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공부와 담을 쌓았던 한 여고생은 부모님의 권유로 교내 밴드부에 들어가 오보에 연주가의 길을 꿈꿨다. 대학 진학이 목표였지만 강도 높은 연습량에 부담을 느끼다 결국 악기를 내려놓은 그는, 비록 꿈이 없던 학창시절이었지만 그저 좋아했던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노는 걸 좋아했던 장기를 살려 방송연예과에 진학했으나 교수님의 권유로 가수로 데뷔한 이후 20년간 드라마틱한 여정을 달려온 그는, 지난 20년 동안 연예계의 빛과 그림자를 온몸으로 마주하면서도 여전히 ‘퀸’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수 백지영(43)이다.
백지영은 1999년 1집 앨범 <Sorrow>로 데뷔했다. 데뷔 당시 ‘선택’, ‘부담’, ‘Dash’, ‘Sad Salsa’ 등 라틴 리듬의 댄스곡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2006년 발표한 ‘사랑 안해’를 기점으로 ‘발라드 퀸’으로 우뚝 선 그는 이후 ‘총 맞은 것처럼’, ‘잊지 말아요’, ‘그 여자’ 등 불멸의 발라드 메가 히트곡을 다수 보유했다. 지난달엔 데뷔 20주년을 맞아 미니앨범을 발표, 모처럼 OST 아닌 자신의 신곡으로 팬들과 호흡하기도 했다. 백지영이 새롭게 발표하는 음원은 2016년 12월 ‘그대의 마음’ 이후 3년여 만이고, 활동은 2015년 3월 ‘새벽 가로수길’ 이후 4년 반 만이다.
▶<레미니센스>로 돌아본 지난 20년
“준비 기간이 1년 정도 걸렸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긴 했는데, 회사도 옮겼고, 20주년이고, 오랜만에 앨범이 나온다는 게 다 맞아떨어져 설레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기대도 돼요. 너무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보단, 담담해요. 노래가 마음에 들게 나와서 기분도 매우 좋네요.”
새 앨범명 <레미니센스(Reminiscence)>에는 백지영이 가수로서 걸어온 지난 시간을 ‘추억’하고 ‘회상’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앨범의 색을 전체적으로 정하는 과정에서 20주년이라는 걸 생각하니 문득 되돌아보게 되더군요. 노래는 신곡이지만 기억을 끄집어내는 거니까, 가수 백지영이나, 제 목소리를 들으시는 분들도 옛 기억이 소환되고, 좋았던 공간감이나 계절의 냄새같은 것을 좀 따뜻하게 기억하게 해드리고 싶은 앨범을 만들고 싶어서 이렇게 타이틀을 정하게 됐어요. ‘노스텔지어(Nnostalgia)’라는 단어를 사용할까도 싶었는데 다 표현이 안 돼 더 고민했죠, 레미니센스라는 단어를 원래는 몰랐었는데, 제가 원했던 느낌으로 나오게 되어 바로 결정하게 됐어요.”
앨범에는 이별의 아픔을 담담하면서도 애절하게 표현한 타이틀곡 ‘우리가’를 비롯해 ‘하필 왜’, ‘별거 아닌 가사’, ‘혼잣말이야’, ‘하늘까지 닿았네’, ‘우리가’ 인스트루먼트 버전까지 총 6곡이 수록됐다.
타이틀 곡 ‘우리가’는 백지영의 호소력 있는 보컬이 주를 이루는 곡이며 이선희, 아이유, 휘성 등과 작업한 작곡가 G.고릴라가 참여했다. 타이틀곡에 대해 백지영은 “담백하게 시작해서 처절하게 치닫는 후렴구가 있고, 엔딩에선 따뜻하게 감싸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며 “내 보컬에 대해 애절하다는 느낌을 공통적으로 많이 받으시는데, 이번엔 담백한 느낌을 주려 노력해봤다”고 말했다.
앨범에는 타이틀곡 외에 눈에 띄는 백지영의 도전도 숨어 있다. 그가 꼽은 ‘도전’은 싱어송라이터 선우정아와 함께 작업한 ‘하늘까지 닿았네’. 백지영은 “선우정아 씨는 리듬은 단호하고 심플하지만, 뭐랄까 보컬에 모든 게 다 묻어있는 것 같다. 그분의 노래를 들으면 굉장히 용감한 느낌”이라며 “이렇게 편안하게 불러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기존의 나와는 너무 다른 작업 스타일이었는데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백지영은 “싱글 위주로 작업을 하다보면 꼭 해야 하는 것을 하게 되니 개인적으로 도전하고 싶어도 내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 이번에 20주년을 맞아 미니앨범으로 준비하면서는, 대중에 주목받지 못할까봐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다만 앨범 준비 과정에서 ‘20주년 기념’이라는 의미는, 백지영에게 부담 대신 ‘긴장’으로 다가왔단다. 그는 “사실 20주년보다는 19주년이 더 긴장됐었다. 막상 20주년이 되니 담담하더라. 앞자리가 1에서 2로 바뀌는 시점을 앞뒀다는 점에서 올해보다 오히려 작년이 더 떨렸고, 지금은 21년, 22년 비슷할 것 같다”며 웃었다.
20주년 컴백을 앞두고는 무려 14년이라는 긴 시간 함께한 매니저와 새로운 기획사로 둥지를 틀면서 ‘의리’적 면모도 과시했다. 20년 가수 인생을 통틀어 남달리 애정을 느끼는 곡을 꼽아 달라고 하자 백지영은 망설임 없이 ‘사랑 안해’와 ‘잊지 말아요’를 꼽았다.
“계절마다, 때마다 달라지지만 부동은 ‘사랑 안해’와 ‘잊지 말아요’인 것 같아요. 데뷔곡도 있지만, ‘사랑 안해’는 첫 아이 같은 느낌이죠. 또 ‘잊지 말아요’는 공연 때마다 엔딩곡으로 부르는데, 관객들과 싱어롱하다 보면 가수 생활을 하면서 감동받은 순간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곤 해요. 저에게 큰 생각을 주는 노래인 것 같아요.”
▶‘사랑 안해’와 ‘잊지 말아요’… 백지영의 이유 있는 ‘최애곡’
스스로 돌이켜 본 지난 20년은 그에게 어떤 ‘성장’을 줬을까. “20년을 했는데, 하나도 안 늘었으면 안 되겠죠?(웃음) 실력도 실력이지만, 임하는 자세는 더 나아지고 싶었어요. 이번에 녹음하면서 느낀 건, 가사를 받고 노래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갔다는 느낌이었죠. 기존의 저는 제 감정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작곡가와 이야기하고, 분위기가 주는 느낌을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조금 더 색이 진하게 오더군요. 예전에는 스토리만 와 닿았다면, 이제는 공간감이나 색감도 오고, 이미지지만 상당히 명확한 느낌이 오더라고요.”
무수한 모창 프로그램들 속에서도 백지영의 모창 가수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아 그러한 프로그램에서 백지영 편을 만나보기 어려웠던 게 사실. 그만큼 그의 보이스가 독보적이라는 방증이다.
“사실 저를 모창하는 분들이 거의 없어요. 음색 같은 경우, 스킬이 좋은 보컬이 아니라, 감성 보컬 쪽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해석하고 연습하면서 혼자 습득한 호흡 방식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 특이하게 받아들여주시는 것 같고요. 탁성인 데 비해 음역대가 높은 편이라는 이야기도 듣거든요.”
그러면서 백지영은 “독보적인 음색을 갖고 있다는 게 좋기도 하지만, 사실 어우러지는 콘서트를 하기가 어렵다. 가령 여성 보컬리스트들이랑 기획형 콘서트를 하고 싶은데, 내 목소리가 너무 튀니까(성사시키지 못하는) 안타까운 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음색이 독특하고 독보적인 건 너무 좋은 플러스 요인이지만, 바운더리를 넓혀가는 면에서는 아쉽기도 한데, 절대 불만을 가지면 안 된다. 사실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2013년 배우 정석원과 결혼, 4년 만에 첫 딸을 품에 안으며 ‘엄마’가 된 것 역시 백지영의 가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다만 백지영은 “평소에 가수 아닌 엄마나, 인간 백지영으로 사는 삶에서 노래하는 감정을 끌어다 쓰는 편은 아니라 감성을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다. 바뀐 게 있다면 노래하는 일에 임하는 자세나, 좀 더 책임감이 든다는 점일 것”이라고 말했다.
오랜 시간 백지영을 대표하는 이미지인 ‘센 언니’ 느낌은 온데간데없다. 세상 딸바보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딸이 주는 에너지는 그야말로 ‘무한대’다. “아이의 존재가, 내 전부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저는 딸이 생기기 전이 잘 기억이 안 나요. 내 앞에 또다른 세상이 펼쳐졌고, 우선순위가 바뀌었어요. 아이가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이 커요. 너무 큰 사랑을 주니까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사랑이 넘쳐나죠.”
백지영은 딸이 가수가 되고 싶어 한다 해도 “냉철하게 판단할 것”이라면서도 “만약 (가수를) 하게 된다면 이런 저런 시련에 부딪힐 테니, 그럴 때 잘 설 수 있는 선배이자 엄마로서, 멘탈을 단단히 해줄 수 있는 도움 정도는 주고 싶다”고 말했다. “나중에 홀로서기를 잘 하면 같이 공연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며 눈을 반짝이기도.
요즘 백지영은 유튜브를 통해 재조명되면서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 지상파에서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음악방송 다시보기를 서비스하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백지영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며 온라인상에서 ‘탑골 청하’로 세대를 초월한 조명을 받고 있는 것.
이에 대해 백지영은 “주변에서 자꾸 보여줘서 알고 있다”면서 “KBS 예능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나갔을 때도 관련 문제가 나와 신기했다. 이정현 별명이 ‘조선의 레이디 가가’라고 해서 재미있었다. 내 별명은 ‘탑골 청하’라고 하던데, 정말 네티즌들이 기발하다고 생각했다”며 웃었다. 그는 “청하의 무대를 보면 유연하고 표현도 디테일이 살아있고, 무대매너도 굉장히 정확하다. 방향이 확실한 친구인데 잘하는 친구와 비교해 별명을 붙여주니 기분 좋고 감사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데뷔 20년을 맞은 시점, 가수로 데뷔한 시점을 떠올리며 든 생각은 담담했다.
“요즘 ‘꿈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사실 저의 꿈은 가수가 아니었어요. 정확한 꿈이 없었고, 스스로 노래를 잘 한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죠. 고등학교 다닐 때 코인노래방이 생겼는데 거기서 노래 부르고 노는 게 좋았던 거지, 내가 노래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안 하는 척하면서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우연히 연극영화과를 시험 봐서 전주에 있는 백제예술전문대 방송연예과에 들어갔고, 거기서 교수님들 만나 얘기하다가 노래에 재능 있단 이야기를 처음 들었어요. 우연히 소개받은 작곡가를 통해 오디션을 봤는데 그게 통과돼 앨범을 내게 됐죠.”
▶‘스무 살 가수’ 백지영, 꿈 아닌 인생을 말하다
백지영이 데뷔했을 당시는 지금처럼 음반업계가 시스템적으로 정비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당시 기획사에 들어가 앨범을 준비하며 보낸 1년이 녹음 기간이자 연습생 기간이었어요. 요즘 친구들과 비교하면 저는 너무 때를 잘 타고 태어나 데뷔하게 된 거죠. 그 때를 떠올려보면,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든 임해보는 자세가 중요한 것 같은데,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혹여 그 길이 아니라고 해도 꼭 실패는 아닌 것 같고, 막상 잘 됐다고 해서 인생 전체가 잘 되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롤러코스터 같은 스무 해 가수 인생을 보낸 백지영의 술회는 예의 담담했다. 아니, 담담함보다 더 깊은 인생의 깨달음이 담긴 듯했다.
“사실 꿈이라는 어떤 큰 목적을 갖고 무작정 달리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를 해보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어쩌다 보니 천직을 찾은 거니까. 그런 건 아마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를 경험하다 보니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꿈을 위해 곁눈질하지 않고, 똑바로 목표를 이루는 친구도 너무 대단하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잘못된 건 아닌 것 같다는 게, 제 인생을 되돌아보며 드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데뷔 20년 된 ‘대선배’ 백지영이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일까.
“옛날에 제가 데뷔했을 때만 해도, 짧으면 3~4개월, 길면 6개월에서 1년까지도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어요. 요즘은 시스템 자체가 음원 시스템이라 변화한 분위기이기도 하지만, 노래 한 곡이 오래 사랑받았기 때문에 수명이 짧아진 것 같기도 해요. 요즘 아이돌들은 두 달에 한 번씩 컴백한다던데, 활동하면서 녹음하면서 스케줄하면서 안무 연습하고 해외 공연하면서 녹음하는 게 정말 지치는 스케줄이거든요. 음악의 소중함을 알고 가기 힘든 시간들이죠. 그런데 그 시간에 근육 단련하듯이 많이 단련이 돼 어느 순간 나에게 많은 자양분으로 작용을 하더라고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 너무 빠른 변화와 차트에 일희일비할 수 있지만, 거기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가수로서 근육을 키우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그에 어울리는 선배 모델들을 보면서 멘탈을 키워나갔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1년 만에 다시 돌입하는 백지영의 전국투어 콘서트 ‘Baek Stage(백스테이지)’는 지난 23일 수원 공연을 시작으로 대구, 청주, 부산,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다.
“공연을 확정하면 설레고, 연습할 땐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싶다가도 무대 올라가면 ‘이래서 하는구나, 이 맛이구나’ 싶어요.(웃음) 어떤 일에도 스트레스 잘 안 받는 편인데, 하루에 두 번 쇼를 하기도 해서 체력적으로 컨디션 조절하는 게 힘들기도 해요. 방송이나 행사 무대와 달리 나를 위해 발걸음 해주시는 분들을 만나는 자리기 때문에, 관객분들이 주시는 긍정적인 영향이 상당히 달라요. 막상 공연 들어가면 제가 힐링이 되고. 많은 위로를 받죠.”
‘호소력’으로 대변되는 백지영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은 백지영에게 또 다른 시너지가 된다고.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 생각을 해봤어요. 부른다는 건, 대상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자기만족으로 부르는 노래는 저와는 가는 길이 다른 거죠. 얼마 전 한 공연에서 ‘그 여자’라는 노래에 사연을 넣어 어머니를 위해 불러드렸더니 그게 어머니들을 위한 노래가 됐어요. 모녀 관객들이 감동 받아 눈물바다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내가 정말 노래를 불렀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름 돋을 정도로 기분이 좋지요.”
인터뷰 말미, 그는 앞으로의 20년에 대한 기대도 덧붙였다. 백지영은 “지난 20년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스토리도 많았고 노래도 많이 했고. 그런데 데뷔 초엔 기계처럼 일했다”면서 “그런 데뷔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앞으로의 20년은 그렇지 않은 후배를 양성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보컬 하는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다”는 포부를 내비치기도 했지만 궁극은 더욱 소박하고 또 원대했다. “개인적으로는, 연말에 3대가 와서 같이 노래 부를 수 있는 공연을 하고 있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이미 그 꿈에 한 걸음 다가선 그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또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