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자인 에스테르 뒤플로,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두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가 공동으로 지난 2012년 펴낸 책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의 1장 제목이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이 두 사람 외에 마이클 크레이머 하버드대 교수에게도 공동 수여됐다. 이들은 20년 넘게 세계 빈곤 문제에 천착해 왔고 그동안 낸 성과를 인정받아 상을 수상하게 됐다. 이를 감안할 때 올해 노벨경제학상의 키워드는 ‘빈곤’이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왼쪽부터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MIT 교수, 에스테르 뒤플로 MIT 교수, 마이클 크레이머 하버드대 교수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가 이 세 사람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수여한 이유로 밝힌 것도 “이들의 글로벌 빈곤 연구에 대한 작업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켰다”는 것이었다. 올해 노벨위원회가 노벨경제학상 분야에서 ‘빈곤’에 방점을 둔 것도 이례적이지만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수상자들의 연구 업적이다.
그동안 노벨경제학상은 ‘경제 모델이나 예측 등 이론적 연구나 분석’에 탁월한 성과를 낸 이들에게 돌아갔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빈곤 퇴치에 대한 해법을 이론으로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험을 통해 확립코자 했다. 노벨위원회는 이들의 업적과 관련해 “(세계 빈곤 문제에 대한)실험적 접근은 빈곤과 싸우는 우리의 능력을 향상시켰다”면서 “불과 20년 만에, 그들의 새로운 실험 기반 접근법은 개발 경제를 완전히 변화시켰는데, 이는 현재 번성하는 연구 분야가 됐다”고 강조했다.
뒤플로 교수와 바네르지 교수가 그의 책 1장 제목인 ‘가난을 해결할 합리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서 사용한 방법은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연구법이었다. 둘은 세계 각국의 빈곤 현장에서 무작위 대조실험 연구란 방법을 통해 빈곤의 원인과 해법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40여 개국의 빈곤 현장을 누볐다.
▶빈곤층이 더 합리적, 경제적 동기 부여가 지원 효과 높여
뒤플로 교수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이 결정된 후 “가난한 사람들은 캐리커처로 희화화 대상이 되는 게 다반사고 그들을 도우려는 이들조차 빈곤층 문제의 뿌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내 연구가 시작됐다”며 “실험적 접근을 채택한 것은 우리 목표인 빈곤 퇴치가 과학적 근거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찾은 해법은 실용주의적 접근법이다. 이들은 책에서 “현실적으로 (빈곤 문제 해결에 있어) 유익한 방안은 해외원조라는 일반적인 해답 대신, 모든 문제에는 저마다 고유의 해답이 있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고 썼다. 즉 무조건 도와주기보다는 문제를 좀 더 구체화해서 실질적인 도움을 찾아보자는 것이 빈곤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란 뜻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 생각,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면 빈곤 해결도 없다”며 “그들이 비합리적이고 게으르며 무능력하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빈곤층은 오히려 가진 것이 적기 때문에 뭔가를 선택할 때 훨씬 더 신중하고 합리적이게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현장에서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통해 실험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인도 라자스탄에서 실시한 예방접종과 콩 실험이다.
뒤플로와 바네르지 교수가 이 지역을 찾았을 때 어린이 100명 중 단 2명만 필수 예방접종을 받고 있었다. 정부와 원조기구가 예방접종의 효과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무료로 예방접종을 놔준다고 해도 접종률이 형편없이 낮은 이유에 대해 궁금했다. 지역 NGO 활동가들, 현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 지역에는 ‘아이가 한 살 전에 밖에 나가면 악마의 눈길을 받아 죽는다’는 뿌리 깊은 미신이 있고, 이 미신에 대한 주민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서는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뒤플로와 바네르지는 객관적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파악하기 위해 무작위로 마을을 선정한 뒤 세 개 그룹으로 나누고 실험에 나섰다. 첫 번째 그룹에는 변화를 주지 않았고 두 번째 그룹에서는 간호사들이 예방접종을 독려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에서는 아이들에게 예방접종을 시킬 경우 부모에게 콩 2파운드를 주고 필수 예방접종 다섯 가지를 모두 받으면 스테인리스 쟁반세트를 줬다. 6개월 뒤 접종률을 확인한 결과, 콩과 쟁반을 나눠준 그룹에서는 38퍼센트의 접종 완료율을 보였고, 간호사들이 접종을 유도한 그룹에서는 17퍼센트, 아무 변화도 주지 않은 그룹에서는 6퍼센트의 접종 완료율을 기록했다.
두 사람은 이 실험을 통해 작은 ‘경제적 동기 여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장 행동해야 할 이유를 부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접종을 받으러 오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 접종 후 아이의 상태를 살피는 정성 등 부모가 입을 당장의 손실을 콩 2파운드가 보상했던 것이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글로벌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선진국의 후진국 원조가 왜 실질적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는가에 대한 답으로 이어졌다. 당시 학계는 “원조의 효율성을 평가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발굴했다”는 평을 내놓았고 이것이 노벨경제학상 수상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뒤플로와 바네르지는 연구를 통해 “빈곤층 지원정책이 실패하는 이유는 세부적인 정책 설계 과정의 실수와 사회 곳곳에 만연한 타성, 부패에서 비롯됐다”면서 “주민 참여 공무원의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 묻기 등을 통해 개선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단, 앞서 언급된 가진 것이 적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빈곤층이 실질적으로 선택할 만한 정책이 수반돼야 한다. 콩 2파운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적절한 인센티브가 필요한 이유다.
둘은 책에서 이렇게 썼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충격을 완화할 전략을 선택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보험에 보조금을 지원하면 이들의 소득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가나의 경우 저렴한 보험에 가입한 농민은 그렇지 않은 농민보다 농작물에 비료를 사용하는 비율이 높았고 그 결과 소득이 늘어났다. 또한 이들은 끼니를 거르는 비율이 낮았다.” 무분별한 퍼붓기식 원조와는 결이 다른 지원책이다.
마이클 크레이머 하버드대 교수 역시 1990년대 중반 아프리카 케냐에서 현장 실험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당시 케냐에서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교과서를 많이 지급한다고 해서 학생들의 역량이 커지지 않고, 자원의 부족이 배움에 있어 역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또 학교 결석률의 원인을 현지 만연한 기생충에게 있다는 것을 파악해, 교육관련 프로그램에 구충제 보급을 넣기도 했다. 크레이머 교수는 2003년에 뒤플로 교수와 함께 개발도상국 지원 프로그램 효과를 평가하는 방법을 연구한 보고서를 발표했던 인연이 있다.
바네르지·뒤플로 교수 부부가 인도에서 빈곤 연구를 할 당시 모습.
▶노벨경제학상 수상 3인 중 단연 주인공은 뒤플로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빈곤 연구’란 화제성과, 기존 수상의 주류를 이뤘던 이론 연구자들이 아닌 이들에게 돌아가는 등 여러 면에서 과거와는 다른 차별적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주인공은 단연 에스테르 뒤플로 매사추세츠공대 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공동 수상자인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매사추세츠공대 교수는 뒤플로 교수의 남편이다. 즉 두 사람은 부부 사이다. 마이클 크레이머 하버드대 교수의 이력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플로 교수가 더 주목을 받는 것은 역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가운데 최연소이자 두 번째 여성 수상자라는 점이다.
노벨위원회에 따르면 1972년 10월생인 뒤플로는 아직 올해 생일이 지나지 않아 만 46세로 역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리다. 특히 그가 받은 분야가 노벨상 중 여성에게 가장 인색한 분야다. 여성 최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는 경제 지배구조 연구로 2009년 올리버 윌리엄슨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 교수와 공동 수상한 엘리노 오스토롬 인디애나대학 교수다.
뒤플로 교수의 학자로서의 재능은 20대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와 경제학을 공부한 후 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29세에 MIT 종신교수로 임명될 정도로 학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30대 후반인 2010년에는 ‘예비 노벨경제학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하며 노벨상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코노미스트 선정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경제학자 8인, 포춘지 선정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경제학자 8인, 포린폴러시 선정 세계의 지성 100인 등에도 선정됐다.
뒤플로 교수는 수상 후 이뤄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수상이) 전 세계 빈곤퇴치 연구를 본격화하는 물꼬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들 세 명은 글로벌 빈곤을 연구하는 수백 명의 연구자들을 대표한다”면서 “우리 사회에서 덜 부유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더 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뒤플로 교수는 이어 개도국 극빈층에 적용됐던 실험적 기법이 부유한 국가에서 힘겹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경제발전도 개도국 빈곤퇴치를 위한 좋은 연구 사례로 꼽아 눈길을 끌었다. 그는 “다만 국가별로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여성으로서 역대 두 번째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것과 관련, 전통적으로 남성 지배적인 분야에서 여성을 위해 “매우 중요하고 적절한 때에 (수상이) 이뤄졌다”고도 했다.
뒤플로 교수는 앞서 수상자 발표 현장과 연결된 전화에서 “여성이 성공할 수 있고 성공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여성이 자기 일을 계속하고, 남성들도 여성이 인간으로서 응당 받아야 할 존중을 나타낼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뒤플로 교수는 이번 수상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선 “라듐 발견으로 여성으로서 처음 노벨상을 수상한 마리 퀴리가 상금으로 라듐을 샀다는 내용을 어릴 적 책에서 읽었다”면서 “공동 수상자들과 얘기해 ‘우리의 라듐’이 무엇인지 생각해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편인 바네르지 교수와는 사제지간이다. 그의 지도로 MIT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바네르지는 인도 골카타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 원조의 효과를 실증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인포시스 과학재단이 수여하는 인포시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학문의 세계에 발을 디딘 후 빈곤의 실상과 공공정책의 역할이란 화두를 놓치지 않고 있다.
뒤플로 등 수상자 3명은 상금 900만크로나(약 10억8000만원)와 함께 노벨상 메달과 증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