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40). 그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 ‘작은 고추가 맵다’는 흔한 표현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1996년, 열일곱 꿈 많던 이 소녀는 영화 <꽃잎>에서 파격적인 연기로 충무로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영화 속 그의 광기(?)는 이내 스크린 아닌 무대로 본거지를 옮겼다. 1999년 ‘와’로 데뷔, 신들린 무대로 가요계를 놀라게 한 그는 ‘미쳐’ ‘반’ ‘바꿔’ ‘줄래’ 등 독보적인 콘셉트의 음악들로 범접불가의 아우라를 뽐내며 ‘테크노 여전사’라는 수식어 속 시대를 풍미했다.
20대의 이정현은 배우 아닌 가수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특히 2000년대 중반 ‘한류’ 바람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수만 명의 관객을 압도하는 아우라로 현지를 평정한 ‘한류퀸’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배우 이정현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전환점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파란만장>(2011)이었다. 이후 <범죄소년>(2012), <명량>(2014),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 <군함도>(2017) 등 크고 작은 작품에서 자신의 역량을 120% 해낸 그는 올 여름, 코로나19로 최대 위기에 놓인 영화계를 구할 <반도>(2020)의 여전사 민정으로 스크린 관객을 만난다.
▶<부산행> 잇는 좀비물서 열연
한여름의 시작을 알린 7월 한복판에 개봉한 영화 <반도>(감독 연상호·제작 영화사레드피터·배급 NEW)는 연상호 감독의 전작 <부산행>을 잇는 좀비물로, 부산행 그 후 4년, 폐허가 된 땅에 남겨진 자들이 벌이는 최후의 사투를 그리는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다. 연 감독의 전작 <부산행>이 2016년 개봉 당시 1156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한 만큼 <반도>에 쏟아진 기대 역시 뜨거웠다. 영화는 마치 좀비처럼 다시 한 번 진화했다는 평가 속 코로나19 악재를 뚫고 개봉 4일 만인 지난 7월 18일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본격 흥행몰이를 시작한 <반도> 홍보 인터뷰에 나선 이정현은 흰색 민무늬 티셔츠에 옅은 청색의 롱스커트를 차림이었다. 어깨 정도 길이의 중단발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가 빛났다.
‘스타’라는 타이틀이 주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매 질문마다 수줍은 듯 말간 미소를 보인 이정현. 데뷔 후 25년의 시간에 대해 “롤러코스터 같은 시간”이라 떠올린 그는 인터뷰 내내 오롯이 ‘인간성’ 가득한 모습으로, 그저 “<반도>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코로나19 때문에 관객들이 많이 오실까 걱정했어요. 개봉 전날까지도 ‘이렇게 개봉하는 게 맞는 것인가’ 생각도 했는데 많이 보러 와주셔서 너무 다행이고, 극장이 활기를 찾게 돼 다행이에요. 코로나19로 인해 제작이 중단된 영화도 많고 해서 ‘이제 나도 영화 못 찍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관객들이 많이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폐허가 된 반도에서 살아남아 전사가 된, 민정 역의 이정현은 코로나19 시국을 뚫고 극장을 찾아준 관객들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극중 민정은 폐허 속에서 딸 준(이레), 유진(이예원)과 함께 악착같이 살아남은 인물. 이정현은 좀비는 물론, 좀비보다 더한 광기를 보여주는 631부대의 습격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엄마이자 전사로 스크린을 압도한다. 이정현은 생애 첫 액션 블록버스터에서 거침없는 액션은 물론, 진한 모성애 연기까지 선보이며 그 자신의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대한민국 어머니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
“민정은 폐허가 된 반도에서 좀비와 짐승 같은 631부대와 살아가면서 오직 모성애 때문에 생긴 전투력으로 아이들과 희망을 가지고 반도를 탈출하는, 강인한 인물이에요. 시나리오 봤을 때도 그 점이 매력으로 다가와 끌렸었죠.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특히 대한민국 어머니들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거라고, 대한민국 어머니라면 모두 민정처럼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반도> 출연은 연 감독의 문자 한 통이 계기가 됐다. “감독님께서 안부를 물으며 시나리오를 줄 테니 보고 연락을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반도> 시나리오를 보고 좋았고, 기뻤어요. 애니메이션 영화부터 <부산행>까지 연 감독님 영화를 좋아했는데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평소 좀비물을 좋아한다는 이정현은 “좀비들이 4년이 흐르면서 좀 더 진화하고 변화한 모습을 그린 것도 신기했다. 좀비들이 4년 사이에 더 무서워지고 지저분해지고 관절도 더 심하게 비틀어 쓰는 게 신기했다. 또 (631부대의 경우) 실제로 저렇게 궁지에 몰리면 사람들이 미쳐버릴 것 같고, 그런 설정들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생애 첫 액션 블록버스터인 만큼 이정현은 촬영 몇 달 전부터 액션스쿨에서 진짜 굴렀다(?). 한순간 방심하면 좀비로부터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만큼, 총이 익숙해져야 했던 역할이었기 때문에 “촬영 내내 총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고.
하지만 정작 본 촬영에선 강도 높은 액션보단 단순한 동작 위주로 연기했단다. 이정현은 “몇 달간 총 들고 땅 구르기부터 연습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단순한 동작만 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감독님이 필요한 동작만 만들어 붙이셨는데 완성도가 높더라. 신기했다”고 밝혔다.
<반도>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카체이싱 장면 촬영 비하인드도 전했다. “현장이 너무 신기했어요. 시나리오 봤을 때는 도로를 막고 찍는 줄 알았는데 그린매트를 온사방에 설치하고 트럭 앞부분만 가져다 놓고 찍었어요. 감독님이 1년 전부터 CG 작업을 다 해놓으셨더라고요. 저는 그냥 연기만 하면 됐죠. 굉장히 빠르고 안전하게, 에너지 소비 없이 찍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시니 한 번도 안 다치고 촬영할 때도 편했어요. 한국 영화 시스템에 너무 놀랐죠. 이레와 예원이도 정말 너무 잘 해줬어요. 천진난만하게 있다가 연기에 푹 빠져서 하는 걸 보면서, 감독님과 ‘너무 잘 한다’고 혀를 내둘렀어요. 요즘 아역들 대단하구나 싶었어요.”
봉쇄된 반도에 4년 만에 돌아온 생존자 정석 역의 강동원과의 호흡도 백점이었다고. “(강)동원 씨와 함께해서 정말 좋았어요. 성격도 너무 좋고, 액션연기도 잘하고, 상대를 편안하게 해줘서 연기 호흡이 잘 맞았어요. NG가 난 적도 없었고요. 늘 정석 캐릭터에 몰입해서 오니까, 저도 아무래도 제 캐릭터에 집중을 잘할 수 있었죠.”
‘인간’ 강동원에 대해서는 “톱스타 의식 없는 착한 배우”라 치켜세웠다. “(강동원) 첫인상이 정말 좋았어요. ‘저게 사람일까?’ 싶을 만큼 비율도 좋았고, 실제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이래서 강동원 하는구나’ 싶었죠. 실제로 착하고 예의도 바르더군요. 도저히 단점을 못 찾겠어요.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쑥스러움이 많다는 것? 수줍음이 많은데 또 어떨 땐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요.”
<반도>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의 좀비물로 역대급 카체이싱까지 보는 재미가 뚜렷한 영화라는 호평을 받았지만 일각에선 신파적인 스토리로 아쉬움을 남긴다는 반응도 받았다. 하지만 이정현은 “모든 답은 모성애로 인한 전투력 하나로 다 설명이 된다”고 개인적인 감상을 전했다.
“저는 감독님이 그런 의도를 잘 선택하셨다고 생각해요. 만약 민정에게 모녀 설정이 없었다면 좀비에게 물려 죽거나 631부대에게 당해서 죽었을 텐데, 딸아이들을 심어주시고, 민정의 전투력이 모성애로부터 형성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나리오를 보니 모든 게 납득이 갔어요.”
영화 후반부, 트럭에서 자결을 시도하던 장면에 대해서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헬기는 떠났을 테니, 그냥 포기하려 죽으려고 했던 것 같다. 아이를 생각하는 선택을 한 민정의 오묘한 감정을 잘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촬영도 한 번에 다 오케이됐다”고 떠올리며 “재미있는 오락영화니까, 즐기며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빙긋 웃었다.
20년 넘게 영화계에 몸담으며 느끼는 ‘환경적 변화’에 대한 느낌도 담담하게 밝혔다. “가장 많이 달라진 건, 그 땐 필름 카메라였다는 거예요. NG 한 번 나면 난리 났었죠. 정신 나간 연기를 해야 하는데, 첫 촬영 때 연기 못 한다고 감독님이 촬영을 접으셨어요. 감독님이 너무 무서웠죠. <꽃잎> 이후 가수 하다가 15년 만에 박찬욱 감독님의 <파란만장>으로 돌아왔는데, 현장 편집하는 걸 보고 너무 놀랐어요. 예전엔 그런 장비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도 분위기 자체가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30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꽃잎>이었지만, 그의 말마따나 촬영은 녹록지 않았다. 예민한 현장 분위기에 완벽주의자 장선우 감독. 당시 감독의 연기 질타를 받은 이정현이 홀로 전라도에 내려가 집집마다 배회하고 다녔다는 에피소드는 지금도 영화계에서 꾸준히 회자되는 이야기다. 그는 “부모님이 오시면 의지할까봐 촬영장에 못 오시게 했다”며 25년 전을 떠올렸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2015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며 그 진가를 입증한 ‘명배우’인 이정현. 최근에는 전방위적으로 분위기를 제대로 탔다. ‘탑골가요’ 열풍으로 재조명 받으며 ‘탑골 레이디 가가’라는 호칭까지 받고 있는 것. 이에 대해 이정현은 “너무 좋다. 작명센스가 정말 대단한 것 같다”면서 “뒤늦게 이렇게 주목받을 수 있게 돼 너무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덕분에 조카뻘 되는 어린 팬들이 대거 팬클럽에 가입했다”며 즐거워하기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가수로서도 무대에 설 것”
다만 가수 활동 계획에 대해서는 “가수 은퇴한 건 아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새 앨범 계획이 구체적으로 들어간 건 아니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대에는 계속 설 것”이라고 힘 줘 말했다. 그뿐 아니다. KBS2 예능 프로그램 <편스토랑>을 통해 숨겨진 요리 실력을 뽐낸 이정현은 아예 요리책까지 내며 그만의 요리 비기를 친절하게 공유하기도 했다. 남다른 요리 실력의 비결을 묻자 “대가족”과 “어머니의 영향”을 꼽는다.
“우리 가족이 엄청 대가족이에요. 딸 다섯에 다들 결혼하고 조카 두 명씩 해서 스무 명인데, 예전부터 엄마는 주말이면 친척들을 불러서 음식 해주시는 걸 즐기셨어요. 김장할 때도 김치를 300~400포기씩 담아서 주변에 나눠주시는 걸 좋아하셨어요. 음식 해서 남 먹여주고 나눠주고 하는 걸 어려서부터 많이 보고 배웠죠. 어렸을 땐 그게 이해가 안 됐어요. 왜 저렇게 힘들게 해서 남들에게 주지? 했는데, 제가 나이 들어보니까 맛있는 음식을 해서 친구들과 맛있게 먹고, 수다 떨고 그러는 게 큰 행복이더라고요. (요리 재능은) 엄마에게 많이 물려받은 것 같아요.”
데뷔 후 줄곧 화려한 조명 아래 서 있었지만 빛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그림자의 시기, 이정현을 위로한 것도 요리였다.
“제가 우여곡절이 많았잖아요. 톱이었다 내려갔다, 가수로서 톱이었다 다시 내려갔다, 한류 시작하며 정점 찍었다가 또 내려갔다… 그러면서 정서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취미를 찾은 게 요리 그리고 음식이었죠. 매주 목요일이면 엄마랑 <한국인의 밥상> 보는 게 제일 행복했고, 엄마가 음식 할 때 도마 소리 나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촬영하고 돌아와 힘들 때 엄마가 양푼에 밥 비벼주면, 그게 힐링이었죠.”
어느덧 40대에 접어든 이정현이 그리고 있는 ‘이정현의 40대’는 어떤 모습일까. “음… 영화도 많이 하고 싶고, 드라마도 하고 싶어요. 그런데 나이도 있어서 아기도 낳아야 하는데, 하반기까지는 힘들 것 같고. 내년에는 더 완성된 가정을 이루고 싶기도 해요. 40대에는 안정적인 배우로, 꾸준히 연기했으면 좋겠어요.”
소박한 바람을 내놓는 이정현에게 짓궂게 ‘야망은 없냐’고 묻자 그는 “야망을 가지면 너무 힘들다”며 손사레 쳤다. “뭔가 이상하게, 기대를 하면 이뤄진 적이 없어요. 내려놓으니까 너무 행복해요. 잘 되면 너무 기분 좋고, 혹시 잘 안 돼도 아무렇지도 않고. 모든 기대를 놓고, 주어진 일에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다 보니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되는 것 같아요.”
이정현의 ‘내려놓음’은 이미 10년가량 된 일. 그는 “<파란만장>으로 다시 배우로 (주요 활동 분야를) 돌리면서 많이 내려놨는데 그렇게 내려놓으니 너무 좋더라”라고 했다. 롤러코스터 같은 20대를 보낸 이후, 30대 초반부턴 평탄면으로 내려온 듯한 느낌이란다.
“어렸을 땐 에너지도 넘치고 혈기왕성하니까,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너무 기쁘고 들뜨고 그랬는데 그런 게 없어지니까 너무 기쁘고 행복해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취미도 찾아 요리로 풀고 하니까, 다른 일 할 때도 집중도 더 잘되는 것 같아요.”
자연스레 ‘제4의 전성기’에 대한 기대도, 역시 없단다. “너무 두렵고 무서워요. 물론 좋게 봐주시면 너무 감사하지만 그냥 저는, 오래 남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꾸준히 연기만 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