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넷, 세정의 얼굴은 다양하다. 누군가에게는 걸그룹 아이오아이, 구구단 멤버 세정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드라마 속 연기깨나 했던 신인배우 김세정으로 기억될 터다. 혹자에게는 여전히 <프로듀스 101>에서 ‘꽃길’을 예고하며 눈물을 쏟은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고, 각종 예능에서 있는 힘껏 울고 웃는 ‘예능돌’의 모습으로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방면에서 쉼 없이 활약해 온 그녀지만 결코 잊지 않고 기억될 모습은 바로 솔로 가수로서의 정체성, 세정 그 자체다.
세정은 2016년 11월 발매한 ‘꽃길’과 지난해 12월 발매한 ‘터널’로 위로와 힐링을 선사하며 ‘걸그룹 멤버’ 타이틀을 넘어 솔로가수로도 성공적인 여정을 달려왔다. 여기에 최근 발표한 첫 번째 미니앨범 <화분>을 통해서는 싱어송라이터 혹은 아티스트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추가하게 됐다.
앨범은 ‘화분’을 비롯해 수록곡들까지 총 다섯 트랙으로 꾸며져 있다. 세정은 수록곡 작사, 작곡에 직접 참여하며 ‘세정표 감성’을 오롯이 드러냈다. 그가 작업에 참여한 수록곡들 모두 따뜻한 가사와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위로는 그 자신을 다독이는 데서 출발한다
앨범 발표를 앞두고 만난 세정은 특유의 설렘 가득한 눈빛을 반짝였다. “거창한 무엇보다 간단한 말 한 마디가 굉장히 와 닿을 때가 있잖아요. 이번 앨범은 그런 위로송으로 구성된 앨범이에요. 첫 미니앨범이라 설레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기대도 하게 되는 노래들로 채웠죠. 처음 준비한 앨범인 만큼 작사, 작곡에도 최대한 참여하려 노력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수록곡 전 곡의 작사, 작곡에 참여하게 됐어요.”
자작곡을 대거 실은 데 대해서는 쑥스러움과 부담을 동시에 드러냈다. “제가 쓴 곡이 실릴 것이라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많이 들어갈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어떻게 보면 사람들에게 자작곡을 평가 받는 링 위에 올라선 거잖아요. 나만 듣는 나의 노래가 아닌, 사람들과 같이 듣는 노래가 되다 보니 걱정도 되고 긴장도 돼요. 이젠 다른 사람들의 공감도 같이 담을 수 있는 곡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정이 건네는 위로는 ‘모두를 위한’ 위로지만 시작은 그 자신에 대한 위로에서 출발했다. “모든 곡들이 나 자신에게 써놨던 메모나, 잊지 말자고 써놨던 다짐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가사를 쓸 때도 남에게 해주는 위로가 아닌, 저 자신에게 하는 위로라 생각하고 썼죠. 모두의,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앨범입니다.”
타이틀곡 ‘화분’은 싱어송라이터 선우정아가 작사, 작곡한 서정적인 멜로디 위로 감성적인 세정의 보이스가 더해져 올봄 리스너들에게 따듯함과 위로를 전하며 곡의 매력을 배가시킨 발라드다. 평소 ‘아티스트의 아티스트’라 불릴 정도로 많은 가수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하는 선우정아가 세정에게 타이틀곡을 선물했다는 점이 의미 있다.
세정 역시 선우정아와의 작업 자체가 ‘성덕(성공한 덕후)’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고. “개인적으로 선우정아 선배님을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고, 고등학교 내내 선배님 노래만 카피했을 정도로 좋아했는데, 선배님이 제 러브콜을 좋게 받아들여주시고 저를 위한 곡도 써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녹음할 때도 부스 안에 들어와 직접 노래를 불러주셨고, 굉장히 다정하게 디렉팅을 해주셨어요. 영광스러우면서도 반성하게 된 시간이었죠.”
뮤지션으로서의 기본적인 마음가짐과 자세를 배우게 된 시간이었다는 게 세정의 설명이다. 그는 “선배님은 곡에 대한 생각이나 자기만의 색이 진짜 분명하신 분이더라. 그 분명한 이유가 뚜렷하게 느껴졌다”며 “선배님을 보면서, 나도 이런 아티스트가 되어야지 하고 다짐하게 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세정은 이번 앨범 작업을 통해 가수로서 한 뼘 성숙해진 속내를 보여줬다. “반성을 많이 했어요. 가수라는 이름을 달아놓고, 노래를 좀 멀리 했었나 하는 생각을 했죠. 노래에 대해, 음악에 대해 공부하고 더 깊이 파고드는 연습도 했어야 했는데 왜 놓았을까. 하고 싶은 마음은 큰데 생각만큼 다 해내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쉬우면서 반성도 많이 했어요.”
나름의 계획에 따라 준비한 앨범이지만 앨범이 발매된 시기가 안타깝게도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이 신음하는 시국이다. 음악방송 역시 무관중 녹화로 진행되는 등 신곡을 대중 앞에 홍보할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지만 세정은 “위로의 의미가 담긴 앨범이기도 하지 않나. 요즘 위로가 많이 필요한 시대인 만큼 이번 앨범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꽃길’부터 ‘터널’ 지나… 세정의 ‘화분’을 키워온 시간
앞서 발표한 ‘꽃길’, ‘터널’이 모두 음원차트에서 호성적을 거둔 만큼 ‘화분’의 성적 역시 기대와 부담이 공존할 만하다. 하지만 세정은 “모든 앨범이 다 잘 된 건 아니었다”면서 “앨범을 낼 때마다 기대하지 말자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첫 음원 성적이 감사하게도 너무 좋았지만 이후 발표한 모든 곡이 다 (성적 면에서) 잘 된 건 아니었거든요. 그러면서 느낀 것도 많고, 상처 받은 것도 있어요. 내가 자만했었구나 하고 깨달은 것도 있고요. 오히려 기대하는 만큼 서운한 감정도 많아지기 때문에 최대한 기대를 낮추고, 오는 것에 온전히 반응하자는 게 최종적으로 갖춰진 마인드예요.”
이는 솔로 데뷔곡 ‘꽃길’의 메가히트와 이후의 경험이 준 값진 마인드다. “‘꽃길’이 큰 사랑을 받았을 땐, 그게 엄청난 일이라는 걸 몰랐어요. 전혀 모르는 채로 겪었기 때문에 다음 앨범을 내면서 이런 마음가짐이 생긴 것 같아요. 그 땐 어떤 마음가짐이나 준비 없이 큰 행운을 맛보다 보니, 이게 얼마나 값진 건지 얼마나 소중한 행운인지 잘 몰랐던 것도 있어요. 겪어봐야 알지, 안 겪어보면 모르는 것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세정은 “음원 성적보다는, 내 이야기를 녹여내려 한 앨범인 만큼 나를 알고 있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큰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앨범이 됐으면 좋겠다. ‘세정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 하고 알아주시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긴 시간 배운 세정의 ‘내려놓음’의 미학은 통했다. 세정의 ‘화분’은 국내 음원차트 1위는 물론, 해외 아이튠즈 차트까지 석권하며 글로벌 ‘솔로 파워’를 실감하게 했다. 하지만 ‘화분’이 거둔 호성적보다 더 유의미한 건, 앨범 작업 과정을 통해 스스로에게 건네는 이 최초의 위로가 향후 세정이 걸어갈 길에 아주 특별한 이정표가 될 거란 점이다.
“사실 처음에는 너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큰 인기를 얻다 보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 보여줘야 하나 생각했어요. 그러다 한편으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을 가졌던 때도 있었죠. 그런데 제가 보여준 것에 대한 상처조차 그대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그러더니, 그 다음 단계로 나도 모르게 상처받지 않을 준비를 하게 되더군요. 그 과정을 거치면서 많이 다듬어져야 하는 부분들을 생각하게 됐죠. 아이오아이부터 구구단 그리고 솔로 앨범을 내면서 지금까지 성장해온 과정을 떠올리면, 잃은 것보다 배운 게 훨씬 많은 과정이었어요. 지금은 더 이상 상처받는 게 크게 무섭지 않고, 내 본연의 것을 드러내는 것도 무섭지 않아요. 소중한 시간이었죠.”
본인만의 ‘셀프 위로법’이 있는지 묻자 “혼자 아닌 혼자의 시간을 갖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엄마가 있는 시골집에 내려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진짜로 혼자 있으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으니까, 언제라도 나를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혼자서 마음을 정리하고 나면, 뒤늦게 나를 위로하는 말들이 들리더라고요.”
▶‘긍정’의 아이콘, ‘인정’의 아이콘 되다
대중에겐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가 크지만, 세정이라고 어찌 한없이 밝으랴 싶으면서도 무엇이 그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지 궁금했다.
“일 없이 혼자 있을 때 많이 가라앉곤 해요. 어쩌면, 그래서 나를 더 굴리고 일하고 싶어 하는지도 몰라요. 일 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내 자신의 발전을 멈췄을 때, 두려움이 더 커지더라고요. 보통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사랑의 양보다 이미 많은 걸 받았기 때문에, 그걸 충족시키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어쩌면 스스로 지닌 욕심이 그를 옭아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사람들은 저를 똑같이 보는데도 저 혼자 자신을 작아지게 만든 것”이라며 “상황은 달라진 게 없는데 혼자만의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고 말을 이어갔다.
“저는 원래 모든 것들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려 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친한 지인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왜 너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냐면서, 충분히 힘들고 아픈 일이 맞는데도 그걸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 자체가 네 마음속에 뭔가를 남겨 놓는 거라고 하는데, 그 말이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제가 버티려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참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죠. 지금도 긍정적인 편이지만 그때 이후로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긍정적인 것으로 바뀌었어요.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실제로는 “빈틈 많고, 잘 잊어버리고, 실수 많은 사람”이지만 일할 때만큼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보내온 시간이 데뷔 후로만 어느덧 5년째. 아이오아이에 이어 현재 구구단 멤버로 활동 중인 세정. 그룹과 솔로 활동에서도 ‘같은 세정 다른 느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쉴 새 없이 오리발을 첨벙이는, 세정의 ‘노력’의 결과다.
“그룹 때는 콘셉트를 소화하고 시각적인 투자를 많이 한다면, 솔로 때는 보이는 것에는 신경 안 쓰고 들리는 것, 감성적으로 느껴지는 것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솔로로서의 자신의 강점에 대해서는 ‘진실됨’을 꼽았다. “진실은 모두를 이기는 무기죠. 최대한 보컬이 잘 전달되게 하려고 노력해요. 앞으로도 진실됨으로 계속 대중에 다가갈 생각입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은 ‘노력형 연예인’이지만 사람들은 ‘천생 연예인’으로 본다고도 했다. “제가 본 저 자신은 노력형인데, 남들은 ‘넌 누가 봐도 이 길이야’라고 하죠. 사실 저는 자존감이 낮을 때도 많고, 빈틈이 워낙 많은 사람이라서, 준비한 것들을 꺼내 보이기에 부끄러운 적도 많아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엄청 움츠린 적이 많죠. 그렇지만 남들의 이야기가 힘이 되기도 해요. 그 힘으로, 노력형임에도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데뷔 후 5년간 쉼 없이 달려온 세정. 지칠 법도 한데 아직 이렇다 할 ‘번 아웃’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그는 “노래, 연기, 예능 다 놓치고 싶지 않다”며 눈을 반짝였다.
“전부 다, 늙어서까지 계속 하고 싶어요. 나이가 들어도 제 노래를 그리워하고 꾸준히 듣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노래를 건네고 싶고, 예능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드리고 싶어요. 노래와 예능에서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연기이기도 하니까 연기도 꼭! 계속 할 거예요. 작년에 오랜만에 연기를 하며 느낀 건데, 연기도 쉬면 안 되겠더라고요. 쉬는 만큼 돌아오는 여파가 크기 때문에, 연기도 쉬지 않고 계속 하고 싶어요. 언젠가 뮤지컬에도 도전하고 싶어요.”
지난 시간, 세정이 뿌려놓은 씨앗에선 어떤 꽃이, 어떤 열매가 맺힐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나게 될 세정의 화분은 분명 예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것만 같다. 누구보다 착실하고 현명하게 자신을 돌보며, 우직하고 꾸준히 제 자리를 다지고 가꿔가는 세정의 화분일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