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6일(현지시간) 프랑스 좌파는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프랑스 대선 개표 결과, 중도좌파인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후보가 51.1%의 지지를 얻어 사르코지 대통령(48.9%)을 누르고 새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1995년 미테랑의 사회당 집권 이후 17년 만에 탄생한 좌파 정권이었다. 올랑드가 새롭게 내건 정책기조는 경제성장과 정부 부채 감축이었다. 재정건전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성장을 통해 프랑스를 경기 침체에서 구해내고, 한 발 더 나아가 유로존의 재정위기 사태를 극복하겠다는 주장이었다.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것으로,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좌파의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이다. 좌파가 내건 캐치프레이즈가 경제성장과 재정건전성이라니. 재정 긴축에 견디다 못한 유권자들의 아우성에 호응한 결과라지만 프랑스 사회당의 정치적 현실 감각과 정책적 융통성에 놀라게 된다.
프랑스 좌파의 재집권을 모두가 축하한 것은 아니다. 시장이 거센 역습에 나섰다. 올랑드의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유로화 가치는 곤두박질을 쳤고, 전 세계 증시도 약세를 면치 못했다. 글로벌 국채시장에서는 일본 국채 등 안전자산으로 돈이 몰렸다. ‘올랑드 리스크’가 반영된 탓이다. 올랑드가 성장을 위해 정부지출을 확대했다가 국가부채만 부풀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시각은 낙관적이다. ‘올랑드와 프랑스 사회당이 막무가내 좌파는 아니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유럽 좌파의 합리적인 현실 감각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태와 묘하게 오버랩됐다.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가 폭력으로 얼룩졌던 지난 5월 12일 밤, 진보 논객으로 꼽히는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오늘로 대한민국 진보는 죽었습니다”라고 논평했다.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비합리와 몰상식, 소름 끼칠 정도의 경직성에 대한 탄식이었다. 통합진보당은 4·11 총선(제 19대 총선)을 통해 지역구 7석, 비례대표 6석이라는 괄목할 만한 약진을 실현했다. 그러나 비례대표 부정선거 논란이 빚어지면서 심각한 내홍에 시달렸다. 이 과정에서 외부비판에 귀를 닫은 당권파의 비상식적인 행태에 상당수 국민들이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같은 좌파라도 수준과 품격은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왜 한국에는 유럽 좌파처럼 합리적인 좌파, 변신할 줄 아는 좌파가 없는 것일까.
유럽 좌파가 처음부터 세련됐던 것은 아니었다. 220여 년 동안 숱한 시행착오와 좌충우돌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융통성과 합리성을 갖추게 됐다. 전 세계 좌파의 본향(本鄕)격인 유럽 좌파의 역사가 한국 좌파가 갈 길을 제시해주지는 않을까.
장면 #1. 1789년 좌파의 탄생
좌파의 역사적 기원은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89년 혁명 직후 프랑스 국민의회에서는 국왕권한에 대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좌석이 분리됐다. 급진파(공화파)는 의장 자리에서 볼 때 왼쪽에 몰려 앉았고, 보수파(왕당파)는 오른쪽에 앉았다. 당시 급진파는 국왕 거부권 폐지, 단원제 의회, 선출에 의한 사법부 구성, 권력 분립, 강력한 입법부 등을 주장했다.
공화파가 득세한 1792년 국민공회에서도 왼쪽에 급진적인 자코뱅파 의원들이 앉고, 오른쪽에 보수적인 지롱드파 의원들이 앉으면서 이러한 관행이 굳어졌다. 이후 유럽의 정치판에서는 좌우 구도가 보편적인 정치 모델로 자리를 잡게 된다. 지금도 상당수 유럽국가 의회에서는 좌익정당 의원들은 의장석에서 볼 때 왼쪽에 앉는다.
장면 #2. 1848년 혁명
유럽 좌파들에게 1848년은 가슴 떨리는 ‘혁명의 해’로 기억된다. 1848년 혁명은 왕정 복고적인 빈 체제를 허물어뜨린 범 유럽적인 반항운동을 뜻한다.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도 이 해에 발표됐다.
1848년 혁명의 상징성은 국제적인 확산성에 있다. 같은 해인 2월 22일 발발한 프랑스 2월 혁명에서 촉발된 혁명의 불길은 불과 수주 만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10개국 정부를 전복시켰다. 심지어 그 파문은 남미 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에릭 홈스본은 이때를 ‘인류 역사상 세계혁명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로 꼽기도 했다. 1948년 혁명은 사회주의자가 전면에 등장한 첫 혁명이었지만 자본주의를 대결상대로 삼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 결국 가장 허무한 혁명으로 기록되고 만다. 혁명 발발 1년 반 후에는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원위치’로 되돌아왔다.
장면 #3. 1917년 볼셰비키 혁명
1917년 11월 7일(구력 10월 25일. 러시아에서는 16세기까지 율리우스력을 씀).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의 적위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겨울궁전을 점령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 ‘다수파(多數派)’를 뜻하는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1917년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2월 혁명에 이은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었다.
이후 볼셰비즘은 과격한 혁명주의자나 과격파의 의미로 쓰이며 유럽 좌파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유럽의 급진좌파에게 사회주의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대안이 아니었다. 혁명을 통해 이룩해야 할 목표가 됐다.
레닌 입장에서 ‘마르크스 주의에 바탕을 두되 폭력과 독재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적 방법을 통해 사회를 개조하겠다’는 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는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결국 1919년 레닌은 제3 인터내셔널을 결성하면서 사회민주주의를 수정주의로 몰아 배격했다. 유럽좌파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공산당과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지 않은 사회주의, 즉 사회민주주의로 뚜렷한 분화를 시작한 것이다.
장면 #4. 19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된 1951년 7월 2일. 자유세계에 속한 약 30개 사회민주주의 정당 대표들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모여들었다. 사민주의 정당들의 국제 연맹체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제1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정당대표는 이날 ‘민주사회주의의 목적과 임무’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흔히 ‘프랑크푸르트 선언문’이라고 부르게 되는 역사적 문건이다. 문구와 의미는 명확했다. 선언문은 “볼세비키 혁명 이후 공산주의는 국제노동운동을 분열시켰고 많은 나라에서 사회주의 실현을 수십 년은 지연시켰다”며 “공산주의가 사회주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며 사회주의 전통을 알아볼 수 없게 왜곡시켰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소련식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진영논리로서는 유럽 좌파의 주류가 된 사민주의 세력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세계 편에 서 있음을 명확히 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추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뚜렷해졌다.
장면 #5. 1968년 혁명
1968년 3월 프랑스 파리는 혁명의 흥분으로 가득 찼다. 도화선은 월남전 반대를 외치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무실을 습격한 8명의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이 체포되자 파리 전역에서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이어 파리 전체 노동자의 3분의 2가 참여한 총파업이 벌어지자 완고했던 드골 정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5월 혁명’ ‘68혁명’ ‘제2의 프랑스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1968년 혁명은 노동자 세력의 대열 이탈로 동력을 잃고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평등, 인권, 성해방, 생태 등의 진보적인 가치들은 이후 유럽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유럽 좌파들이 1968년 혁명을 문화·생활혁명으로 여기는 이유다.
미 예일대 석좌교수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이제껏 세계혁명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그리고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정반대의 평가도 있다.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이 그렇다. 당시 13세였던 그는 “노동가치를 폄훼한 1968년 5월은 청산돼야 할 역사”라며 “일하지 않는 프랑스병의 원인이 1968년 혁명에 있다”고 주장해왔다.
장면 #6. 1973년 유러코뮤니즘
1973년 10월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자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기민당과의 연립을 모색하는 ‘역사적인 화해’ 노선을 선언했다. 유럽 공산당이 스탈린주의와 결별하고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유러코뮤니즘의 결정판적 장면이었다.
유로코뮤니즘이란 1970년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 휘몰아친 공산당의 자주노선을 뜻한다. 유로코뮤니즘의 배경에는 ‘좌파 내 구분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필요가 작용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무참히 짓밟은 소련은 물론이고, 적군파 등 극좌파하고도 뚜렷한 선을 그어야 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유럽 공산당 가운데 가장 잘 나가는 공산당이었다. 지지율이 기민당에 육박할 정도였지만 보수 기민당과 손을 잡음으로써 정상적인 정치참여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해피엔딩은 없었다. ‘역사적 화해’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서 당시 베를링구에르의 상대역이었던 기민당 지도자 알도 모로가 1978년 3월 16일 극좌 테러단체인 ‘붉은 여단’에게 납치당한다. 납치 54일 만에 발견된 모로의 시신은 이탈리아 좌우 분열의 기폭제가 되고 만다.
장면 #7.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1989년 11월 9일 동서독을 가로막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40여 년간 유지됐던 동서 냉전도 붕괴됐다. 수훈갑은 헬무트 콜 서독 수상이었다. 훗날 역사가들은 “(콜 수상은) 잠깐 동안, 좁게 열려있던 단 한 번의 통일 기회를 기가 막히게 활용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통일의 기초는 훨씬 전에 깔려있었다. 역사가들은 우파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좌파 빌리 브란트 총리의 시대적 역할 분담에 주목한다. 1949년 서독(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총리로 취임한 아데나워는 철저한 친미 반공 노선을 걸었다. 1963년까지 14년의 집권기간 동안 그의 업적은 서독의 경제 재건과 국제적 신뢰회복이었다.
1969년 좌파 사민당이 정권을 인수했다. 최초의 좌파 총리인 빌리 브란트는 취임사에서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고 동구권과의 화해 정책에 나섰다.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사회복지 제도를 대거 도입하면서 변화를 꾀했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방문한 브란트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유태인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서독 총리의 모습에 세계는 감동했다. 결국 굳게 잠겨 있던 동구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우파 아데나워의 뚝심과 좌파 브란트의 솔직함, 중도적인 콜의 결단이 수십 년에 걸쳐 어우러진 결과가 독일 통일의 위업이었다. 실제로 기독교민주당 출신인 콜 수상은 경제발전에 주력하면서도 외교적으로는 사민당에서 추진했던 동방정책을 그대로 계승했다.
장면 #8. 1998년 ‘제 3의 길’
1994년 7월 토니 블레어가 영국 노동당 당수로 취임했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 1989년 독일 통일과 1991년 소련 붕괴, 그리고 대처주의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노동당은 무섭게 변해간다. 결국 1997년 선거에서 노동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18년 만의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1998년 블레어의 신좌파노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책이 발간됐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The Third Way)’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제2의 길)와 ‘퍼주기 복지’로 노욕의욕을 떨어뜨리는 구닥다리 사회민주주의(제1의 길)를 함께 극복하자는 것이다. 중도좌파적 정치노선과 정부의 시장 간여를 일부 인정하는 새로운 혼합경제노선을 통해 평등과 효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의미다. 제3의 길은 사민당 출신 슈뢰더 독일 총리의 ‘신중도노선’의 이념적 지표 구실을 했다.
장면 #9. 2003년 ‘아젠다 2010’
지난 4월 12일 한국의 기획재정부는 ‘독일경제 호조의 4가지 요인 및 시사점’이라는 제목의 보도참고자료를 배포했다. 유로존 전체가 심각한 경기침체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나홀로 호황’을 보이고 있는 독일 경제의 주요 원인을 분석한 보고서였다. 기획재정부가 첫 번째로 꼽은 성공비결은 독일정부의 일관성 있는 개혁 추진이었다.
좌파 성향의 사민당 출신인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1998년 독일 총리직을 맡았다. 당시 독일 경제는 통일 후유증과 과잉 복지, 높은 실업률 때문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로 불릴 정도였다. 2003년 3월, 슈뢰더 총리는 승부수를 던졌다. 고용-연금-의료-세제-교육 개혁 패키지인 ‘아젠다 2010’을 발표했다. 핵심은 복지 혜택은 줄이고, 해고를 쉽게 해 노동 유연성을 높이며, 소득세와 법인세율은 낮추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슈뢰더 총리는 2005년 총선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독일 경제는 서서히 활력을 되찾고 있었다. 후임 메르켈 총리는 ‘아젠다 2010’의 틀을 그대로 이어받아 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나홀로 호황’이다. 좌파가 닦아놓은 번영의 기초를 우파가 향유하고 있는 셈이다.
장면 #10. 프랑스 좌파 17년 만에 정권 탈환
5월 15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선 ‘진보의 부활’을 축하하는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17년 만에 좌파 집권을 실현시킨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이날 공식 취임했다.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그가 달려간 곳은 독일 베를린이었다.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나 유로존 재정위기 해법을 둘러싼 독일-프랑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시장에 ‘올랑드 리스크’에 대한 불안감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유로존의 두 축인 독일-프랑스가 갈라설 일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변화할 줄 아는 좌파’, ‘말이 통하는 좌파’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유럽 좌파, 특히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변신은 흐르는 물을 연상케 한다. 통일된 이론도 없고, 개념도 없다. 획일적 사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유럽 좌파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시대와 호흡하며 좌파 내부에서 치열한 노선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융통성이 있었기에 유럽 좌파들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대중정당으로 안착시켜 복지국가의 틀을 세우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올랑드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런 유럽 좌파의 흐름은 한국 좌파나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의 목적은 국가 발전과 국민의 행복이라는 것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