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0일(현지시간) 미국 서부 쿠퍼티노에 위치한 애플 본사 건물. 캘리포니아의 날씨가 늘 그렇듯 구름은 한 점 없었고, 공기는 건조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사이다 같은 청량함을 전해 줬다. 우주선을 닮았다는 애플의 본사 건물은 필자의 집에서 차량으로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평상시 애플은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기 때문에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예외였다. 애플이 아이폰11을 비롯한 제품과 서비스들을 출시하는 행사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벤트는 작고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건립된 극장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매우 붐빌 것이란 예상 때문에 차를 가지고 가지 않으려 했으나, 애플이 얼마나 선진적 운영시스템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차량으로 애플의 방문객센터 주차장에 향했다. 예상 외로 주차장에는 차량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도 했고 주차 시스템은 매우 편리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모델처럼 화려하게 꾸며 입지 않은, 자연스러운 복장의 동네 청년 같은 이들이 안내를 하고 있었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웃음들을 띠고 있었다. 마을잔치에 온 것처럼 주최 측과 참가자가 구분되지 않은 채, 모두가 함께 즐기고 있다는 느낌. 좋은 첫인상을 안고 스티브 잡스 시어터로 향했다.
▶애플이 정의하는 4가지 제품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서비스, 콘텐츠
사실 애플이 발표할 제품들은 대부분 외신들을 통해 예측이 되어 있었다. 사전유출 이미지를 통해 3개의 후면 카메라를 탑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던 아이폰11 프로&프로맥스의 경우는 발표 이전부터 ‘인덕션 같다’는 소비자들의 반응이 나왔었다. 지난해 출시되었던 아이폰XR의 뒤를 잇는 아이폰11의 경우 스펙들이 대부분 외신들을 통해 보도가 되어 있었다. CNBC, 9to5맥 등 아이폰11의 스펙과 외형 등에 대해 보도했던 언론들은 거의 틀리지 않았었다. 그만큼 이번 발표는 적어도 아이폰11만 놓고 봤을 때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달리 이야기하면 한국시간으로 새벽 2시경 유럽 축구를 구경하는 심정으로 팀 쿡 CEO의 키노트를 지켜봤던 이들 입장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다는 실망감이 느껴졌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부문에서 사람들을 종종 놀라게 해왔던 애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애플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서비스와 콘텐츠였다. 애플이 새롭게 내놓은 애플 아케이드와 애플 TV+의 이야기다. 참고로 애플은 자신이 공급하는 제품을 4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서비스 그리고 콘텐츠다. 하드웨어는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워치 등이며 소프트웨어는 iOS, 워치OS, 파이널컷 등과 같은 제품들이다. 서비스는 애플카드, 애플페이 등을 생각하면 될 것 같고 콘텐츠는 아이튠즈 등을 떠올리면 된다. 이번 발표에서 애플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혁신이 없었다고 하면 애플에게는 억울한 일일 것 같다. 실제로 팀 쿡 애플 CEO는 중국 텐센트와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카메라, 컬러, 스크린, 배터리 수명 등 모든 면에서 아이폰은 큰 혁신을 이뤄냈다”고 밝혔다. 아이폰11은 이미 아이폰6가 발매될 때부터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경쟁자들을 능가할 만한 급격한 성능향상이 엿보이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카메라는 이미 7개까지 탑재한 노키아의 스마트폰이 나오고 있고, 아이폰11은 OLED가 아닌 LCD 기반의 모델인 데다가 무게도 전작에 비해 무거워졌다.
그러나 팀 쿡 애플 CEO가 강조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서비스, 콘텐츠 모두를 합해 놓고 봤을 때, 애플 외에 다른 제품을 선택할 자신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이런 생각은 애플의 키노트 발표를 모두 듣고 나와서 제품을 실제로 손에 들고 (Hands-on) 체험해 보는 공간에 갔을 때 더욱 확실해졌다. 애플은 고객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의 강도를 높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쟁의 범위 또한 확대하고 있었다.
▶애플 아케이드, 애플TV+ 모두 월 4.99달러
현지시간으로 10일 오전 10시 20분. 필자의 입에서 저절로 ‘우와~’ 하는 놀라움이 나왔다. 애플이 새로 발표한 게임 구독 서비스 ‘애플 아케이드’의 월 정액이 4.99달러로 책정됐다는 팀 쿡 CEO의 발표가 나온 순간이었다. 애플아케이드는 9월 19일 한국에도 출시된다. 100여 종의 게임들을 앱스토어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데 가격은 월 5달러 미만. 커피 두 잔 정도를 마시지 않으면 애플 디바이스에서 무제한 게임들을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핸즈온 공간에서 만져본 ‘애플 아케이드’는 기존 애플 제품들을 갖고 있거나, 신제품 구매를 고려하는 이들에게 가격뿐만 아니라 재미 요소들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를 통해 앱스토어에 접속하면 하단에 ‘아케이드’ 탭이 새로 생긴 것을 볼 수 있다. 이 탭을 클릭하여 월정액 6500원(미국 4.99달러)을 결제하면 무제한으로 게임을 다운로드 받아서 즐길 수 있다. 애플은 코나미, 캡콤 등 수많은 히트작들을 내놓았던 게임 제조회사들과 협업해 100여 종의 게임들을 구비해 두었다고 밝혔다.
특히 ‘스트리트파이터’, ‘록맨’, ‘바이오하자드’ 등 과거 인기 타이틀들을 내놓았던 스튜디오 ‘캡콤’이 만든 ‘신세키 인투 뎁스’라는 게임은 해저에서 실제로 녹음한 효과음들을 향상된 아이패드 사운드로 들을 수 있어 현장감이 느껴졌다. 기존 게임전용 단말기들인 플레이스테이션이나 XBOX, 닌텐도 등은 게임들을 하려면 종류에 따라 타이틀 하나당 10달러 이상의 가격을 지불해야만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게임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메리트가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깔끔하고 유려한 그래픽에 재미적인 요소가 충만한 게임들을 즐기려면 애플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필수라는 사실이 체험장에서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이야기가 다음 순간 터져 나왔다. 애플이 오리지널 콘텐츠들을 채워 넣고 있는 ‘애플TV+’ 역시 월정액을 4.99달러로 책정했다는 발표였다. 게다가 애플은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등을 구매한 고객들에게는 1년간 TV+를 공짜로 주겠다는 발표도 내놓았다. 경쟁자인 넷플릭스처럼 1개월을 구독하면 1개월을 무료로 주는 정책도 내놓았다. 이 가격은 시장에서 볼 때 파격적일 수밖에 없다. 경쟁자 넷플릭스의 가격 8.99달러에 비해 40%가량 저렴하고 11월 12일에 출시될 디즈니+의 7.99달러에 비해서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동영상 스트리밍 외에도 다양한 서비스들이 함께 포함돼 있는 아마존 프라임의 경우 월정액 가격이 12.99달러다. 애플은 애플TV+를 오는 11월 1일 내놓을 계획이다.
▶애플의 끝없는 콘텐츠 투자 여력
특히 TV 없이는 살 수 없는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는 미국 사회는 애플TV+의 발매를 매우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경쟁자인 넷플릭스와 비교하여 애플이 여러 가지 강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한마디로 애플TV+는 후발주자이긴 하지만 매우 영리하게 경쟁자들을 이겨낼 수 있는, ‘이야기가 되는’ 사업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석의 근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애플이 콘텐츠에 쏟아 붓는 자금이 천문학적이라는 점은 그 한 이유다. 파이낸셜타임즈에 따르면 애플은 이미 60억달러(약 7조2000만원)를 투자해서 애플TV+의 오리지널 콘텐츠들을 채워 넣고 있다. 현재 애플의 현금보유고는 2106억달러. 한국 돈으로는 250조원가량의 현금이 쌓여 있다. 따라서 콘텐츠가 돈이 된다 싶으면 애플이 콘텐츠에 투자할 수 있는 자금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아마존도 현금은 410억달러 정도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고, 넷플릭스의 경우는 50억달러 정도를 수중에 들고 있다. 그러나 넷플릭스의 경우 매일 하루 100억원가량의 자금이 회사에서 빠져나가는 상태. 실탄 차원에서 다른 회사들은 애플에 일단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둘째, 시청자 기반 확보에 있어서 애플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 애플은 올해 4분기에만 6500만~7500만 대의 아이폰을 판매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이들만 애플TV+를 1년 무료 이용권으로 가입해 시청한다고 해도 3000만 명이 넘는 시청자를 확보할 수 있다. 미국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2위 사업자인 훌루(Hulu)가 2800만 명의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애플은 훌쩍 2위로 뛰어올라 넷플릭스를 위협하게 된다. 게다가 이는 아이폰 구매자만 놓고 계산한 수치다. 아이패드, 맥북 등을 신규 구매한 이들이 애플TV+를 무료로 가입한다면 가입자 수는 더 뛰어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 애플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그리고 서비스까지 합한 역량이 TV 콘텐츠까지 포함시켰을 때 갖게 될 파급력이다. 장기적으로 애플은 페이스타임, 아이메세지 등과 같은 TV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하드웨어와 결합하여 최적화시켜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 콘텐츠에만 강점을 갖고 있는 회사들이나, 단순한 소프트웨어만을 기반으로 한 회사들이 이길 수 없는 거인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셈이다.
▶“혁신을 위해 혁신하지는 않는다”
애플이 4요소(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서비스, 콘텐츠)를 결합해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은 팀 쿡 CEO의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10일(현지시간) 현장에서 중국 매체 텐센트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여기서 그가 강조한 점들 중 하나는 ‘애플은 혁신하기 위해 혁신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5G 기술 구현을 위해 5G를 스마트폰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는 5G 기술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처음이 아니라 최고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5G가 급격히 상승하는 곡선지점에 다다르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다고 말했고, “5G는 거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아직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결국 애플은 고객입장에서 혁신을 바라보고 있으며, 비록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폼팩터 변화는 아니라 할지라도, 고객이 사용하다가 나아졌다는 느낌이 드는 지점들이 있다면 그것이 혁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애플은 이번에 아이폰11에 탑재된 새로운 칩 ‘A13’이 상당한 혁신을 이뤄냈으며, 심지어 퀄컴의 스냅드래곤 855보다 뛰어난 성능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칩에 대한 소개를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았다. 칩의 성능향상에 대한 수치를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소비자들이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애플의 이번 아이폰11 발표는 그동안 애플의 키노트를 지켜봤던 이들이라면 다소 실망스러울 지점들이 있었던 이벤트였다. 이미 나와 있는 보도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고, 경쟁사들에 비해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주인공 아이폰11 시리즈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폰’ 하나만이 아니라 이벤트 전체를 놓고 보면 애플의 고객 중심적 전략을 전체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서비스와 콘텐츠에서 고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자는 애플의 전략. 전 세계 어떤 경쟁자도 쉽게 만들 수 없는 애플만의 ‘레거시’가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안은 채 행사장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