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검찰의 대기업 수사의 강도가 세지면서 재계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 한화그룹, 태광그룹, C&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지켜보는 대기업들의 눈과 귀는 다음 타깃이 과연 어디냐에 쏠려 있다.대기업들은 검찰의 칼끝이 다음에는 어디를 겨눌지에 대한 정보를입수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다. 대관업무도 한층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 수사와 관련한 검찰의 관련자소환이 G20 정상회의 이후로 미뤄진 것이 대기업들 입장에서는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검찰의 입장이 워낙 강경하고 냉정해 관련 대기업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특히 검찰이 해외 공조를 강화해 대기업들의 해외 비자금 의혹까지 밝혀내겠다고 한 소문이 돌면서 대기업들의 가슴앓이는 한층 깊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기업들은 회사 기밀에 접근해 있었던 임원급 퇴직자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한화그룹과 태광그룹 사건을 비롯해 대기업 비리와 관련한 사건들이 대부분 퇴직자들의 폭로나 제보에서 비롯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화•태광 등 불만 퇴직자 제보로 치명타
태광그룹의 경우 박윤배 서울인베스트먼트 대표의 제보로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 대표는 2002~2005년 태광그룹 자문위원으로 그룹의 구조조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그룹 내 기밀과 오너 일가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박 대표의 제보로 그룹은 물론 이호진 회장의 자택까지 압수수색당하며 태광그룹의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다.
박 대표는 스스로 “이 회장에게 잘린 게 섭섭해 태광그룹의 비리를조사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바꿔 말하면, 이 회장은 물론 그룹차원에서 박 대표를 ‘섭섭’지 않게 했다면, 하다못해 박 대표를 내보내고서라도 ‘섭섭’지 않게 대우했다면 지금과 같은 파문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얘기다.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은 한화그룹 역시 한화증권 퇴직자의 제보가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퇴직자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퇴직자의 폭로나 제보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표적인 사례는2007년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의 비자금 조성, 불법 로비, 경영권 편법 승계를 폭로한 사건이다. 삼성그룹의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 변호사의 폭로로 삼성그룹은 구조조정본부가 해체되고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을 내놓는 등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이례적으로 ‘삼성 특검팀’까지 꾸려진 바 있다.
2006년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비자금 사건, 올 초부터 있었던 제약사들에 대한 공정위와 국세청 조사 등도 모두 퇴직자들의 폭로와 제보에 따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시민단체에는 지금도 대기업과 관련한 제보가 잇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퇴직자들의 폭로와 제보를 모두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임원급들의 제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적어도 임원급의 말이라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기업들은 특히 임원급 퇴직자들을 관리하는 데 적잖은 비용을 들인다. 각 그룹별로 인사팀에서 일종의 ‘퇴직자 관리 프로그램’을 직•간접적으로 마련해 퇴직자들을 관리•지원하고도있다. 삼성그룹은 그룹 차원에서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없다.계열사 규모가 워낙 크고 많기 때문이다. 대신 계열사별로 나름대로 퇴직 임원들을 지원하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계열사마다별도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며 “그룹 차원에서 정해진 프로그램이나 제도를 운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삼성은 계열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개 사장급에는 퇴직후 임기 5년 정도의 상근 고문•자문역을 맡긴다. 사무실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비서와 전용차량, 학자금까지 지원한다. 또 부사장급은 5년, 전무급은 3년, 상무급은 1년의 고문•자문역을 맡긴다. 재임 중 개별 역량과 출신 계열사에 따라 임기와 임금에 차이가있으며 상근•비상근도 나뉜다. 임금의 경우 재임 시보다 적게는10%, 많게는 50%까지 삭감, 지급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퇴직 임원에 관해서는 관련 모임인 성우회를지원하고는 있지만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성우회란삼성그룹 퇴직 임원들의 모임이다. 사무실은 서울 논현동에 있으며 삼성 측에서 마련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 퇴직 임원들은 성우회 외에도 계열사별로 ‘전자사랑모임’(전자), ‘삼석회’(석유화학), ‘거제회’(중공업) 등의 모임을 갖고 있다. 이들 모임을 통해 퇴직 임원과 회사 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전무 이상 퇴직 임원은 1~2년간 자문역에 위촉한다. 임금은 퇴임 당시 연봉의 50% 이상 지급한다. 상무이하 임원에게는 퇴직위로금과 일정 기간 동안 퇴직 당시 연봉을제공한다. 또 협력업체에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해 퇴직 임원을 대상으로 일자리를 알선해주기도 한다. 또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퇴직 임원 모임인 자우회, 기우회 등에 운영경비를 지원한다.SK그룹은 퇴직 임원에 대해 상무급까지 ‘전관예우’를 하고 있다.상무급 이상부터 퇴직 후 1~3년 정도 고문•자문으로 위촉하며 사무실과 비서, 전용차량을 제공한다. 퇴직 임원은 고문으로 재직하는 기간 동안 대략 퇴직 직전 연봉의 80%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SK그룹 관계자는 “딱히 내규로 규정한 것은 아니고 통상 그 정도로 보면 된다”며 “에너지와 텔레콤 등에는 별도의 커뮤니티가 있어 사무실 등을 지원한다”고 말했다. 별도의 커뮤니티란 SK에너지의 ‘유경회’, SK텔레콤의 ‘상우회’를 말한다.
고문•자문역 위촉… 퇴직 임원 모임에도 지원
‘인화’를 강조하는 LG그룹은 사장급 이상 임원의 경우 퇴직하자마자 바로 임기 1~2년의 상근 고문직으로 위촉하고 사무실, 비서, 전용차량을 지원한다. 고문직을 마치면 또 다시 임기 2년의 자문역을 맡긴다. 사장급 이상 임원이라면 퇴직 후에도 4년 정도는 자리가 보장되는 셈이다. 부사장급 이하 임원들은 상근 고문직 없이 퇴 직 후 바로 비상근 자문역을 수행한다. 임금은 현직 때의 70% 수준이다.
그룹 차원에서 퇴직 임원 모임인 ‘LG크럽’의 사무실과 운영비, 비서 정도를 지원한다. LG크럽은 서울 서초동에 위치해 있다.계열사 중에서는 LG전자가 아웃 플레이스먼트(Out Placement)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퇴직 임원들을 위한 것으로서 퇴직하는 임원이 희망할 경우 전직 알선 또는 창업 컨설팅전문기관에 의뢰해 창업을 지원하는 제도다. 비용은 물론 회사에서 부담한다. 퇴직에 따른 충격을 완화시키고 새로운 인생 설계를지원함으로써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2002년 마련했다. 6개월 과정으로 정리 단계, 탐색 단계, 새 출발 단계, 3단계 프로세스로 진행된다.
포스코는 퇴직 임원에게 보통 1년 정도 비상임 고문직을 맡긴다.임금은 현직 때의 70% 정도를 지급하며 사무실이라든지 비서, 차량 등은 제공하지 않는다. 포스코 관계자는 “회장직을 수행한 분에게만 별도 사무실을 제공할 뿐”이라고 말했다. 포스코의 퇴직 임원 모임은 ‘중우회’다. 포스코 관계자는 “중우회에 별도로 지원하는 것은 없다”며 “다만 한 달에 한 번씩 모일 때마다 식사 정도 대접한다”고 말했다. 포스코는 퇴직 예정자들을 대상으로 GLD(GreenLife Design)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2001년부터 시작한 1년 과정의 GLS(Green Life Service) 프로그램을 개선한 것으로서 지난해 4분기부터 운영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사장급 이상 퇴직 임원에게는 고문역을, 부사장급 이하퇴직 임원에게는 자문역을 맡긴다. 임기는 대개 1~2년이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역할에 따라 비서와 차량을 차등 지원하며 임금도 현직임금의 일정 비율을 지급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퇴직 임원들의 별도 모임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일반 대기업과 달리 공기업들의 경우는 퇴직 임원들을 전폭적으로밀어주고 있다. 때때로 도가 지나쳐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으며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공기업들은 퇴직 임원들이 차린 하청업체에 일 몰아주기, 운영권 낙찰시켜주기, 보험계약 지원해주기 등의 방법으로 퇴직 임원들을 챙겨왔다.이렇듯 대기업들은 대부분 ‘전관예우’를 충실히 하고 있다. 대기업들이 퇴직 임원들을 대우해주고 관리하는 까닭은 임원이 되기까지회사에 기여한 공에 대한 보답 차원이다. 대기업에서 임원이 되는것은 모든 샐러리맨의 꿈이다. 그만큼 힘들고 오너가 아닌 이상 오를 수 있는 최고 위치다. 임원으로 퇴직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회사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회사는 그동안의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다.
“임원들의 역량 다른 곳에서 활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
2007년 7월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는 비자금 조성 및 로비에 대해 폭로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다. 깊이 들여다보면 더 큰 이유가 있다. 임원까지 오르면서 회사에서 키운 역량과 노하우를 다른 기업으로 이직해 활용하지 못하게끔 하는 데 있는 것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대기업 임원 출신이라면 어디든 욕심내지 않을 수 없다”며 “임원 출신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다른 곳에서 활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도 내포돼 있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임원이라면 회사의 기밀에 근접해 있다. 회사 내부의 기밀과 조직의 특성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임원들을 퇴직했다고 해서 섭섭하게 대한다면 그들을 통해 회사 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 한마디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인 셈이다.
퇴직 임원들을 일정 기간 대우해도 삼성, 현대차, 한화, 태광 등과 같은 경우가 발생하는 마당에 퇴직 임원들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다면 더 큰 화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퇴직 임원들을 대우함으로써 대기업들은 기업 이미지 제고에도 도움이 된다. 한평생 몸담은 직장에서 퇴직 후에도 사회적 위신을 세울 수 있게끔 대우해준다면 재직 중인 직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회사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하지만 대기업들의 ‘전관예우’가 일괄적인 것이 아니라 지위와 역할에 따라 차등을 두고 있다는 점, 그나마 대상이 임원급에 한정돼있다는 점이 문제다. 개인의 느낌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을 표출하고 불만을 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최근에는 임원들만 회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임원이 아닌 직원들도 작심만 하면 회사 기밀을 알아낼 수 있다. 특히 회사 내부의 문서나 소문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접근, 습득이 가능하다. 퇴직할 때 회사의 정보나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고객 정보를 빼오는 것은 요즘엔 일도 아니다. 자그마한 USB 하나만 있어도 쉽게 빼내올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미국 보안업체 시만텍과 정보관리 연구기업 포네먼 인스티튜트가 퇴직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59%가 퇴직 시 회사 정보를 빼내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61%는 전 고용주에 대해 악감정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회사 정보를 빼내왔다고 답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정보를 빼내오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의 경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퇴직자들이 정보를 유출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 얼마 전 발생했던 MBC 정보의 삼성 유출을 들 수 있다. MBC에서 퇴직한 한 삼성 직원이 MBC 재직 직원과 공모해 MBC의 내부 정보를 빼낸 것이다. 보도국 기자들이 취재한 정보가 고스란히 유출돼 더욱 경악케 했다. 언론사는 고급 정보가 오가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직원·정보 관리가 그렇게 허술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불만 있는 퇴직자들이 회사 기밀·정보 유출
이 정도만 해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핵심·독자기술이 유출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실제로 회사의 핵심·독자기술이 유출된 사례의 과반수가 퇴직자들에 의해서였다는 것이 조사 결과 나타났다. 이들은 대부분 인사에 따른 불만과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데 앙심을 품은 퇴직자들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때로 회사 정보를 유출하겠다며 금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며 “대부분 말도 안 되는 허위 정보”라고 귀띔했다.
그렇다고 전 직원을 모두 관리하기는 벅차다. 인력과 비용 면에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전 직원에게 퇴직 후 혜택을 줄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런 탓에 회사에 불만을 품고 퇴직한 직원들을 통해 회사의 기밀이 유출되거나 기업 이미지가 훼손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물론 퇴직한 모든 직원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극히 일부 퇴직 직원에서 비롯되는 일이지만 그 충격과 파문은 어마어마하다. 특히 삼성 사건의 김용철 변호사라든지, 태광 사건의 박윤배 대표처럼 그룹 구조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의 폭로와 제보는 그룹에 치명타가 된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언제까지 전관예우를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회사 내에서 분위기를 그르치는 사람들을 폭로나 제보가 두려워 가만히 놔둘 수도 없다. 쫓아내다시피 해서 내보낸 사람을 계속 달래는 것도 우스운 꼴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사내에서도 꾸준히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교육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며 “그 외에는 퇴직자들의 소양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회사 내의 보안을 강화하고 회사 기밀과 정보는 필수 인원만 관리할 수 있도록 하며 그 인원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아예 사고를 없앨 수는 없어도 최대한 줄일 수는 있다.
물론 회사와 오너 일가의 주변이 투명하고 깨끗하다면 걱정할 필요 없다. 직원들과 소통을 강화하고 투명경영을 실천한다면 퇴직 임원들에 대한 ‘전관예우’는 말 그대로 그동안 회사에 기여한 공로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진행하면 된다. 우리나라 일부 대기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직도 밀실경영과 총수 마음대로 인사권을 전횡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마찰이 전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직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구멍가게도 아니고 이렇게 큰 조직에서 어떻게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그 마찰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