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전기차 시장을 향한 글로벌 각축전이 뜨거워지고 있다. 한중일 삼국지 대전에 기존 글로벌 자동차 강자들도 속속 뛰어들며 시장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동남아 전기차 시장에 사실상 전 세계 자동차 브랜드들이 뛰어드는 것은 지역이 그만큼 매력이 있다는 뜻이다. 실제 아세안 공급 측면에서 안정적인 전기차 생산망 형성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고, 수요 측면에서도 구매력 있는 인구가 계속 느는 등 새로운 모빌리티에 우호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
류양웨이 폭스콘 회장이 지난해 10월 열린 폭스콘 기술의 날 행사 ‘테크놀로지 데이’에서 처음 공개한 전기차 모델C 프로토타입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현대차가 불붙인 동남아 전기차 거점 확보 전쟁
동남아를 전기차 생산 전진기지로 삼아 공격적인 행보를 먼저 보이고 있는 곳이 현대차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 아래 전기차 생산공장을 지었고, 올 3월부터 현지에서 아이오닉5를 생산하고 있다. 다른 경쟁 업체에 비해 빠른 행보다.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올해 6월까지 현지에서 판매된 전기차 총 505대 중 454대가 아이오닉5였다. 무려 90%가 넘는 점유율이다. 인도네시아 브카시에 들어선 현대차 공장은 15억5000만달러가 투자됐다. 전기차를 포함해 올해 말까지 15만 대, 향후 연간 25만 대를 양산할 계획이다.
현대차는 현지 생태계 조성에도 적극적이다. 인니 아다로그룹과 전기차 외장 핵심 소재인 알루미늄 제련공장 설립 프로젝트 참여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현대차의 행보에 기존 인도네시아 자동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 업체들도 본격 반격에 나서고 있다. 도요타는 7월 인도네시아 정부 측과 만나 2027년까지 전기차 분야에 18억달러를 새롭게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도요타는 2019년 이후 인도네시아에 1250억달러를 투자했는데, 이를 훌쩍 뛰어넘는 투자를 인니 정부에 약속한 것이다. 현지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의 전기차 행보에 일본 업체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도요타 측은 이번 투자와 관련해 “인도네시아 내에서 전기차 개발에 더 주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담에서 도요타의 전기차가 의전용으로 쓰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일본 업체인 미쓰비시 자동차도 2022~2025년 4년간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하이브리드 차와 전기차 배터리 등의 생산을 위해 90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2021년 11월 인도네시아 자동차 모터쇼에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미쓰비시의 전기차 MiEV를 직접 운전하는 모습이 잡혀 눈길을 끌기도 했다. 미쓰비시는 2024년 새 전기차 모델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 현대자동차 인도네시아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아이오닉5에 서명하고 있다.
중국은 인도네시아의 이같은 한일 대전에서 한발 물러서 있는 상태. 하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국가인 태국 공략에 적극적이다. 중국 업체 중에 태국 내 GM 조립 공장을 인수한 만리장성자동차(Great Wall Motros)가 발걸음이 빠르다. 만리장성자동차는 시장 선점을 위해 신차 가격을 인하하는 등 공격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회사는 2024년 현지 전기차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만리장성자동차의 이 같은 행보에도 불구하고 현재 태국 시장에서 많이 팔리는 전기차는 중국 상하이자동차 제품이다. 10대 중 8~9대가 상하이자동차 전기차다. 상하이자동차가 내년 전기차 생산을 목표로 현재 태국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하지만 만리장성자동차도 이에 뒤질세라 태국 관광청과 손잡고 에코관광 활성화와 관련한 파트너십을 추진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자사 전기차 홍보에 나서고 있다.
중국의 전기차 브랜드인 BYD는 현지 자동차 업체인 레버 오토모티브와 손을 잡고 8월에 공식 판매점을 오픈했다. BYD 역시 5년 내 눈에 띌 만한 성적을 내보이겠다는 태국 시장 공략에 자신하고 있다. 아이폰을 만드는 대만의 폭스콘(Foxconn)도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회사는 태국 최대 국영 에너지 기업 PTT와 합작회사(Horizon Plus)를 설립해 현지에서 전기차 생산에 나선다. 목표는 2024년으로, 현재 동부경제회랑(EEC)에 15만 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한 상태다. 2024년 5만 대 생산을 시작으로 2030년까지 15만 대의 전기차를 양산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대만 폭스콘의 태국 현지 전기차 생산 움직임은 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 애플의 전기차 ‘애플카’의 생산이 본격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다. 호라이즌 플러스 측은 “모든 자동차 브랜드의 개발 중인 전기차의 프로토타입 생산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완성차 독일 메르세데스 벤츠는 이미 태국에서 전기차를 생산 중이다. 벤츠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이용해 만든 첫 번째 전기차 EQS를 태국 공장에서 올 2월부터 생산하고 있다. 벤츠는 2019년부터 태국에서 배터리 공장을 지었다. 벤츠의 경쟁자인 BMW도 태국에서 전기차 생산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지 업계에서는 BMW의 태국 현지 전기차 생산도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볼보는 말레이시아를 거점으로 삼는 분위기다. 자사 첫 순수 전기차 모델인 XC40을 말레이시아의 현지 공장에서 반제품 조립 형태로 생산하고 있다. 볼보는 여기서 생산된 차량을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서 판매를 위해 수출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XC40 전기차를 시작으로 2030년 전기차 전 라인의 글로벌화를 볼보는 계획하고 있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 CEO 간담회 2022’에 참석해서
일본 기업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역내 경제 역동성이 가장 뜨거운 베트남에서는 현지 전기차 업체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빈그룹이 설립한 베트남 최초이자 유일한 자동차 회사인 빈패스트가 전기차를 생산하고 있는데, 꽤 반응이 좋다. 올 연말 내연기관차 생산을 중단하고 전기차만 전량 생산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 시장에도 진출한 상태다. 베트남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빈그룹은 자국 전기차의 독자적 생태계를 만드는 데 적극적인데, 자회사인 전기차 배터리 제조기업인 VinES(빈이에스)가 우리 SK그룹의 이차전지 분리막 생산기업인 SKIET와 최근 손을 잡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빈이에스는 베트남 최초의 자동차용 리튬이온 배터리 제조공장이다.
▶생산에 유리한 환경, 중산층 증가는 탄탄한 수요층
전기차 시대를 맞아 동남아에서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의 춘추전국시대가 벌어지는 것은 그만큼 시장성이 크다는 의미다. 전기차란 시대의 트렌드 상품이 동남아에서 먼저 범용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글로벌 차 업체들이 보고 있다는 의미인데, 여기에는 역동적인 역내 경제 성장 흐름 속에 젊은 중산층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이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싱가포르계 투자은행인 UOB의 조사에 따르면 2030년 지역 내 중산층은 전체 인구의 65%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이 중 35세 이하가 60%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또 최근 새로운 소비 세대의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Z세대의 성장세도 눈여겨볼 만하다. 하쿠호도 생활종합연구소의 아세안 지사(Hakuhodo Institute of Life and Living Asean) 분석에 따르면 아세안 전체 인구 중 Z세대의 비중은 24%나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5세 이하의 M세대들과 이들이 향후 아세안의 경제 성장을 이끌 축이 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세대의 특징은 트렌드에 민감하고 트렌드를 이끄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내연기관에서 전기로 진화하는 첨단 모빌리티들에도 거부감 없이 다가가고 있다. 이들의 소비 여력도 아세안 경제의 지속적 성장에 점점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아세안에서 전기차 생산에 나서고 있는 자동차 메이커들의 마케팅 타깃도 이들 세대들에 자연스레 맞춰지고 있다. 실제 인도네시아를 아세안 생산거점으로 삼은 현대차를 보면, 상당 부분이 MZ 친화적이다. 현대차가 6월 자카르타에서 선보인 현대차 모터스튜디오 세나얀파크가 대표적으로, 이에 대해 현지 언론은 “인도네시아의 MZ들에게 다가가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고 전했다.
여기에 더해 아세안에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의 주원료가 되는 광물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는 것도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아세안으로 몰려드는 또 다른 이유다. 인도네시아가 대표적으로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니켈의 주산지다. 세계 최대의 니켈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차가 인도네시아를 아세안 생산거점으로 삼은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안정적인 전기차 생산 공급망을 확보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차에 맞서 도요타 등 일본 업체들이 뒤늦게나마 인도네시아 공략에 나선 것도 배터리 주재료의 안정적 확보라는 의미도 깔려 있는 셈이다.
이 같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움직임에 동남아 국가들도 바빠지고 있다. 미중 갈등 속에 새로운 경제 영토로 각광받는 아세안이 글로벌 모빌리티 생태계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이 가져다주는 기회를 활용해 국가 도약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인도네시아에서 현대차가 전기차 공장을 짓고 생산을 본격화하고 있는 것은 뼈아픈 대목이다. 내연기관 시대 태국은 아세안 내 최대 차량 생산국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 유명 자동차 업체들이 대부분 생산기지를 뒀다. 인근 국가들로 수출하는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올 2월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가 발표한 ‘2021년 세계 주요 자동차 생산국 현황’ 조사에 따르면 태국 내 차량 생산은 세계 10위였다.
하지만 전기차 시대로 접어들며 아세안 내 태국의 압도적인 자동차 생산 지위가 조금씩 흔들리는 분위기다. 태국뿐만 아니라 아세안 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전기차 투자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이 주된 이유다. 그 자리를 현대차가 파고들었고, 역내 전기차 시장의 주도권은 인도네시아로 넘어가버렸다. 여기에 인접국이자 역내 경쟁국인 베트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체 생산 전기차를 앞세워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자카르타에서 40㎞ 떨어진 브카시 델타마스 공단 내 현대자동차 공장 차체동에 설치된 로봇 400여 대가 용접 등을 통해 차체를 조립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물론 전기차 시대의 본격 도래까지는 긴 시간이 남아 당장 의미 있는 역내 자동차 생산 시장의 판도 변화가 목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역내 긴장감은 팽배해 있다. 지키려는 쪽, 도전하려는 쪽 모두에게서 느껴진다. 이에 각국은 경쟁적으로 전기차 생산과 관련한 인센티브를 내세우며 관련 산업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태국은 2030년까지 자동차 생산의 30%를 전기 자동차로 대체하겠다는 목표로 세금 부담을 낮춰주는 등 과감한 세제 혜택 정책을 실시 중이다. 전기차 보조금 정책도 펴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2050년 전기차만 판매하겠다는 목표 속에 사치세 면제, 전기차의 차량 홀짝제 면제 등의 정책을 펴고 있다. 역내 전기차 흐름에서 뒤처진 필리핀은 올 5월에야 전기차 부문 활성화를 위한 법안을 발효했다. 세금혜택, 전기차 생산 비용 보조 등의 내용이 담겼다. 말레이시아는 전기차 정책과 관련해 뚜렷한 모멘텀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전기차 구매 시에도 인센티브 정책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