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통화 정책과 관련해 경제·경영학자들로부터 사실상 낙제점을 받았다. 경제적 측면에서만 평가한 점수가 정부보다도 훨씬 뒤진 것은 물론이고 금융투자업계보다도 낮게 나왔다. 이는 이 창간 2주년을 맞아 전국 대학의 경제·경영학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경제상황 인식 조사에 따른 것이다.
교수들은 세계 경제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로 대부분 유럽 재정위기를 꼽았지만 미국이나 중국 경제의 둔화도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국 경제에 대해선 절대다수가 위기는 아니지만 위기에 근접한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가계부채 대책에 대해선 절반 이상이 잘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다수의 교수들이 이번 경제위기를 접하면서 경제학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거나 금융과 재정 부문의 강의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조사 어떻게 했나
전국 대학의 경제·경영학과 교수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답변을 받는 식으로 진행했다. 경제상황에 대한 인식을 묻는 조사이기에 설문 대상엔 거시경제나 화폐금융 경영일반 재무 등을 전공한 인지도가 높은 교수들이 다수 포함됐다.
총 160명의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63명이 회신을 했다. 다만 2명은 본인 전공 등의 이유로 통계가 왜곡될 소지가 있다고 밝혀 집계에서 제외했다. 설문은 9월 6일부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3차 양적완화가 단행되기 직전인 9월 13일까지 진행했다.
글로벌 경기 2014년 이후나 회복 기대
국내 대학의 주요 경제·경영학과 교수들은 대부분 글로벌 경기가 2014년 이후에나 회복될 것으로 보거나 장기간 지지부진한 상태를 이어갈 것으로 내다봤다.
전체 응답자의 39.3%가 글로벌 경기가 2014년이나 돼야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2015년이 돼야 경기가 회복되거나 장기간 저성장 국면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29.5%나 됐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는 “일시적 경기 반등은 내년 하반기경 가능하겠지만 향후 몇 년은 저성장 기조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했다. 원용걸 서울시립대 교수는 “유럽위기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이후에나 경기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고, 양준석 가톨릭대 교수는 “유럽의 경제문제가 내년까지 풀리지 않으면 장기 저성장이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봤다.
올해 4분기에 회복될 것으로 예상한 답변은 한 건도 없었고 내년 상반기에 회복세로 돌아설 것으로 본 의견도 6.6%에 불과했다. 전체 응답자의 4분의 1 정도만이 내년 하반기 회복을 예상했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이처럼 경기회복이 늦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심리적 영향으로 실물경제 회복이 더욱 지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경제주체들이 경기부진을 예상해 투자나 소비를 줄일 경우 경제가 추가로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벤 버냉키 미 FRB 의장이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차 양적완화 정책을 강행한 것도 이 같은 심리적 요인에 의한 추가 위축에서 탈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세계 경제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에 대해 설문에 참여한 교수의 80% 이상이 유럽 재정위기를 꼽았다. 또 미국 경제의 둔화를 가장 큰 문제라고 꼽은 교수들도 14.8%나 됐다. 이 같은 응답이 나온 것은 유럽위기는 이미 벌어진 것이지만 세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미국 경제가 추가로 둔화될 경우 글로벌 경기회복을 기대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두 번째로 중요한 문제를 묻는 데 대해선 조사 대상의 44.3%가 중국 경제의 둔화를, 24.6%가 미국 경제의 둔화를 각각 꼽았다. 교수들이 미국이나 중국 두 나라 경제가 모두 심각한 국면에 있다고 보는 셈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조금 넓은 시각에서 보면 여러 가지 구조적 요인, 특히 디레버리징에 의한 총수요 부족이 다년간 지속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송병호 동국대 교수는 “1차적으로는 유럽 재정위기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만 더 심각해질 경우 유로존이 붕괴할 가능성도 있다”고 제기했다.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글로벌 공조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 교수들은 재정지출을 놓고는 찬반양론으로 팽팽히 갈렸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개입이나 양적확대에 대해선 대체로 지지 의견을 보였다. 공조가 가장 필요한 사안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27.1%가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한 긴축재정을 지지한 반면에 25.4%는 성장 확보를 위한 재정지출 확대를 지지했다. 두 번째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공조 사안에 대해선 29.8%가 금융기능 회복을 위한 중앙은행의 개입을, 또 같은 비율의 교수들이 재정부담 없는 성장을 위한 양적확대를 지지했다. 환율 안정을 위한 통화증발 억제가 필요하다는 응답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돈을 풀어서라도 경제를 살리는 게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한국 경제 위기 아니나 안심 못할 상황
한국의 상황에 대해선 위기라고 보거나 평상 수준으로 본 의견은 각각 8.2%와 4.9%에 불과했고 67.2%가 위기는 아니지만 위기에 근접한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정도에 대해선 위기 쪽에 근접했다는 시각과 평상 수준에 가깝다는 시각이 반반 정도로 나왔다. 김경수 성균관대 교수는 “다운사이드 리스크가 크게 증대하고 있다”고 했고,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는 “구조적 측면에서는 위기에 근접한 상황”이라고 평가했으며, 이준행 서울여대 교수는 “위기는 아니지만 장기 불황 조짐 가능성이 대두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반면 문춘걸 한양대 교수는 “저성장 국면이지만 국외의 나쁜 상황 하에서 그나마 선방하고 있다”고 평가했고, 양준석 가톨릭대 교수는 “더 심한 경제침체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만 ‘위기’나 ‘위기 전’이라고 부르기는 아직은 과한 것 같다”고 봤으며, 송병호 동국대 교수도 “약간 나쁜 정도”로 인식했다.한국 경제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로는 60.7%가 일자리 창출을 꼽았다. 분배보다는 성장을 통해 현재 경제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어 양극화 해소와 가계부채 축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각각 14.8%씩 나왔다. 그러나 두 번째로 중요한 과제에 대해선 42.6%가 가계부채 축소를 꼽았고 14.8%만이 양극화 해소를 들었다. 이를 볼 때 일자리 창출과 가계부채 축소, 양극화 해소 등의 순으로 정책 우선순위를 두는 게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물가안정이나 사회안전망 확충을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의견은 하나도 없었으며 두 번째로 중요한 사안을 묻는 질문에서도 2~3명만 지지했다. 그보다는 부동산경기 회복이나 공공부채 축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가계부채 대책 잘못
현 정부의 가계부채 대책에 대해선 50.8%가 잘못하고 있다고 응답했고 42.6%가 보통이다고 평가했다. 대책이란 게 없어서 평가를 할 수조차 없다는 비판적 의견도 나왔다. 그만큼 가계부채 대책에 대해선 불신이 큰 셈이다. 정부의 대 기업 정책 중에서 가장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선 42.6%가 공정거래를 꼽았고 다음으로 노동시장의 안정성 확보를 들었다. 두 번째로 미흡한 기업정책으로는 중소기업 지원을 꼽은 응답이 29.5%로 가장 많았고 공정거래를 두 번째로 든 응답도 21.3%나 됐다. 현 정부 들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강조했지만 여전히 변죽만 울리고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보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