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술시장은 어느 때보다 뜨겁다. MZ세대가 중요한 컬렉터로 가세한 이후 아트페어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그림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경매업체 역시 높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젊은 세대의 미술시장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부동산 규제와 주식시장 정체로 갈 곳을 잃은 유동자금이 미술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무엇보다 최근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이건희 컬렉션’ 영향력도 상당하다. 지난해 10월 타개한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 미술품 중 상당수가 기부를 통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되면서 미술시장 전반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이건희 컬렉션, 시대를 망라한 명작들 다수
이건희 회장의 유족 측이 기증한 문화재와 미술품은 무려 2만3000여 점이다. 방대한 규모의 기증이 이뤄져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수장고가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는 이들을 수용할 수장고나 별도 미술관 신설 등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신설되는 미술관의 형태는 아직까지 정해진 바가 없다는 것이 정부 측 설명이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4월 28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건희 컬렉션’을 위한 별도의 미술관 계획에 대한 질문에 “예측하기 어렵지만 수장고가 부족해 미술관과 수장고 건립은 검토할 수밖에 없다”며 “근현대 미술관 형태로 할지, 기증자 컬렉션으로 할지는 즉답하기 어렵지만 고인의 훌륭한 뜻이 한국을 찾는 관광객과 많은 사람에게 공감되고 향유되도록 만드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답했다.
이건희 컬렉션은 규모 외에 개별 작품 면면의 가치도 가늠하기 어렵다. 가장 많은 작품을 기증받게 된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를 살펴보자. 총 9797건(2만1600여 점)을 기증받게 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 제216호), 현존하는 고려 유일의 <고려천수관음보살도(千手觀音菩薩圖)>(보물 제2015호), 단원 김홍도의 마지막 그림인 <김홍도필 추성부도(秋聲賦圖)>(보물 제1393호) 등 국가지정문화재 60건(국보 14건, 보물 46건)이 포함됐다. 특히 <인왕제색도>의 경우 겸재가 76세의 나이에 인왕산의 실제 그림을 보고 그린 것으로 현재 조선화단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이 밖에도 통일신라 인화문토기,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 도자류와 서화, 전적, 불교미술, 금속공예, 석조물 등 한국 고고·미술사를 망라한 작품들이 포함됐다.국립중앙박물관은 1946년 개관 이래 이번 기증품을 포함해 현재까지 총 43만여 점의 문화재를 수집했다. 이 가운데 5만여 점이 기증품으로 이번 2만 점 이상 기증은 이전까지 기증된 문화재의 약 43%에 이른다.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품 약 1226건(1400여 점)을 기증받는다. 김환기, 나혜석, 박수근 등 한국 대표 근대미술품 460여 점과 모네, 고갱, 르누아르, 피사로, 샤갈, 달리 등 세계적 거장들의 대표작이 포함됐다.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장욱진의 <소녀> <나룻배> 및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호안 미로의 <구성>,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등 회화작품이 많다. 또한 판화와 소묘, 공예, 조각 등 다양하게 구성돼 근현대미술사를 망라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 이래 이번 기증품을 포함해 현재까지 총 1만 200여 점의 작품을 수집해 왔다. 이 중 5400여 점이 기증품이며, 이번 1400여 점의 기증은 역대 최대 규모다. 이 밖에도 지방 미술관들은 앞다퉈 이건희 컬렉션 ‘유치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미술계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 규모를 감정가 기준 1조∼2조원 상당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이러한 수치는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정확한 규모는 가늠하기 어렵다. 일례로 지난 5월 12일(현지시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클로드 모네(1840~1926)의 <수련>이 798억원(약7040만달러)에 낙찰됐다. 모네의 <수련>은 최근 삼성가(家)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의 모네 그림과 크기와 구도가 같고, 제작 시기도 유사해 경매 전부터 주목받아왔다.
경매 전 이 그림은 약 4000만달러(약 450억원)에 팔릴 것으로 예상됐으나 그 두 배 가까운 금액에 새 주인을 만난 셈이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품인 <수련>의 몸값 역시 비슷하게 추정할 수 있다면 개별 작품의 예상 감정가와 실제 낙찰가의 괴리감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천수관음보살도>
▶리움·호암미술관 운영하는 삼성문화재단
개인 소장 이건희 컬렉션 존재이유는?
‘이건희 컬렉션’이 이처럼 통 크게 국가에 기부되자 한편에서는 그 배경에 대해 여러 추측이 나온다. 삼성문화재단은 리움과 호암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이건희 컬렉션을 삼성문화재단의 이름으로 구매해 보유하고 있었다면 애초부터 상속세 문제에서 자유로웠을 것이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왜 이건희 회장은 그 많은 미술품을 개인 명의로 소유했던 것일까?
먼저 재단의 기금은 한계가 있다. 800억원에 팔린 모네의 그림은 수치상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미술품 구입에 쓰이는 한 해 예산(48억원) 17년 치를 쏟아 부어야 겨우 살 수 있는 작품이다. 명화 한 점에 쉽게 1000억원이 넘는 서양 근현대미술품을 재단의 재력으로는 1년에 한 점도 구입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건희 컬렉션’이란 존재하지도 않았던 작명이 탄생한 비화는 이러한 재단 재정의 한계라는 환경이 크다.
사회환원으로 가닥을 잡은 유족은 이건희 컬렉션의 상당수를 국가기관뿐만 아니라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리움과 호암미술관 등으로도 출연할 전망이다. 이러한 연유로 일각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의 존재이유로 ‘절세’를 지목하기도 한다. 공익법인에 출연하는 재산의 가액은 상속세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재계 관계자는 “유명 작가의 고액 미술품이나 사재 등을 공익재단·법인에 출연할 경우 상속세 대상에서 제외된다”며 “이건희 회장의 유지를 살리면서 일부 상속세 절세 효과도 누리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일견타당해 보이지만 절세를 위해서는 판매 후 상속세 납부가 더욱 유리하다. 기증을 통한 세금 경감보다 포기하는 현금이 더 많다는 의미이다. 3조원가량으로 평가된 미술품을 해외 경매를 통해 매각하면 상속세 최대치인 50% 세율이 적용되어 1조5000억원을 납부할 경우 매각제반비용을 빼고서도 1조원을 현금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고 이건희 회장의 유족들은 상속세 6년 분할납부 제도인 연부연납을 택해도 연간 2조원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 상황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를 위해 신용대출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적인 자산가가 물려받은 미술품을 팔지 않고 기증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미술품의 거래가 활발하지 않은 탓에 판매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당장 세금을 낼 여윳돈이 없는 경우 혹은 창작자의 유족이 고인의 작품을 한데 모아놓으려 하는 경우다. 둘 다 삼성가 유족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또한 공익재단으로의 출연(기증)은 사유 미술품 공익화를 의미한다. 쉽게 이야기해 리움에 기증된 미술품은 매매가 불가능하고, 작품을 팔아 현금화할 수도 없다. 국내법에서는 공익 법인이 해산할 경우에도 모든 자산을 국고로 귀속한다. 리움을 삼성 소유로 오해할 수 있지만 이미 리움은 ‘개인의 손’을 떠난 공익 기관이라는 의미다.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미술품 물납제 논의 가속화
국익에 도움 vs 가치평가 어려워
이건희 컬렉션의 등장으로 국내에서는 물납제 도입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미술품 물납제는 현물로 세금을 대납하게 허용하는 제도다. 이러한 제도도입에 대한 논의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비롯된다. 국내 고가 미술품은 주로 해외로 팔려간다. 국내 미술시장이 워낙 작은 탓에 구매자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에서 본다면 상속인들의 그림 판매는 문화 자산의 해외 반출로 이어진다. 물납제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래서 상속자의 기증 의사에 기댈 게 아니라, 미술품으로 세금을 대납할 수 있게 해 판매의 유인을 줄이자고 말한다. 지난해 11월 말 이광재 의원이 관련 내용을 담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미술품 물납제는 이처럼 은닉되어 있는 미술품을 밖으로 나오게 하고 해외로 나갈 미술품을 나라 안에 붙들어둘 수 있다. 미술계는 미술품 애호가이자 ‘큰손’이던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을 유족들이 상속세 마련을 위해 해외로 매각하면 귀중한 자산이 유출되는 것이라며 그간 상속세 물납제 허용을 요구해왔다.
한국화랑협회는 지난 3월 대국민 건의문을 발표하며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을 포함한 전체 국가지정문화재 4900여 건의 50% 이상을 개인이 소유하고 있으며, 시·도지정 문화재 9300건 중에서도 개인소유가 상당하리라 추정된다”면서 “귀중한 문화재나 뛰어난 작품 중 상당수가 재산상속과정에서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급히 처분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라며 물납제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 지난해 5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보물 2점을 경매에 내놓은 일이 있었다. 재단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간송의 장남인 전성우 전 재단 이사장 별세로 상속세 등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잘못 알려지면서 물납제가 화제를 모았다. 실제로 전성우 씨의 아들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이 납부할 문화재 관련 상속세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보물 매각이 상속세 납부 목적은 아니었지만 문화재 물납제가 공론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중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기
물납제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국익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 주장한다. 김희근 한국 메세나협회 회장은 취임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부동산은 공시지가로 세금 물납이 되는데 미술품은 안될 이유가 없고 세금 납부를 위해 작품이 해외로 반출되면 그것대로 뭇매를 맞게 될 것”이라며 “(미술품) 물납이 돼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 시기와 법, 기술적인 문제가 남는다”고 말한 바 있다.
미술업계는 실제 이건희 컬렉션을 상당부분 품을 것으로 보이는 리움이 단숨에 세계 10대 사립미술관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뉴욕의 모마(MoMA)나 휘트니미술관, 미국·스페인·이탈리아 등지에 자리 잡은 구겐하임미술관, LA의 명소 게티미술관 등 개인의 수집품에 기반해 설립된 사립미술관이 지금은 관광 필수코스가 된 사례처럼 경쟁력을 갖춘 관광지로 발돋움할 것이란 청사진이다. 물납제가 도입될 경우 이러한 물납을 통해 국내 미술관의 경쟁력을 높여 관광산업에 이바지 할 것이란 주장이다.
다만 좋은 취지에도 애로사항이 있다. 미술품·문화재는 가치를 객관적으로 산정하기 어려워 감정평가액에 대한 논란이 있고 위작으로 판별될 위험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납제를 제대로 운영·관리하지 못하면 국고 손실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그동안 물납제를 축소하거나 엄격히 적용해 왔다. 부수적으로 탈세와 조세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도 도사리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에 대해 “미술품 등 물납제도는 ‘가치 평가’ 등이 어려워 세수손실 가능성이 있다”면서 “물납제도 도입을 신중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살바도르 달리 <켄타우로스 가족>
▶양도세 혜택에 몰리는 아트테크
작품 보는 안목 갖추고 장기투자 필수
취득세와 보유세 부담이 있는 부동산과 달리, 예술품 거래의 경우 양도 때만 세금이 부과된다. 이러한 연유로 미술품의 절세효과에 관심을 두고 아트테크에 나서는 투자자들이 늘어났다. 이건희 컬렉션의 후광효과에 미술품 투자에 나서는 젊은 세대들도 많이 늘어났다. 미술품은 양도가액이 6000만원 이상이어야 양도세가 부과되고, 만약 살아있는 국내 원작자의 작품이면 세금을 내지 않는다.
또한 2021년 소득세법 개정안에 따르면 ‘계속적·반복적 거래의 경우’에도 기타소득으로 구분돼 미술품을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더 유리해졌다. 미술품을 팔아 번 소득이 ‘사업소득’이냐 ‘기타소득’이냐에 따라 적용되는 세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업소득으로 분리될 경우 종합소득에 대한 소득세율을 적용받게 돼 2021년 1월 1일부터는 아래 최고 49.5%(지방소득세 포함)인 세율을 적용받는다. 그러나 미술품 판매를 통한 수익이 기타소득으로 분류되어 양도가액 6000만원 이상인 작품에 대해 80% 필요경비를 인정받아(10년 이상 보유하거나, 양도가액이 1억원 이하인 경우 90%) 22%(지방소득세 포함)의 세율을 적용받게 됐다.
1억원 이하의 미술품이거나 10년 이상 장기보유할 경우 90%까지 경비를 인정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미술품 취득가액이 1억원, 양도가액이 1억5000만원이면 소득세는 660만원이다. 양도차익(5000만원)의 13% 수준이다. 이 사람의 그림 보유 기간이 10년 이상이라면 세금은 330만원으로 떨어진다. 필요경비율이 90%로 높아지기 때문이다.살아 있는 국내 작가의 작품은 가격과 상관없이 비과세 혜택을 받는다. 잠재력 있는 신진 작가를 보는 안목이 있는 경우 장기보유해 수익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
다만 미술품은 취득세와 보유세가 없어 ‘세테크’ 수단으로 각광받지만 기본적으로 장기 투자 상품이다. 수십 년이 지나도 가격이 오르지 않고 오히려 폭락하는 작품도 있다. 특히 2007년 호황기에 비싸게 팔렸던 젊은 팝아트 작가들 작품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급락해 아직까지 회복을 못한 경우도 많거니와 거래도 드물다. 미술업계 한 관계자는 “미술품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단기적인 투기관점에서 달려들 경우 실패할 확률이 크다”라며 “그림을 보는 안목을 갖추고 장기보유할 수 있는 여윳돈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