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재산이 10억 달러 이상인 미국의 부자 403명 가운데 15%인 69명이 본인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주도하고 있는 ‘더기빙플레지(The Giving Pledge)’ 재단에 따르면 올해 들어서만 19명이 추가로 기부 릴레이에 동참했다. 지난달 말까지 기부 약속된 돈만 2000억 달러(약 220조원)에 달한다. 올해 들어 이 운동에 동참 의사를 밝힌 인사 가운데는 홈리스 신세에서 태양광 사업가로 변신해 40억 달러의 재산을 일군 존 폰 데조리아 폴미첼시스템 회장 등이 포함됐다.
이미 기부 의사를 밝힌 부자로는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 오라클 공동 창업자 래리 엘리슨, CNN 창업자 테드 터너, 영화감독 조지 루커스, 투자자 로널드 페럴먼, 호텔계 거물 배런 힐턴, MS 공동 창업자 폴 앨런, 페이스북 공동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와 모스코비츠, AOL 공동 창립자 스티브 케이스, 기업 사냥꾼 칼 아이컨, 정크본드 제왕 마이클 밀켄, 모닝스타의 조 만수에토 등이 있다. 더기빙플레지재단은 앞으로 전 세계 부호들을 상대로 기부 운동을 확대할 계획이지만 아직까지 한국인은 물망에 오르지 않고 있다.
#장면 2.
지난달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은 동일본 대지진이 터진 뒤 피해 지역 이재민을 돕는 데 100억엔(약 1310억원)을 쾌척했다. 은퇴할 때까지 소프트뱅크 사장 자격으로 받는 연봉 1억8000만엔도 전액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일본 열도에서 ‘손정의를 총리로 만들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반향이 컸다. 소프트뱅크는 이와 별도로 10억엔을 기부했으며 소프트뱅크 계열사인 일본 야후도 3억엔을 기부했다. 손 사장 개인이 앞장서고 기업이 동참한 것이다.
#장면 3.
생활정보지 수원교차로 창업주인 황필상 씨는 지난 2002년 회사 주식 90%와 현금 10억원 등 210억원을 모교인 아주대에 기부해 장학재단을 설립했다가 수년 뒤 증여세 140억원을 부과받았다.
수원세무서가 공익재단에 회사 주식을 5% 초과해 기부하면 기부금의 최고 60%까지 증여세를 부과하도록 한 세법 규정을 들이댄 것이다. 작년 7월 수원지방법원에서 “장학재단이 지주회사를 만들어 경제력을 집중하려거나 경제력을 세습하려는 것으로 볼 수 없다”며 황씨 손을 들어줬지만 기부를 장려하기는커녕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준 사례였다.
자기 돈 기부 인색한 재벌들
기부문화는 인류 역사와 오랜 시간 함께 해왔다. 멀리는 로마 시대 귀족들이 사비로 공공시설을 세웠고 근대에 들어서는 철강왕 카네기가 미국과 영국 등에 3000개의 도서관을 세워 사회에 환원했다.
탐욕스럽게 돈을 벌어 혐오의 대상이 됐던 존 록펠러도 60억 달러를 사회에 기부했다. 우리나라에도 10대에 걸쳐 거부를 이뤘지만 ‘흉년기에 재산을 늘리지 말라’는 가훈으로 유명했던 경주 최부자 가문이 있다.
다행히 기부 후진국으로 불리던 우리나라도 개인기부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다. 국세청이 집계한 2009년 소득공제 대상 기부금 총액은 9조6107억원. 이 중 개인 기부는 6조1500억원으로 64%를 차지했다. 법인 기부는 3조4600억원으로 36%였다. 2006년 기부금 8조1408억원 중 법인과 개인 기부금이 각각 2조7956억원, 5조3452억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법인과 개인 기부액이 상당히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기업들도 매년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한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는 영업이익 10조원을 올린 2009년 1182억원을 기부금 명목으로 냈다. 2007년에는 1924억원, 2008년에는 1507억원을 기부금으로 냈다. 통상 삼성전자 다음으로 기업 기부를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진 SK텔레콤도 2009년 707억원, 2010년 1230억원을 기부금으로 사용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2009년 기준 국내 200대 기업들의 기부액은 2조6517억원으로 전년 2조1600억원에 비해 소폭 늘어났다.
하지만 기업 명의 기부금은 넘쳐나는 반면 그룹 총수의 개인기부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한국적 기부문화에서 찾을 수 있는 특징은 바로 대기업 총수 가족을 비롯한 거부(巨富)들이 개인적인 기부를 꺼린다는 점이다. 그 대신 경영하고 있는 기업 명의로 생색을 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오죽하면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기부를 하려면 개인 돈으로 해야지 회사 비용으로 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기부가 아니다”라고 지적할 정도다.
우리 기업인들은 스스로 법정에 설 위기에 몰려야 어렵게 기부를 약속한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비자금 조성 혐의로 법정에 섰던 2006년 4월 8400억원을 내겠다고 약속했고 이후 총 1500억원을 자신이 세운 해비치사회공헌문화재단에 기부했다. 아직 5분의 1에 불과하고 작년에는 내지 않았다. 이건희 삼성 회장도 2006년 경영권 편법 승계 논란이 시끄러울 때 8000억원을 기부했다. 이후 새로운 기부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기업 오너들의 기부는 주로 해당 기업이 운영하는 공익재단에 출연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대부분 대기업은 최소 1곳, 많게는 4~5개 공익재단을 자체 보유하고 있다. 대기업 오너들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나 대학, 의료기관 등 외부에 기부했다는 소식을 듣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공익재단을 만들어 주식으로 출연하는 식으로 기부를 하다 보니 편법 상속이나 경영권 방어 포석으로 보는 삐딱한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기업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야 외국처럼 법인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기부가 활성화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기업 측은 개인기부가 많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대기업 오너들 재산 대부분이 계열사 주식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경영권 확보를 위한 방어 본능이 강하기 때문에 계열사 주식을 현금화해 기부에 나서기를 꺼린다.
상속을 앞두고 있다면 이 같은 경향이 더욱 뚜렷해진다. 전문가들은 주식과 배당이 주 수입원인 기업 오너들이 자식들에게 기업을 승계시키기 위해 주식 지분을 건드리지 않는 게 재계 불문율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상당수 대기업 오너들은 기존 지분을 처분하기는커녕 배당으로 받은 돈을 다시 자사주를 사는 데 쓰기도 한다. 국세청 관계자는 “총수 일가가 함부로 보유한 주식을 팔아 기부하다가는 자칫 경영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갖고 있다”며 “SK 소버린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대기업 재단들
우리나라 대기업 산하 공익재단들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먼저 재벌 기업이 운영하는 공익재단에는 외부 기부금이 거의 전입되지 않는다. 대기업 오너들이 대학, 병원, 기존 공익재단 등을 활용하지 않고 그룹 내 공익재단을 만드는 풍토인 데다 운영 과정에서도 스스로 칸막이를 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성그룹의 공익재단들은 기부자가 소득공제 추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국내 1519개 지정기부금 단체에 해당하지 않는다.
삼성의 복지사업 철학에 공감한다 해도 외부인이 선뜻 기부금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굳이 기부금을 유치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삼성뿐 아니라 현대차, LG, SK, 롯데 등 5대 그룹이 운영하는 재단들은 기업 외부에서 전입되는 기부금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또 대부분 공익재단이 출연 원금은 그대로 두고 예금 이자나 주식 배당 수익으로 운영되는 구조를 고집하고 있다. 오너 일가가 주도적으로 공익재단을 만들긴 하지만 상당수 재단이 오너뿐 아니라 계열사에서도 주식이나 현금을 출연받는다.
그룹 총수의 사재 출연금으로 만들어진 공익재단은 이건희 회장 일가가 에버랜드 재판 이후 현금 3250억원, 주식 등 3616억원을 출연한 삼성꿈장학재단(옛 이건희장학재단)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글로비스 재판 이후 주식 51만여 주와 현금 등 1500억원을 출연해 2007년 설립한 해비치사회공헌문화재단 정도다.
신격호 롯데 회장도 롯데장학재단에 1400억원가량 사재를 출연했다. 그 외에 상당수 재단은 계열사들이 현금이나 자사주를 갹출해 만들어졌다. 또 오너나 계열사들이 증여한 주식을 매각해 현금화하는 경우도 드물다. 예금 이자나 투자 수익보다 ‘손해’인 배당 수익을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지난해 31개 기업집단 산하 공익법인을 분석한 리포트에서 “출연주식을 매각해 현금화한 뒤 공익사업 재원으로 적극 활용한 경우는 48개 공익법인 중 단 1개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행태 때문에 공익재단에 대한 지분 출자는 오너 일가의 경영권 유지를 위한 수단이라는 사회적 비판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공익재단 운영 방식도 폐쇄적이고 주먹구구식이다. 롯데그룹 공익재단 통합 홈페이지의 장학·복지사업 소개 코너에서는 3년 전인 2008년도 사업계획만 확인할 수 있다. 사업보고서도 2007년 것이 올라와 있다.
롯데 공익재단의 자산이나 손익계산서를 확인하려면 국세청 공시 사이트를 일일이 검색할 수밖에 없다. 롯데뿐 아니다. 현대차가 운영하는 해비치사회공헌문화재단이나 LG복지재단, 포스코청암재단 등 주요 그룹 산하 대부분 공익재단이 연간 사업보고서를 홈페이지에 게시하지 않고 있다.
2007년 설립된 한화문화재단은 홈페이지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들 공익재단의 수익금 배분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도 알 길이 없다. 이에 비해 민간 공익재단인 ‘아름다운재단’이나 중소기업이 운영하는 ‘이랜드복지재단’ 등은 월별로 수입·지출 장부를 홈페이지에 공개할 정도로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아름다운재단의 경우 홈페이지를 통해 배분 사업을 정기적으로 공모하고 사후에 배분 내용도 공개한다. 또 상당수 대기업 공익재단이 사회 명망가나 친인척, 오너의 지인 등으로 구색을 맞추다 보니 재단의 실질적 운영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폐쇄적이고 부실한 운영방식을 서둘러 개선하지 않으면 재벌 대기업들이 사회공헌활동을 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얘기다.
기부 장려하는 제도 만들어야
세계적인 거부이자 ‘기부천사’인 워런 버핏 회장, 멜린다·빌 게이츠 부부(왼쪽부터)
우리나라에서 개인기부가 활성화되지 않은 배경은 거부들의 기부의식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크지만 세법 등 제도적 유인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상속·증여세법은 공익법인이 출연받은 재산에 대해서는 증여세를 과세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발행 주식의 5%(성실공익법인 10%)가 넘으면 과세하는 예외조항을 두고 있다. 대기업 총수들이 공익재단에 주식을 기부한 뒤 다시 총수 자녀들이 공익재단 소유 주식을 헐값에 사들이는 편법을 막자는 취지였다.
김병규 기획재정부 법인세제과장은 “현행 제도만으로도 충분히 개인에 대한 인센티브는 법인보다 높다”며 “법적 제도보다는 대기업 오너들이 이를 잘 활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사실 대기업 오너가 공익법인에 주식을 기부하는 것이 진정한 기부인지 아니면 편법 증여인지 알 수 없는 탓이 더 크다.
재계는 “공익법인에 대한 기부금이 일정 액수를 넘으면 증여로 간주하는 현재 제도는 개인기부에 대한 걸림돌”로 보는 반면 정부는 “편법 증여 수단이 될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절충점을 내놓고 있다. 김혜성 미래희망연대 의원은 성실공익법인에 한해서 주식 출연 10%를 20%로 상향 조정해 상속세와 증여세를 비과세하는 것을 골자로 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발의한 상태다. 규제는 풀되 사후 감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부 시스템을 개편하자는 목소리다.
미국은 주식 규모나 비중 제한 없이 구체적인 세율을 정하지 않고 사후검토라는 대원칙을 통해 해결한다. 자선단체에 주식을 출연하는 것은 비과세지만 공익재단이 이 주식을 제3자에 되파는 이른바 상속·증여를 한다면 ‘단계-매매이론(step-transaction doctrine)’을 적용해 일괄 과세하는 것이다.
미국은 기부자가 기부를 통해 혜택이 있다면 소득공제에서 제외하고 있다. 예를 들면 건설업체가 법인 소유 토지를 특정 학교 재단에 기부했다면 미국 국세청은 기부를 빌미로 건설 용역을 받았는지 등을 철저히 조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