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며 최근 가파른 성장을 멈추고 캐즘(Chasm·일시적 수요정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기차 및 배터리 기업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관련 종합대책을 내놓고 논란 확산을 막기 위한 총력전에 들어갔다.
전기차 안전이슈는 지난 8월 1일 인천광역시 서구 청라동 청라국제도시의 한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 사고로부터 본격적으로 부각됐다. 화재 8시간 만에 진화에 성공했지만 5개 동 480세대가 화재 피해를 입었고 140여 대의 차량이 화재로 인해 망가졌다. 해당 차량에 장착된 배터리는 중국의 중소 배터리 제조사 파라시스 제품으로 배터리 결함이 화재가 발생한 이유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난 9월 20일 국립과학수사 연구원은 외부 충격에 따른 차량 배터리셀 손상으로 불이 났을 개연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국과수는 “차량 밑면의외부 충격으로 배터리팩 내부의 셀이 손상되며 ‘절연 파괴’(절연체가 특성을 잃는 현상)로 이어져 발화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다만 국과수는 “배터리관리장치(BMS)는 화재 당시 저장 회로가 견딜 수 없는 심한 연소로 파손이 심해 데이터 추출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해당 사고는 그간 전기차에 품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상당수 사람들이 전기차에 대한 안전 우려를 표명하며 전기차를 피하는 전기차포비아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실제 많은 신차 구매 희망자들이 전기차 구입을 망설이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공공기관과 건물에선 전기차 입차를 거부하는 사태로 인한 갈등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신속하게 전기차 안전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불안감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다.
오히려 조급한 대책들의 실효성 논란이 커지며 혼란을 부추겼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시는 지난 8월 충전율 90% 초과 전기차의 지하주차장 출입제한 대책을 내놓아 논란을 키웠다. 서울시는 당초 90% 이하까지만 충전이 가능하도록 설정한 전기차에 ‘공식 인증서’를 발급하고, 이 인증서를 부착한 전기차에 한해 지하주차장 출입을 허용하도록 한 ‘90% 충전율 인증제’를 준비했다. 하지만 일각에서 현실성을 따지지 않은 탁상공론이란 지적이 이어졌고 실제 해당 정책은 사실상 폐기됐다.
실제 전기차 제조사와 전기차 사용자들은 배터리 충전량과 화재 발생 간 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며 100% 완충해도 안전한 운행이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현대차·기아는 설명자료를 통해 다른 가전제품의 배터리와 마찬가지로 전기차용 배터리는 100% 충전해도 충분한 안전범위 내에서 관리되도록 설계돼 있다고 밝혔다. 만에 하나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배터리 두뇌’ 역할을 담당하는 첨단 BMS(배터리관리시스템)가 이를 차단하고 제어한다고 밝혔다. 더욱이 배터리 충전량에 의해 배터리 내부의 물리적 단락이나 쇼트 발생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자동차 업계서도 충전량을 제한하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배터리 제조 결함이 없도록 배터리 셀 제조사와 함께 철저하게 품질관리를 하고 배터리관리시스템(BMS)를 통해 사전 오류를 진단해 더 큰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 9월 6일 발표한 종합대책에서 ‘충전율 제한’과 관련한 조치는 모두 제외했다. 행안부는 최근 열린 전국 지자체 회의에서 각 대책 사이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공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와 더불어 전기차 배터리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내년 2월 도입 예정인 ‘전기차 배터리 인증제’를 오는 10월로 앞당겨 시행키로 했다. 또 전기차 배터리 정보 공개를 의무화하고, 전기차 제작사와 충전사업자의 책임보험 가입을 확대한다. 아울러 전기차 무상점검을 매년 실시하고 배터리관리시스템(BMS)과 충전 시스템 개선은 물론 지하주차장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도 대폭 확충한다.
배터리 인증제는 전기차를 제작할 때 정부가 배터리 안전성을 사전에 인증하는 제도다.
대국민 배터리 정보공개도 추진한다. 배터리 제조사와 제작기술 등 주요 정보까지 의무적으로 공개할 계획이다. 현재 공개항목은 배터리 용량, 정격전압, 최고 출력인데 여기에 셀 제조사와 형태, 주요 원료 등을 추가한다.
정부는 또 전기차 정기검사 시 배터리 검사항목을 대폭 늘릴 예정이다. 지금까지 배터리를 검사할땐 고전압 절연만 해왔다. 여기에 셀 전압, 배터리 온도·충전·열화 상태, 누적 충·방전 등이 추가된다. 한국교통안전공단 검사소는 물론 민간검사소까지 전기차 배터리진단기 등 검사 인프라를 확충할 방침이다.
배터리 사업자의 책임도 강화한다. 전기차 제작사와 충전사업자의 책임보험 가입을 확대해 전기차 화재로 인한 소비자 피해보호를 강화하는 게 핵심이다.
내년부턴 제조물 책임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자동차 제작사에 대해서는 전기차 보조금 지급을 제외하고, 제조물 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정부는 올해 안에 BMS의 배터리 위험도 표준을 마련한다. 1단계(주의)에선 정비 필요, 2단계(경고)는 제작자 긴급출동, 3단계(위험)는 소방 출동 등의 방식이다. 내년 상반기부턴 자동차 소유주가 정보제공에 동의한 차량을 대상으로 위험단계인 경우에는 자동으로 소방당국에도 알리는 시범사업도 추진한다.
정부는 지하주차장 화재 발생 시 신속한 스프링클러 등의 작동이 확산 방지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다수의 전문가 의견 등을 감안해 관련 장비 개선·확충에도 나선다. 이를 통해 안전 사각지대를 최대한 줄여 나갈 계획이다. 앞으로 모든 신축 건물의 지하주차장에는 화재 발생 시 감지·작동이 빠른 ‘습식 스프링클러’를 설치된다. 다만 동파 우려가 있는 건물에는 성능이 개선된 ‘준비작동식 스프링클러’ 설치도 가능하다.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은 “내년부터 BMS 센서 다변화, 알고리즘 정확도 향상, 화재 전 가스배출 감지 및 냉각기술 개발 등을 추진해 BMS의 화재진단·제어 성능 고도화를 추진한다”며 “전기차 충전시설 위치 변경방안은 화재 진압 여건 등을 고려한 관계부처 합동 연구와 전문가 의견수렴 등을 거쳐 추가로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기차 안전성 문제가 부각되며 충전시설 안전성에 대한 관심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정부는 충전량을 제어해 BMS와 함께 이중 안전장치 역할을 하는 스마트 제어 충전기 보급을 늘려 화재예방을 강화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이미 설치된 완속충전기도 사용연한, 주변 소방시설 등을 고려해 스마트 제어 충전기로 순차적으로 교체한다. 내년엔 2만기, 2026년엔 3만 2000기, 2027년 이후엔 27만 9000기로 늘어날 전망이다. 아울러 이미 스마트 제어 기능이 탑재된 급속 충전기는 공동주택과 상업시설 등의 생활거점별로 보급을 늘려 충전기의 안전성은 물론 전기차 소유주의 충전 편의를 높인다. 올해는 3100기, 2025년엔 4400기 도입이 목표다.
현재 전기차 충전기 10대 중 1대는 지하 3층 이하에 설치돼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 7월 말 기준 지하에 설치된 급속·완속 전기차 충전기는 총 20만 1935기로 전체(37만 3961기)의 약 54%에 달한다. 이 중 10.1%(3만 6884기)가 지하 3층 이하에 설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충전기 10대 중 1대는 지하 2층보다 더 아래에 설치돼 있는 셈이다.
급속충전기는 전체(4만3392기)의 2.4%(1059기)가 지하 3층 이하에 설치됐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1만 5241기·24.5%)과 경기(1만93기·37.1%), 부산(3018기·0.8%) 등에서 지하 3층 이하 충전기 설치 비율이 높았다.
최근 인천 청라동 지하주차장 전기차 화재로 ‘지하 3층’까지만 제한해둔 이 규정을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안전 문제가 부각되며 지하충전기를 지상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하지만 정부는 현행 규정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9월 4일 밝혔다. 지하 3층부터 주차장이 시작되는 건물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정부는 지하에 설치된 전기차 충전시설의 지상 이전 방안에 대해서는 중장기 과제로 검토할 방침이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