상인들을 견제한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단기간에 그쳤다. 정책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이 심화돼 오히려 시장 통제력이 약화된 것이다.
결국 김정일은 화폐개혁 발표 넉 달 만에 정책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총살했다.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희생양을 세운 것으로 1997년 ‘고난의 행군’ 시절 기아사태의 책임을 뒤집어씌워 서관히 전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를 총살한 것과 판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