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9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전시회(CES 2010)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왼쪽부터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 이건희 회장,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
#1 1993년 6월7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핵심경영진을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집결시켰다. 이 회장의 부름을 받고 모인 사람은 무려 200여 명에 달했다. 이날 이회장은 “마누라와 자식을 빼곤 모두 바꿔라. 헌법, 법률, 도덕을제외한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바꾸라”고 말했다. 신경영의 기치를 내세운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갑작스러웠다.무사안일주의와 비대해진 조직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삼성은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계기로 개혁과 쇄신,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이후 삼성은 소니 등 일본 경쟁사들을 제치고 세계 1등 기업으로 올라섰다. 이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주효했던 것이다.
#2 2010년 10월12일, 멕시코에서 열리는 국가올림픽위원회총연합회(ANOC)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길에 올랐던이건희 회장은 “어느 시대든 조직은 젊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갑작스러운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이 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인사•조직과 관련한 발언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ANOC 행사를 마치고 귀국하던10월30일에는 “세상이 빨리 바뀌기 때문에 젊은 사람이 조직에 더어울린다”며 물리적인 나이까지 언급했다. 재계 안팎에서는 삼성의 연말 인사에서 대대적인 물갈이를 예상했다. 이를 증명이라도하듯 이 회장은 11월11일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참관하기 위해 출국 하는 자리에서 사장단 인사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넓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13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있지만 이 두 ‘사건’에는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세대교체’가 그것이다. 새 사람으로 판을다시 짜겠다는 것이다.
이 회장의 발언이 신호탄이 되어 삼성그룹 내에서는 벌써부터 구조조정과 인사, 조직개편에 대한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아무리 사장이라 해도 인사에 관한 이야기는 발령 며칠 전에야 알 수있다”는 삼성그룹 측의 부인과는 달리 각 계열사 사장단에는 이미‘시그널’이 갔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한 달 앞당긴 업적 평가… 핵심 사장단까지 교체 예고
지난해 1월 삼성 사장단 인사에서 1948년 이전 출생에 재임기간 5년 이상인 60대 CEO는 교체 대상이었다. 당시 인사로 현재 삼성사장단의 평균연령은 53.7세가 됐다. 사장단의 나이치고는 젊다고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젊어진다면 연령이 어디까지 내려갈지 예측하기 힘들다. 게다가 사장 재임기간도 대부분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여서 최근 윤곽을 드러내는 이건희 회장의 조직개편은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그 대상과 폭이 폭발적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삼성은 1년에 두 번 임직원 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8월 ‘역량평가’와 12월 ‘업적평가’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룹 인사팀 관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의 ‘젊은 조직론’ 발언 이후 12월 ‘업적평가’를 예년보다한 달 앞당겨 11월초부터 진행하고 있다. 그만큼 인사가 빨라질 수있다는 얘기다.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 회장은 지난 17일 광저우 아시안게임 참관을 마치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의 사장 승진을 기정사실화했다. 또 하루 만에 그룹조직의 복원을 선언하며 김순택 부회장을 책임자로 선임했다. 올해 인사와 조직개편의 밑그림을 미리 발표한 것이다.
지난 11월19일 이인용 삼성그룹 커뮤니케이션팀 부사장이 발표한 밑그림을 재구성하면 삼성은 그룹의 컨트롤타워를 부활시켜 김순택 부회장를 책임자로, 이재용 사장 시대를 열어나간다는 방침을굳혔다. 또 이학수•김인주로 대표되는 이 회장 시대의 과거 전략기획팀 시절의 인사들은 모두 일선에서 퇴진한다. 즉 본격적인 이재용 시대를 앞둔 경영권 이양의 과도기적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 삼성전자 안팎에서는 S대 출신과 수원공장 출신의 라인들에 대한 물갈이 인사를 점치고 있다. 현재 서울 삼성 본관의 요직에 앉아 있는 특정 CEO 라인들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은 관리파트 Y사장의 대학 인맥과 현장파트 C사장의 공장 및 고교 라인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성의 한 고위임원은 “CEO만 바꾸면 임원들은 자동적으로 정리된다”며 이번 인사에서 대대적인사장단 교체를 암시했다.이 같은 관측이 현실화된다면 삼성의 핵심사장단까지 전면 교체된다는 예상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 이 회장이 “될 수 있는 대로 (인사의 폭을) 넓게 하고 싶다”는 의지를 직접 표명한 만큼 아무도 연임 혹은 유임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각 계열사별로는 이미 구조조정이 가시화되고 있다. 에버랜드를비롯해 특히 금융 계열사들에서 먼저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삼성화재, 삼성카드, 삼성증권 등 금융 계열사에서는 근무연한이 높은 부장급 이상 고액 연봉자를 대상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상반기에 많은 인력을 구조조정한 바 있는 삼성생명은 이번 대상에서 제외됐다.금융 계열사 구조조정이 이 회장의 발언들과 연결되는 것에 각 계열사들은 ‘상시적인 희망퇴직 프로그램의 일환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의 한 고위임원은 “1958~59년생으로 임원 승진에서7~8년 누락된 부장직급은 명예퇴직 대상”이라며 구체적인 범위를 귀띔했다.특히 이 고위임원은 금융 계열사에 이어 전자 계열사로 명예퇴직의 칼바람이 불 것이라며 “삼성SDS에서 시범적으로 명예퇴직을실시한 후 결과에 따라 삼성전자 등 핵심계열사로 확대 실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삼성SDS가 시범케이스로 선정된 이유에 대해서는 10여 년째 부장직급에 머문 인력들이 계열사 가운데 가장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번 인사•조직과 관련한 이 회장의 발언에 대해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때와 맥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즉 세대교체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결론적으로 말해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이건희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올 인사의 화두인 ‘젊은 인재’, ‘젊은 조직’은 ‘이재용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설명했다.아버지 고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1987년 그룹 회장직에 오른 이건희 회장은 수 년 동안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리더십이 먹혀들지 않았다.
그룹에는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많이 대거 포진해 있어 선대부터 이어져오던 조직은 새로운 회장이 쉽게 장악할 수 없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배경은 여기에 있었다. 취임 이후 5년여 절치부심하던 이 회장은 ‘신경영’을 앞세워 세대교체와 조직장악에 나섰다. 이 회장의 눈에 당시 삼성은 세계 1등을 목표로 뛰는 회사의 자세와 투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선대부터 내려온 조직은 갈수록 비대해지기만 했고 옛 인물들은 무사안일주의에 젖어 있었다. 그런 조직과 사람들에게 이 회장의 리더십이 제대로 먹혀들 리 만무했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했다. 삼성 역시 ‘대한민국만의 삼성’이 아닌 ‘세계의 삼성’으로 나아가야 했다. 일본 경쟁사인 소니를 비롯해 세계의 벽은 높기만 한데 삼성의 조직과 사람들은 이 회장의 마음처럼 미래지향적이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현상 유지는커녕 뒤처지기 십상이었다. 선대 회장 때의 조직과 사람들은 이 회장의 의지와 리더십을 받아들이기에는 사고와 능력이 뒤처져 있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조직을 미래지향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새로운 조직과 사람으로 ‘이건희 체제’를 재확립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이에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어라’는 결단을 내렸다.삼성 한 관계자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비서실을 비롯한 조직을 개편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던 삼성이 쇄신했다”면서 “신경영은 한마디로 ‘이건희의 삼성’을 확립한 토대가 됐다”라고 평가했다.
‘젊은’ 이재용 체제의 토대 마련
신경영이 이 회장의 그룹 장악의 토대를 마련했다면 젊은 조직론은 이재용 체제의 삼성을 위한 토대 구축이다. 따라서 향후 삼성의 경영체제와 방향도 한결 분명해졌다.
그동안 삼성 내부에서는 신구세력간 알력설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 또 재무통 그룹과 기획통 그룹 간의 마찰도 잦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도 이 같은 잡음을 전혀 모르진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이번 세대교체와 조직개편을 바라보는 재계의 시각이다. 다시 말하면 이재용 체제의 순항을 위해서는 사전에 내부 불협화음부터 제거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이 회장에게 강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는 이 회장 스스로 취임 초기 경험했기에 그 필요성에 더욱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삼성그룹을 장악하고 있는 그룹은 재무통과 공장에서 올라온 현장 그룹이다. 재무통 그룹은 이학수·김인주 고문을 정점으로 이 회장 체제의 전략기획실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또 현장 그룹은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CEO들로 구성된 공장 출신과 S고 출신들이다. 이 두 그룹이 실질적으로 삼성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김순택 부회장이 그룹 컨트롤타워 책임자로 선임되면서 재무통 그룹의 힘은 급격히 약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이학수 고문이 삼성물산으로, 김인주 고문이 삼성카드로 이동하면서 사실상 그룹 컨트롤타워에서 재무통 그룹은 양쪽 날개를 모두 잃었다.
김 부회장이 그룹 컨트롤타워 책임자로 발표되던 11월19일 오전까지만 해도 삼성 안팎에서는 이학수 고문의 경영복귀를 예상했다. 11월 초 만난 그룹의 핵심 관계자는 “얼마 전 이학수 고문이 IT 관련 계열사에 있던 여비서를 불러 올렸다”며 “이는 이 고문이 조만간 핵심보직으로 경영에 복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한 바 있다. 즉 10~15명의 고문, 보좌역, 상담역들이 사무실에 1~3명의 여비서를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전용 여비서를 불러올렸다는 것은 구체적인 보직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이 고문은 지금도 이 회장의 오른팔로 인식되고 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지만 이 회장의 해외 출장길에 빠짐없이 동승하고 있다. 때문에 이 고문의 계열사 전보는 삼성 내부에서조차 뜻밖이라고 전한다.
김순택 부회장의 주요 임무는 ‘신구세력간 완충역할’
2006년 이건희 회장이 김순택 부회장(당시 삼성SDI 사장), 이학수 고문, 이재용 부사장(왼쪽부터)과 일본 요코하마 평판디스플레이 전시회를 참관하는 모습.
한편 재무통 그룹에 밀려있던 기획통 그룹의 전면 배치는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김 부회장의 화려한 복귀로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김 부회장은 삼성SDI 사장 부임 이전 18년 동안 비서실에서 이 회장을 보좌했던 대표적인 기획통이다. 외환위기 당시 삼성자동차의 부실에 대한 책임으로 기획통이 대거 숙청되고 그 자리를 재무통이 차지한 이후 김 부회장은 외곽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삼성 고위 임원에 따르면 김 부회장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룹 컨트롤타워의 책임자로서 삼성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재용 체제의 원만한 정착을 위한 신구세력간 완충역할이 그것이다.
이 고위 임원은 “기획통이 그룹을 장악하고 있던 1990년대의 삼성은 미래 신수종 사업 개발에 적극적이었다”면서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신수종 개발은 뒷전으로 밀리고, 삼성의 주요 관심은 실적, 성과주의에 치우쳐 있었다”고 전했다. 재무통 그룹이 장악하고 있었던 탓이다. 이 회장은 김 부회장을 컨트롤타워 수장에 선임함으로써 이재용 체제의 삼성 역시 현재와 같은 글로벌 위상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의 성장을 견인했던 기획통이 제격이라고 판단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김 부회장은 이 회장이 강조한 젊은 조직, 젊은 인재와 어울리지 않는다. 1949년생인 김 부회장의 올해 나이는 61세. 이재용 부사장과 20여 살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 회장은 세대교체에 따른 그룹 내 불협화음이 예상되는 신구세력간의 알력 및 마찰을 중재하는 완충역할의 적임자로 김 부회장을 낙점한 것으로 해석된다.
삼성의 고위 임원은 “인적 쇄신이라는 게 썰물처럼 한꺼번에 사람들을 빼내야 하고 이때 반발은 감수해야 한다”며 “김 부회장의 또 다른 역할은 혹여 발생할지 모를 신구세력간 충돌에서 완충역할을 한다고 보면 정확하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실제 김 부회장은 그룹 내 적이 없는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기획통이지만 재무통 그룹과도 등을 지지 않고 원만한 소통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그룹 안팎의 일반적인 평가다.
이제 삼성그룹은 42세인 이재용 사장 체제로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그러나 이재용 후계체제는 이번 사장 승진 이후 그룹 부회장을 거쳐 회장까지 여전히 시간을 필요로 한다. 회장 취임 이후 5년의 침묵을 경험했던 이건희 회장이 이재용 체제의 안착을 위해 어떤 플랜을 구상하고 있는지 12월 조직개편과 세대교체 인사에 재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