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이 기습적으로 연평도를 포격했던 지난해 11월23일. 한국 공군의 F-15K, KF-16 전폭기 편대는 북한군 포대에 대한 정밀타격 준비를 마치고 서해 주변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폭격명령은 떨어지지 않았고, 전폭기 편대는 싣고 갔던 폭탄과 미사일을 그대로 매단 채 기지로 귀환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써먹지도 못하는데 1억 달러짜리 F-15K는 뭐하러 샀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연평도 사건 이후 이스라엘 신드롬 시작
이튿날 아침 홍사덕 의원은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작심한 듯 ‘독한 말’을 쏟아냈다. 홍 의원은 “북한의 포격 직후 대통령으로 하여금 ‘확전하지 말고 상황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도록 한 청와대와 정부 내 X자식들에 대해 한 말씀을 드리겠다”며 포문을 열었다.
홍 의원은 “바로 이 자들이 천안함 폭침 사건 직후에는 ‘북한과 관련이 없는 것 같다’고 흘려보낸 것과 똑같은 사람일 것”이라며 “대통령이 시간이 지나서 본연의 모습으로 몇 배 보복을 하도록 (지시)했지만 이참에 처음에 오도하도록 했던 참모들을 청소해야 한다. 그래야 똑같은 상황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의 예를 들었다. 홍 의원은 “매년 국지전이 있고, 2002년에는 이스라엘군이 400여 명 전사했지만 텔아비브 (증권)시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며 “단연코 대응하는 이스라엘 모습을 투자자들이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신드롬’의 시작이었다.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중동의 고슴도치’ 이스라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에 번번이 얻어맞기만 하는 한국 정부가 못마땅하고 미덥지 못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관심의 바탕에는 동질감이 깔려 있다. 두 나라 모두 수난의 역사에서 벗어나 현대사에서 경제 기적을 일궈냈다. 경제 수준도 엇비슷하고 유대인과 한국인은 머리 좋기로 유명한 민족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상시적으로 전쟁 위험에 노출돼 있는 ‘준전시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공통점은 전쟁 위협에 대처하는 두 나라의 차이점을 더욱 극명하게 만든다.
맞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다르다. 안보에서만큼은 초보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만큼의 차이가 있다.
얼마 전 사석에서 한 외국계 투자은행 관계자는 두 개의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질문. “작년 11월23일 만약 F-15K가 북한군 포대를 폭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물론 북한 포 진지는 파괴됐을 겁니다. 그런데 한국경제는 어떻게 됐을까요? 주가와 환율이 지금과 같았을까요?”
두 번째 질문. “만약 이스라엘이 연평도 포격과 같은 공격을 받았다고 가정해봅시다. 이스라엘이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반격하지 못했다면 이스라엘 금융시장은 어떻게 됐을까요?”
이 외국계 투자은행 관계자는 “연평도 포격 당시 한국 국민들은 한국 정부와 군의 유약한 대응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외국인 투자자 입장은 약간 달랐다”며 “국지전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가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전면전 위험은 없다는 확신을 줬다”고 말했다. 북한이 때려도 꾹 참는 패턴을 한국 정부가 유지했기 때문에 경제에 충격이 없었다는 해석이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정반대다. 이 관계자는 “이스라엘 정부가 보복에 실패했다면 이스라엘 금융시장은 박살이 났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때리면 더 세게 받아치는 것이 건국 이후 이스라엘이 걸어왔던 일관된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엇비슷하지만 극명한 차이 내포
아닌 게 아니라 이스라엘은 전쟁에 내성이 붙은 나라다. 지난 2008년 12월27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로켓 공격을 근절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군은 작전명 ‘캐스트 레드’에 돌입했다.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 60대의 기습 폭격으로 시작된 이 대규모 군사작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일주일 내내 가자지구를 공습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3일에는 전차부대를 앞세운 지상군 병력을 투입, 하마스 무장세력의 소탕전을 시작했다. 같은 달 18일 자정을 기해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할 때까지 22일 동안 치열한 국지전이 치러졌다.
그러나 이런 전쟁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금융시장은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다. 블루칩 모임인 이스라엘 TA25 주가지수는 캐스트 레드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635에서 횡보를 거듭하다 오히려 올랐다. 이듬해 1월7일쯤에는 695로 60포인트 상승했다. 환율은 셰켈당 3.862달러에서 강세로 돌아서 1월7일 3.878달러로 마감했다.
물론 이스라엘이라고 경제와 안보가 완전히 분리돼 있는 것은 아니다. 안보상황에 따라 경제가 흔들리기도 한다.
지난 2004년 3월22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강력한 보복을 경고했다.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마흐마드 야신이 이스라엘 헬리콥터가 발사한 미사일에 피살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날 이스라엘의 TA100지수는 전 주말보다 11.54포인트(1.97%) 급락한 573.68로 마감했고, TA25지수는 1.8% 하락했다. 뉴욕 증시에서 거래되는 이스라엘 기업들의 주가도 이날 일제히 하락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테러와 전쟁 위협 등으로 경제 부문이 충격을 받더라도 일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파장도 그다지 크지 않다. 사실 한국도 북한 리스크에 관한 한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줘 왔다. 표피적으로는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연평도가 불타오르고 그 이튿날인 지난해 11월24일 새벽. 장이 열리기도 전에 국제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는 ‘북한의 공격이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한국 정부도 립서비스를 보탰다. 이날 코스피는 전날보다 2.96포인트, 원화값은 달러당 4.8원이 내린 채 장을 마감했다. 전 세계에서 한국시장이 가장 평온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런 현상을 두고 시장에서는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지정학적 위험에 상당한 내성이 생긴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북한 핵실험, 연평해전 등 과거의 경험에서 학습효과가 생겨났다는 논리다. 북한이 말썽을 피울 때마다 한국 금융시장이 금새 안정을 되찾아 왔던 것이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졌다는 의미다. 특히 유사한 사례가 반복되면서 충격이 지속되는 시기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요리조리 뜯어보면 우리나라와는 여러 모로 사정이 판이하다. 꼼꼼히 들여다보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국제 금융가에서도 이스라엘에 비해 한국 컨트리 리스크를 더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등급을 기준으로 할 때 똑같은 A등급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1988년 BBB- 등급을 받은 이후 경제성장을 통해 등급을 꾸준히 올려온 반면 한국은 여전히 외환위기 이전 등급(AA-)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국지전, 북한 핵, 통일비용 등이 포함된 지정학적 위험 때문이다.
이스라엘 경제성장 원동력은 강력한 전쟁억지력
해당 국가의 불안 정도를 지표로 보여주는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전쟁 위험 때문에 이스라엘의 CDS프리미엄이 훨씬 높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의 CDS프리미엄은 그동안 이스라엘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은 경우가 많았다. 한국 정부가 외국에 발행하는 외화표시채권이 부도날 경우를 대비해서 내는 보험료가 이스라엘보다 비쌌다는 얘기다.
지난해 상반기부터는 글로벌 금융위기 후 급속한 경기회복에 힘입어 한국의 CDS프리미엄이 이스라엘보다 근소하게나마 낮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을 거치면서 또 다시 이스라엘과 비슷한 수준으로 높아지는 추세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경계감이 은연중에 커졌다는 얘기기도 하다.
한국과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차이는 안보에 들이는 노력과 비용이다.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이스라엘은 막대한 물적·인적자원을 쏟아부어 감내할 수 있는 안보 리스크의 범위를 넓혀놓은 나라다. 상시적인 전쟁 위험에도 이스라엘 경제가 안정적인 가장 큰 이유로는 강력한 안보정책이 꼽힌다.
이스라엘 금융시장이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해 있고, 세계 경제의 중심축 중 하나인 유대자본이 이스라엘 경제를 지원사격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더라도 이스라엘의 높은 전쟁억지력은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다.
이스라엘은 이를 위해 유·무형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국방비만 해도 그렇다. 지난달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월드팩트북 집계 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군비지출(7.3%)은 한국(2.7%)의 3배가 넘는다.
사회가 짊어진 부담도 한국보다 훨씬 크다. 한국의 군복무 기간이 남성에 한해 21개월이지만 이스라엘은 남성이 36개월, 여성이 21개월 복무한다.
주요 국가정책은 안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스라엘에선 농업, 무역 등의 국가정책도 안보정책의 하위 범주 내에 귀속돼 있다. 일례로 자본거래 및 무역 자유화 기조를 유지하는 것과 별개로 농업과 군수산업만큼은 자립화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의지다. 농민에 대한 보호를 이유로 보호주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정부와 달리 이스라엘 정부는 식량안보를 위해 시장 개방을 신중히 생각한다. 군수산업에 대한 해외투자도 금지돼 있다.
이런 이스라엘에 비해 한국은 안보의식에서나 안보 시스템에서 훨씬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게다가 안보와 관련된 가이드라인도 매우 모호하다. 북한과의 군사적 마찰마다 대응 수준이 제각각인 근본 이유다. 교전수칙이 존재하지만 적용에 일관성이 결여돼 있다.
1981년부터 12년 동안 이스라엘에 거주했던 박호균 단 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숱한 국지전에도 이스라엘 경제는 잘만 돌아간다’는 한국인들의 1차원적인 평가에 코웃음을 친다. 이스라엘이 경제를 지키기 위해 평소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것이다. 박 대표는 “이스라엘은 군대가 확장된 사회”라며 “레스토랑 아르바이트가 총을 들고 근무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6년 레바논전쟁 당시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현지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은 공장을 멈추지 않았다”며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스라엘 정부의 전쟁 리스크 관리 능력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시간·비용을 들여서라도 시스템 변화 필요
한국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상시적인 국지전에 대비할 수 있도록 국가적인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한국 경제가 숙명처럼 떠안고 있던 ‘북한 리스크’ ‘안보 리스크’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까진 북한이 때려도 남한이 ‘꾹’ 참는 패턴이 이어져왔지만 앞으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하지만 언젠가 북한이 또다시 군사 도발을 해온다면 강력한 반격이 불가피한 정치·사회적인 여건이 조성됐다.
현오석 KDI(한국개발연구원) 원장은 “북한이 수시로 국지전 규모의 도발을 해온다고 가정한다면 이제는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한국의)시스템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