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전라도 고창 무장면 옆 동네 야산을 사들여 농장을 시작했다. 이 동네 옛 지명이 한새골. 백로, 왜가리 등 한새가 서식한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 아들은 그게 어머니 이름자 ‘학’과 같아 학이 노는 정원이란 뜻으로 학원농장이라 했다.
여기에 보리를 심었다. 작년 가을에 파종한 보리가 이제 며칠만 지나면 누렇게 익는다. 그때가 오기까지 보리는 청춘이다. 그래서 ‘청보리’. 보리가 바람에 춤을 춘다. 도미노로 누웠다가 도미노로 일어선다. 누우면 옅어지고 일어서면 진해지는 녹색의 변주. 그 추운 겨울 견뎌내며 봄을 기다린 보리의 인내. 보리는 봄의 향연을 위해 겨울의 성장을 유보했다.
전라도 함평 만석꾼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스물한 살 나이에 고창 진씨 집안 며느리가 됐다.
똑똑한 남편 만난 죗값을 치른다고 갖은 고생 다 했다.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는 남편 선거 뒷바라지 10년. 거푸 세 번을 떨어졌다. 그러나 그 후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니 그런대로 보상받은 삶이라 자위했다. 어디 남편뿐만이랴. 자식 5남매를 낳아 하나는 어린 나이에 잃고 딸 둘 금이야 옥이야 키우고 아들 둘 남부끄럽지 않게 가르쳤다.
‘나는 없는 듯이 살겠다’며 참고 견뎌낸 세월, 그래도 타고난 재주는 숨길 수 없어 틈틈이 먹을 갈아 글을 쓰고 한 땀 한 땀 비단실로 수를 놓았다. 그녀에게 서예와 자수는 인내였다. 이름 그대로 학(鶴)처럼 살아온 그녀, 보리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