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전문가인 김두규 우석대 교수의 눈길이 갑자기 날카롭게 바뀌었다. 청와대 터의 용맥(龍脈)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기(氣)가 여기서 응축된 후 출발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치 용이 좌우로 움직이면서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만일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내려가면 죽은 용으로 보지만 이처럼 굽이치면서 내려가는 모양의 (용)맥은 그 기운이 살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두규 교수가 가리키는 산등성이를 따라 쫓으니 그 끝에는 대통령 집무실의 처마자락이 보였다.
경복궁 위에서 드론으로 찍은 청와대 일대 전경. 북악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사진 연합뉴스>
74년 만에 문을 활짝 연 청와대를 향한 국민적 관심이 뜨겁다. 역대 대통령이 살았던 금단의 땅이 열리자 이 나라 최고 통치자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행렬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개방 이전 북악산 바로 아래에 있는 청와대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리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냥 대부분이 ‘카더라’로 내부가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완전 개방 이전에도 사전 신청을 통해 청와대 경내를 둘러볼 수 있지만 이 또한 제한된 공간만 허락됐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개방된 덕에 청와대의 속살이 완전히 드러나게 됐다.
공개된 청와대는 거대한 정원을 연상케 할 정도로 조경이 잘돼 있었다. 최고 통치자가 머무는 공간은 국가를 대표하는 곳이기도 해 그동안 꽤 많은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청와대 본관을 비롯해, 관저·상춘재·영빈관·오운정·녹지원·미남불 등 볼거리도 꽤 많다.
하지만 청와대에 대한 높은 관심 중 하나가 ‘대한민국의 명당’ 때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청와대 관람 시 풍수적 관점도 반드시 챙겨봐야 할 포인트다.
청와대 터가 예로부터 명당이라는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천하제일복지’라는 문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현재의 본관 집무실이 공사를 진행할 때 북악산 기슭 암벽에서 발견됐다. 그 기원을 알 수 없지만 이 천하제일복지란 언급은 청와대 풍수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대중에 공개된 적이 없는 청와대 터는 언제나 미지의 땅이었다. 천하제일복지로 알려졌지만 역대 대통령들의 말로가 좋지 않아 이곳 땅의 기운이 쇠했다거나, 애초부터 명당으로 보기에 부족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견해는 심심찮게 있어왔다. 청와대 터를 둘러싼 풍수 논쟁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그곳을 제대로 들여다 본 이들이 없는 상태에서는 서로의 주장만 있을 뿐이다.
이에 매경럭스멘은 청와대 개방을 계기로 이곳의 풍수적 특징들을 들여다봤다. 이를 위해 국내 풍수 학자 중 손꼽히는 김두규 교수와 동행해 청와대 곳곳을 누볐다. 김 교수는 “(자신도) 그동안 접근할 방법이 없어서 현장 답사 없이 옛 문헌을 통해서만 연구하고 분석했다”면서 “눈으로 확인하니 이 터의 장단점이 고스란히 보인다. 이제는 더 확실한 근거를 통해서 청와대 터에 대해서 논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수궁터: 조선시대 경복궁 신무문 밖 수문사 기능의 군사건물이 있던 곳. 왕궁을 지키는 기능을 담당했다. 청와대 구 본관 터이기도 하다. 천하제일복지란 표지비석이 있다.
▶1000년 전부터 위정자들이 관심을 가져온 청와대 터
명당 청와대 터에 대한 관심은 약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때부터 이곳은 위정자의 관심을 끌었다. 개경을 수도로 두고 있던 고려는 문종 22년(1068년) 현 서울 일대를 남경으로 삼고, 지금의 청와대 지역 인근에 이궁(별궁)을 세웠다. 이후 남경은 한 차례 폐지됐다가 숙종 때 다시 설치됐고, 이궁 또한 증축됐다. 여말에는 남경으로 천도까지 이뤄졌다. 고려 왕실이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남경 수도는 ‘찰나’에 그치는 듯했지만, 조선이 새 왕조의 거점으로 남경 일대를 정하면서 남경은 명실공히 국가의 중심 무대가 됐다. 하지만 새 왕조의 궁궐터는 이궁이 있던 일대가 되지 못했다. 한 왕조를 상징하는 건축물들을 담기에는 터가 좁은 탓이었다. 그래서 조선 왕실은 남쪽으로 내려가 기틀을 잡았고 그곳이 바로 현재의 경복궁 자리다. 남경 일대는 경복궁의 후원이 됐다.
그러다 후일 이궁 일대 또한 결국 국가 통치자의 집무실이 있는 공간이 됐는데, 출발은 우리 역사의 불행한 시절인 일제 강점기였다. 일제가 지은 총독관저가 이궁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인근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부터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기 직전까지 국가 최고 통치자들은 이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청와대란 이름은 윤보선 대통령 때 갖게 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무대였다.
이런 청와대에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그동안 최고 권력자, 대통령만 드나들 수 있었던 정문은 경복궁 신무문 맞은편에 있는 곳뿐이다. 정문에 들어서면 북악산 바로 아래 자리 잡은 본관이 맞이한다.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던 곳이다. 건물의 웅장함과 함께 15만여 개의 청기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통령 관저: 대통령과 가족의 거주공간. 본채와 별채로 구성됐다.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다.
본관 앞에 서면 뒤편의 북악산과 왼쪽에 자리 잡은 인왕산이 청와대 일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모양새를 풍긴다. 본관을 등지고 서면 대정원과 함께 경복궁, 광화문대로가 한눈에 펼쳐진다. 현재의 본관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91년 새로 지은 것으로, 북악산과 경복궁 사이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당시 새로 지을 본관의 입지를 정할 때 경복궁과의 관계를 고려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청와대의 풍수 지형을 엿보기 위해서 일행은 경내 외곽에 해당되는 성곽로로 이동했다. 성곽로는 관저에서 이동할 수 있다.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을 올라가면 서울의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르는 도중 ‘남경’이 왜 명당인지 풍수 문외한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서울이란 공간의 배치가 참으로 절묘했다. 주산(현무)인 북악산을 배경으로, 백호(인왕산)과 청룡(낙산)이 좌우에 있고, 안산(주작) 격인 남산과 명당수 청계천 등 명당의 조건들이 잘 구비됐다.
김 교수는 “옛 문헌을 보면 수도 서울의 지형을 연꽃에 비유하곤 하는데 여기서 보니 그 뜻을 알겠다”고 했다. 서울 외곽의 산 능선이 마치 완만하게 이어지는 모습을 연꽃에 비유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9세기) 때 조성된 불상이다. 석굴암 본존상을 계승한 양식으로, 당시 불상 조각의 높은 수준을 알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잘생긴 부처, 미남불로 불린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
그렇게 성곽로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던 중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한 능선을 마주하자, 김 교수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주위를 확인하는 눈길도 덩달아 분주했다. 그 능선은 청와대 경내 평지로 뻗어 내려가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김 교수는 “저곳이 청와대 터의 중출맥(용맥의 중심)에 해당되는 곳 같다”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니나 다를까 능선의 끝자락은 청와대 본관 뒤편으로 이어져 있었다. 김 교수는 “명당의 조건 중 하나가 주산에서 내려오는 기(氣)가 모여서 흐르는 이 같은 맥이 있어야 하는데, 와서 보니 이곳의 기세가 참 대단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 그에 따르면 현 청와대 본관의 위치는 중출맥의 기세가 응축된 진혈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맥에 해당된다는 것. 천하제일복지라는 청와대 터여서 방맥도 기운이 좋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진혈자리에 놓인 것만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와대 풍수의 핵심은 어디일까. 김 교수는 “현 수궁터, 청와대 구본관이 있던 자리가 중출맥의 기세가 온전히 전해진 진혈 자리에 해당된다”면서 “주산(북안산)에서 내려온 내룡이 내려앉은 곳”이라고 했다. 현재 이곳에는 천하제일복지라는 표지비석이 있고, 야트막한 동산이 조성돼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식수도 있다.
녹지원: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다. 120여 종의 나무와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다.
▶‘청와대 흉지설’ 근거는 약해
이쯤 되자 청와대 통치자의 불운과 풍수의 상관관계가 궁금했다. 본관이 명당의 본거지에서 비껴있어서 이곳에 머물렀던 통치자의 끝이 좋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청와대 곳곳에 있는 ‘바위’ 지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북악산은 바위가 많은 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청와대 터의 불운한 기운을 이야기할 때 종종 거론되는 대목이다.
김 교수는 “바위가 많으면 아무래도 사람이 살기 불편하지 않겠냐”면서 “풍수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특히 “집무실이 있는 본관, 거처인 관저 뒤편의 암석들이 눈에 띈다”면서 “무시할 수도 있는 것들이지만 풍수 기운적으로는 그렇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개인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저의 위치도 청와대 터의 진혈 자리가 아닌 방맥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는 점도 아쉽다고 봤다. 김 교수는 “기록을 보면 청와대 경내에 소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바위산이 가지는 지형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풍수적 조치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청와대 일대의 풍수 단점으로 명당수인 청계천의 물이 많지 않다는 것과 청와대 뒤편 자하문 쪽의 지대가 낮다는 점도 종종 거론된다. 기운이 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또 서울 전체의 풍수 지형을 놓고 봤을 때 안산인 남산이 화기가 강한 관악산을 막아서지 않고 있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라는 지적이다. 화기가 강한 지형은 화재가 많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청와대 본관 앞 계단 양쪽으로 드무(청동으로 된 물 그릇)가 2개 놓여 있다.
영빈관: 외국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빈 방문 시 공연과 만찬 등의 공식 행사가 주로 열리던 곳이다.
사실 청와대를 포함한 경복궁 일대가 왕조의 터전으로 맞지 않다는 주장은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다. 조선 세종 때부터 이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는데, 당시 풍수관리 최양선, 청주 목사 이진 등이 ‘흉지설’을 주장했다. 이들 주장의 요지는 “현무인 북악산이 웅장하고 빼어나지만 감싸주지 않고 고개를 돌린 모양이며 주작인 남산은 낮고 평평하고 약하며, 청룡인 낙산은 등을 돌리고 있으며, 백호인 인왕산은 높고 뻣뻣하고 험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이는 풍수의 핵심을 간과한 분석이라는 평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풍수에서 땅을 보는 기본은 용혈위주사수차지(龍穴爲主砂水次之), 즉 용(삼각산에서 청와대로 이어지는 산줄기)과 혈(청와대와 경복궁 터)을 먼저 살피고 그 다음에 사(북안산, 인왕산, 낙산, 남산)와 물길(청계천) 순서로 중요도를 둬 살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용(龍)과 혈(穴)을 따지지 않고 사(砂)만 따져서 내린 결론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김 교수는 “시중의 풍수사들도 이와 같다”면서 “청와대 일대는 길지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자신했다. 그는 “청와대에 들어서면서 받은 첫 느낌이 ‘포근함’인데, 이는 좋은 땅의 기본 조건”이라면서 “청와대 터를 완전한 길지라고 보기도 어렵겠지만, 1000년 동안 각 시대마다 한 국가의 근간으로 삼으려 했던 점만 봐도 흉지설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했다.
오운정: 경복궁 후원에 있던 오운각의 이름을 딴 것으로 5색 구름이 드리운 풍광이 마치 신선이 노는 곳과 같다는 의미다.
지기가 쇠했다는 주장과 관련해선, 김 교수는 “땅이 기운을 잃었다면 이렇게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꾸준히 청와대 터의 바위 지형의 단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생각보다 청와대 경내에 흙으로 이뤄진 지형들이 많이 있다”면서 “와서 보니 중출맥을 따라 내려오는 곳은 대부분 흙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이는 굽이쳐 내려오는 용맥이 걸림돌(바위) 없이 순탄하게 내려왔다는 의미”라고 했다.
김 교수는 “걷기만 해도 좋은 기운을 주는 것이 명당의 힘이기도 하다”면서 “와서 건물만 보지 말고 청와대 곳곳을 거닐고, 풍수적 핵심지도 돌아보면서 좋은 기운을 많이 받았으면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