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임원으로 5년 간 재직한 A전무는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요즘 ‘임원 내려놓기’ 작업에 한창이다. 불출마를 선언한 국회의원들의 ‘여의도 탈출기’가 한창 이슈인 시기에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직접 자동차 핸들을 잡고 운전하는 건 기본, 버스나 지하철로 출퇴근하면서 후불제 교통카드를 어디에 대고 나가는지, 환승할 땐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꼼꼼히 익혀나가고 있다. 아직 퇴직 전이니 출퇴근은 운전기사가, 그외 일은 비서가 대신해 줄 수 있지만 은퇴를 결심하고선 직접 해야 하는 순간 당황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막상 떠날 때가 되니 5년 전 임원이 됐을 때가 생각납니다. 월급이 껑충 오르고 기사 딸린 차에 골프회원권까지, 집사람이나 애들한테 어깨 좀 폈죠. 그런데 딱 그때뿐이었어요. 5년이 얼마나 빠르던지. 30년 간 이 회사에 근무하면서 임원이 됐는데 아쉬움이 왜 없겠어요. 이렇게 떠날 걸 왜 그렇게 버둥댔나 싶기도 하고 신임 임원들을 보면 길어야 10년인데 참 힘들게 산다 싶기도 하고.”
근속 비결을 묻자 A전무는 “경쟁 우위는 유능이 아니라 생존”이라며 “강해서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게 강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35년 간 직장생활에서 A전무와 서로 경쟁을 펼친 직장 동료는 몇 명이나 될까. 헤드헌팅업체 유니코써어치가 지난해 가을에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100대 기업 임원이 되려면 직장 동료 105명과 경쟁을 치러야 했다. 매출액 기준 100대 상장 기업을 분석한 결과 상근 임원 수는 6619명, 직원 수는 69만6284명으로 직원 수 대비 임원 수가 105.2대 1이었다. 당시 집계로 100대 기업 중 임원과 직원 수가 가장 많은 곳은 삼성전자였다. 직원 10만453명에 상근 임원이 966명으로 임원 1인당 직원 수는 104.0명이었다. 전체 평균에 가장 근접한 수치다.
한 컨설팅업체 간부는 "임원이 되기 위해서 수업이 많은 경쟁을 치렀지만 임원이 되면 차원이 다른 경쟁이 기다린다”며 “임원의 경쟁은 둘 중 하나가 떠나야 끝날 때도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105대1의 경쟁률을 뚫고 별을 달았지만 그 이후가 더 치열하다는 말이다. 대기업 임원으로 은퇴한 한 인사는 “회사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임원이 되면 운전기사, 비서, 골프회원권, 헬스클럽회원권에 파격적인 보수와 인센티브까지 만족의 수준을 넘어서는 대우가 뒤따른다. 오죽하면 두어 차례 연임하고 퇴직하면 웬만한 중소기업 사장보다 낫다고들 한다. 도대체 누가 먼저 나가려고 하겠나. 또 누가 오너에게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되묻기도 했다.
한 건설회사 간부는 “임원이 된 후 한 시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업무에 대한 전문성은 기본이다. 건강관리부터 업무, 가족관계까지 깨끗이 관리해야 한다. 여기에 두어 가지 외국어는 기본이고 국내 정세, 해외 정세도 꿰고 있어야 한다. 주말이면 골프장에 나가야 한다. 가기 싫어도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일부러 이겨야 할 때도 있고 져야 할 때도 있으니 기본 실력은 갖춰야지. 갑과의 저녁 약속이 술자리라면 안 마신다고 뺄 수도 없으니 술은 기본이고, 요즘 ‛개그콘서트’ 유머도 서너 가지 이상 알아야 분위기가 돈독해진다. 다른 임원들도 이렇게 살 텐데 어떻게 쉴 수가 있나.” 라며 현 상황을 이야기 했다.
그렇다면 이른바 동료 임원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어떤 점이 선행돼야 할까. 허영종 커리어케어 전무는 “임원의 경쟁력이 곧 회사의 성과로 이어진다”며 “개인이 아니라 팀워크가 바탕이 된 임원 간의 경쟁이 회사의 경쟁력으로 돌아온다”고 강조했다. 허 전무는 “경쟁에서 이기려고만 하는 임원은 빨리 도태된다. 잠시 반짝할 순 있지만 서로 돕는 팀워크를 무시한 경쟁은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결국 동료가 등 돌리고 부하 직원과 상사의 마음이 떠난다”고 덧붙였다.
Competition 1. 1시간 먼저, 1시간 뒤에!
“임원은 꽃이다. 그건 화려해서가 아니라 꺾기 쉽기 때문이다. 넌 그 꽃 중 가장 꺾기 쉬운 꽃이야!”
2년 전 IT기업의 이사가 된 B이사는 사내 임원 중 유일한 지방대 출신이다. 승진 발령이 난 후 대학동기들과의 축하모임에서 술이 거나해진 한 친구가 대뜸 ‘꺾기 쉬운 꽃’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그가 봐도 동료 임원들의 스펙은 화려하다 못해 휘황찬란했다. 명문대는 기본이요 미국 유학을 갔다 온 이도 여럿이었다. 모임 이후 그는 새삼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다. 엔지니어로서 실력으로 승부해 임원까지 올랐지만 마주한 현실은 왠지 꺼림칙했다. B이사는 우선 부하직원들에게 집이 멀어 출퇴근 시간을 조정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다음 날부터 동료 임원들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해 1시간 늦게 퇴근하길 반복했다. 저녁 약속이 없을 때면 정확히 가장 먼저 출근하는 임원보다 1시간 먼저, 가장 늦게 퇴근하는 임원보다 1시간 늦게 퇴근했다. 반응은 6개월 뒤부터 서서히 나타났다. 처음엔 사원들 사이에 얘기가 돌더니 차장, 부장급들도 수군대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난 뒤 그는 사원들에게 ‘에너자이저’란 별명을 얻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지난해 시무식 땐 사장도 그의 별명을 거론했다. “올해는 신규 사업 개발에 가장 많은 투자가 이어질 겁니다. B이사님이 수고해주세요. 그 팀이 에너자이저팀이라면서요?”
Competition 2. 잡스도 아닌데 웬 외골수?
C상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스티브 잡스다. 그가 사망하고 전기가 출간됐을 땐 회사 앞 서점이 문을 열자마자 책을 집어 들었다. 잡스 주변에 인재가 넘쳐났다는 사실과 그의 괴팍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잡스와 일할 때면 마치 그게 세계의 중심 같았다. 뭔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성공에 대한 확신이 섰다”는 책 속의 증언이 특히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기가 출간되기 전부터 C상무의 잡스 사랑은 유명했다. 회의 시간이면 늘 잡스 얘기가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잡스 때문은 아니지만 C상무는 임원회의 때면 옳다고 생각하는 건은 끝까지 밀고 나가려고 노력했다. 임원회의에서 확실한 목소리를 확보하고 ‘가능성 있는 건 밀고 나가지만 아닌 건 아니다’란 입장이 자신의 경영철학임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하지만 어느 날 부사장의 한마디에 C상무는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C상무님, 여기는 애플이 아닙니다.”
화장실 양변기에 앉아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골몰하던 C상무는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매번 회의 때마다 사사건건 자기만 옳아요. 고집이 센 건지 외골수인 건지.” “C상무가 잡스 팬이라며, 잡스도 아니면서 웬 외골수?”
Competition 3. 과욕은 침몰의 지름길!
D이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엘리트 코스만 밟았다. KS에 동 대학원, 아이비리그 MBA까지. 남들이 보면 입이 떠억 벌어질 만큼 스펙이 화려했다. 당연히 직장생활도 승승장구. 입사 동기 중 가장 빠르게 승진을 거듭하더니 서너 기수 윗선배들을 제치고 임원이 됐다. 회장단과 신임 임원들의 첫 저녁식사 자리에선 특별히 그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임원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안고 있던 D이사는 회사에서 지원한 헬스클럽회원권과 골프회원권을 보곤 현실의 달콤함과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하지만 1년 후, D이사는 사내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이유를 모르는 이는 D이사뿐이었다.
D이사는 최근 전무가 주재한 사업개발회의 시간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회의시간에 자신이 추진하는 사업을 왜 지원해주지 않느냐고 자금 담당 임원과 지원부서 임원을 닦달하던 D이사에게 전무의 호통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너무 목표치가 높았던 것 아닙니까. 지금 회사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겁니까. 그 건을 지원하기엔 지금껏 투자된 자금도 회수가 불투명하잖아요. 게다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도 완성이 안됐고 협력사도 갖추지 못했어요. 너무 혼자 앞서가는 것 아닙니까. 이 회의는 보폭을 맞추자는 것이지 앞서가자는 게 아니에요!”
Competition 4. 투서로 흥한 자 투서로 망한다?
지난해 전무로 승진한 E전무는 올 초 퇴직했다. 퇴직하던 날 학교 후배이자 동료 임원이던 F상무의 조언에 뻥 뚫린 가슴이 아직도 서늘하다. E전무는 상무 시절 지근에서 사장을 보좌하며 수행비서 아닌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오죽하면 사장님 댁으로 출근해 그곳에서 퇴근하는 날도 비일비재했다.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만 빼면 늘 붙어 다녔다. 자연스럽게 그 어렵다던 독대 시간도 길어졌다. 지방 출장이라도 갈 때면 서너 시간 이상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어느 부서가 요즘 어떠냐는 질문에 자질구레한 소문까지 보고했다. 자연스럽게 사내에선 ‘2인자’ ‘승진 1순위’란 말이 돌았다. 하지만 사장이 F상무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질문하기 시작하며 그의 승승장구가 무너졌다. 처음엔 가감없이 F상무를 이야기하다 어느 순간 근거 없는 소문까지 입에 올리게 된 것이다. 한두 번 상황이 이어지자 사장은 오가는 맞장구 없이 조용히 E전무를 응시했다. 퇴직하던 날 그를 찾아온 F상무는 한참을 망설이다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어갔다.
“사장님이 그러더군요. 선배가 제 학교 선배라 망설였는데 오히려 시시콜콜한 것까지 세세하게 답해줬다고. 임원들과 돌아가면서 점심식사 할 때 사장이 묻는 고정 레퍼토리가 누가 어떠냐는 겁니다. 제겐 선배를 묻더군요. 그때 그러시더군요. 누가 임원이 되면 이상하게도 다른 임원들의 투서가 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