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27일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 총회에서 박근혜 전 대표와 이한구 의원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다.
차기 대선주자로서 독보적 1위, ‘미래권력’으로 불리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경제관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극도로 말을 아끼던 그가 최근 경제에 대해 소신 발언을 잇따라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발언의 강도가 세졌고 때론 현 정부에 부담을 주는 표현까지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가 진정 바라보고 지향하는 경제는 어떤 경제일까.
박 전 대표는 스스로 자신의 경제관을 말한 적이 없기에 발언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생각이 확실히 정리돼야 말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일단 발언부터 해놓고 나중에 말을 꿰어 맞추는 일반적인 정치인과 달리 구체적인 작업을 마치고 그림을 모두 그린 뒤에야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는 게 박 전 대표다. 따라서 올 들어 박 전 대표가 작심한 듯 쏟아놓은 경제 관련 발언들을 통해 그의 경제관을 엿볼 수 있다.
박 전 대표는 3월7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가재정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적자재정 문제는 현 정부가 매우 곤혹스러워하는 부분이다. “국가 채무 우려를 증폭시킨 공기업이 빠졌다. 국제기준으로도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의 경우 국가채무에 포함시키는 게 맞는데 이번 개편안에는 빠져 있다. 공적연금 장기추계를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통계수치가 아니라 국민이 실제 세금으로 갚아야 할 빚이 얼마인지가 중요하다. 지금 당장은 국가채무가 선진국에 비해 크지 않아도 최근 증가 속도가 가파르고 저출산·고령화 현상을 감안할 때 국가채무를 제대로 관리하는 게 필요하다. 그리스 사태에서 보듯이 재정이 신뢰를 얻지 못하면 국가적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표 경제 관심은 국민후생, 생산적 복지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 총회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이틀 후인 9일에는 기재위 전체회의에서 최근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가 된 물가를 들먹였다.“성장이 전체 국민후생에 기여하는 긍정적 효과가 과거보다 많이 낮아졌다. 성장이 전체 후생에 골고루 도움이 되기보다는 일부에 편중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생필품 가격 급등과 전셋값 상승 등으로 국민들의 실질소득은 감소하고 생활은 오히려 힘들어지고 있다. 어려운 계층일수록 물가(상승)로 인한 고통이 더 크다. 성장도 매우 중요하겠지만 서민생활에는 무엇보다 생필품 가격 안정이 중요하다. 전 국민들의 삶의 질과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물가 안정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중요하다. 물가 안정 목표의 중심치가 높으면 선제적인 통화신용정책의 집행이 불가능하고 장기적으로 부동산 가격 등 자산 가격의 버블(거품) 형성 우려가 높다. 한국은행 물가 안정 목표 중심치를 3%에서 선진국 수준인 2%로 내리는 게 필요하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이와 관련 “물가 목표 중심치를 2%로 하향조정하는 문제는 우리 경제가 선진화되는 과정에서 추구해야 할 방향이지만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 물가 상승률이 평균 3%를 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오르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고 답변했다.박 전 대표는 그러나 “의료에서도 치료보다 예방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물가도 가격이 오른 뒤 사후적으로 대책을 마련하는 물가지수 관리보다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며 김 총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저금리와 고환율 정책을 축으로 한 이명박 정부의 경제성장률 높이기가 오히려 서민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우회적인 비판이었다. 그는 재정과 물가 이외에도 “대기업 이익은 크게 늘었지만 중소기업은 그러지 못했다”며 중소기업을 중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경제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내비친 박 전 대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국민후생’이다. ‘후생경제학’을 연상시키는 국민후생이란 용어는 복지, 물가 안정, 분배의 공정 등 주관적인 국민의 행복 척도를 더 중시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성장과 효율 등 객관적인 경제지표를 중시하는 현 정부와 크게 차별되는 부분이다. 친박근혜계인 한나라당 한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의 핵심가치는 국민후생이다. 국민이 좀 더 행복하고 단순히 GDP(국내총생산)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안정된 분배를 하면서 성장도 하는 그런 것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한 기분이 들게 하는 방향의 콘셉트다”고 설명했다. 달리 표현하면 ‘더불어 잘 살고 행복한 사회’를 추구하는 인물이 박 전 대표라는 얘기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관과 닮은꼴
박근혜 전 대표의 경제 교사로 알려진 이한구 의원(가운데).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더불어’와 ‘잘 산다’는 단어다. 이는 선친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으로 대표되는 경제관과 일맥상통한다. 어린 시절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리던 박 전 대통령이 ‘함께 잘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추진한 게 새마을운동이었다. 박 전 대표가 ‘약자 배려’를 중시하는 발언을 한 것은 바로 선친에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박 전 대표가 최근 탐독하는 서적들도 ‘더 나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경제학 책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저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환경을 강조하는 대안 자본주의의 틀을 제시하는 <자연 자본주의(Natural Capitalism)>,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이 쓴 <(TAX)프리라이더> 등이 박 전 대표의 독서 목록에 들어 있다. 모두 약자 배려를 강조하고 있다.그렇다고 박 전 대표가 생산적인 측면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복지와 (생산적) 경제의 선순환’을 추구한다는 게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18대 국회 전반기에는 보건복지위 상임위를 맡았다가 후반기에는 상임위를 기획재정위로 옮긴 데서 박 전 대표의 의중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한국형 복지’, ‘맞춤형 복지’에는 생산적인 측면이 담겨 있다. 다음은 박 전 대표의 경제 브레인으로 꼽히는 한 인사의 얘기.“지금은 저소득층·노인·탈북자·다문화 가정 등에 조금씩 돈을 준다. 이걸 평생 받을 수 있겠는가.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이 사람들은 희망 없이 산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능력개발비용을 지원해 주는 게 맞다. 처음에야 돈이 많이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게 장기적으로 좋은 거고 돈도 덜 든다. 훈련받은 기간에 생활비를 최소한으로 대주면서 나중에 취업시키는 게 진정한 복지다.
박 전 대표의 복지는 장기적으로 ‘복지의 수요를 감소시키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계속 퍼주기만 하면 그 부담은 미래 세대가 지게 되는데 그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박 전 대표의 이러한 경제관은 일정 부분 이명박 대통령과 차별화되는 측면이 강하다. ‘저금리와 고환율’을 통한 성장정책을 펴왔던 현 정부의 기조와 크게 다른 것. 박 전 대표는 자칫 자신과 이 대통령의 경제관 차이가 크게 부각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해 발언을 삼가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경제관의 차이는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표의 대학시절 전공은 전자공학이다. 정치를 하면서도 ‘경제’와는 연계시키기 힘든 행보를 걸어왔다. 하지만 소득세 최고구간 세율 인하 철회, 국가재정통계 개편안, 물가 급등, 생산적 복지 등 그의 발언에서 만만치 않은 내공이 읽힌다. 이러한 내공은 든든한 경제 선생들 덕분이라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평가다.
국가미래연구원 중심으로 경제 공부
박근혜 전 대표의 경제 공부를 돕는 ‘5인 스터디 그룹’. 왼쪽부터 김광두 서강대 교수, 안종범 성균관대 교수, 김영세 연세대 교수,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 최외출 영남대 교수.
대표적인 경제브레인은 대우경제연구소장을 지내고 당 정책위의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정책통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 그는 박 전 대표가 첫 번째 공부 모임으로 선택했으며 싱크탱크로 불리는 ‘국가미래연구원(원장 김광두 서강대 교수)’에 함께 들어가 있는 유일한 의원이다.
이 의원은 “현재 박 전 대표의 공부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왔다. 경제뿐 아니라 모든 분야를 서로 연결시켜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이혜훈 한나라당 의원과 남편인 김영세 연세대 교수는 부부가 모두 경제통으로서 박 전 대표의 공부를 돕는다. 김 교수는 안종범(성균관대)·신세돈(숙명여대)·김광두(서강대)·최외출(영남대) 교수와 함께 박 전 대표의 ‘5인 스터디 그룹’ 멤버로 활약 중이다.
5인 스터디 그룹을 중심으로 출범한 국가미래연구원은 올 들어 가장 주목받는 곳이다. 발기인만 78명이며 이름 공개를 원치 않는 숨은 조언자 그룹도 많다. 79%(62명)가 대학교수(강사)·연구원 등 학자들이며 나머지는 전직 관료·기업인·변호사·의학박사 등으로 대부분 우파 성향을 보인다.담당 연구 분야 15개 중 ‘범 경제’ 분야는 거시금융(5명), 재정·복지(6명), 산업·무역·경영(12명), 국토·부동산·해운·교통(3명), 환경·에너지(2명) 등 5개 분야(총 28명)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외교안보수석(2006년 12월~2008년 2월)을 지낸 윤병세 전 외교부 차관보, 현 정부에서 남북교류와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온 류길재 경남대 교수 등이 포함됐다.
야당 추천 몫으로 2008년 3월부터 올 2월까지 방송통신위원으로 재직했던 이병기 서울대 전자공학과 교수, 제일기획 출신으로 홍보 분야를 담당한 황부영 브랜다임앤파트너스 대표, 벤처 1세대인 김병기 애플민트 홀딩스 대표 등도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