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면을 갖고 있기 마련이지만 특정 면모가 유독 부각되면 그 면모가 그 사람의 ‘이미지’가 되기 마련이다. 드라마나 영화 등 작품 속 인물로 대중을 만나는 배우들도 마찬가지. 아니 어쩌면 더할 터. 마치 작품 속 인물의 캐릭터가 그를 연기한 배우의 실제 성격인 양 여겨지고, 그 잔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이미지가 고착화되는 경향이 있다.
배우 신세경(29)도 한동안 그런 이미지 속에 갇혀 있었다. 1998년,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서태지 ‘Take 5’ 뮤직비디오 출연을 계기로 방송가에 입문한 그는 이후 영화 <어린 신부>(2004), 드라마 <토지>(2005), <선덕여왕>(2008)에 이어 출연한 <지붕뚫고 하이킥>(2009~2010)에서 보여준 다소 차분하고 어두운 캐릭터 탓으로 지난 수년간 ‘차분’ ‘조신’ ‘청순’ 등의 키워드 안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20대의 시작과 함께 쉼표 없이 달려온 지난 10년 동안, 신중하고 과감한 변주를 이어왔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신세경의 변신에 놀랐을 테고, 신세경의 변신과 도전을 접하지 못한 또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그를 ‘여성여성한’ 배우로 기억하고 있을 테다.
“많은 분들이 저를 차분한 이미지로 보신다는 걸 아는데, 어릴 땐 ‘내 성격은 그렇지 않은데’라며 다르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그런 면모도 있었던 것 같아요. 가령 공식석상에선 차분한 편인데 편한 사람들과 있을 땐 오두방정일 때도 있고. 사람은 입체적인 거니까, 하나의 단면만 두고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내밀기 어렵더라고요. 차분한 것도 제 자신인 것 같아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변주해오며 신세경은 ‘대중’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스스로 반짝이는 내면의 성장을 이뤄냈다. 어쩌면, 이미 신세경은 ‘인간사’의 수많은 질문 중 한 가지 답은 분명히 찾은 건지도 모르겠다. 최근 성공적으로 끝낸 MBC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극본 김호수/연출 강일수)에서도 세상의 질문에 당차게 답하는 신세경을 만날 수 있었다. 드라마는 조선의 첫 문제적 여사(女史) 구해령과 반전 모태솔로 왕자 이림의 ‘필’ 충만 로맨스 실록. 극중 예문관 여(女)사관 구해령 역을 맡은 신세경은 이전 출연했던 사극인 <뿌리깊은 나무> 속 소이, <육룡이 나르샤> 속 분이와 또 다른 구해령만의 매력을 그려내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 공을 들였다.
“이번 작품은, 전에 했던 사극과는 느낌이 달랐어요. 그런 점이 또 다른 숙제이기도 했고, 흥미로운 점이기도 했죠.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는데, 일단 설정 자체가 조선시대에 여자가 관복 입고 출퇴근한다는, 판타지지만 흥미로운 상상을 해본 거죠. 그런 부분이나 인물의 성향, 성정을 불편하지 않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구해령이라는 인물이 서사에 잘 어우러지도록 많이 고민했습니다.”
▶“조선시대 궁 안에 이런 여자가? 카타르시스 느꼈죠”
과거에 비해 열린 사회임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한국 드라마의 환경 속,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를 시청자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선 ‘불편함’을 초월해야만 했다. “구해령의 말과 행동들 모두 그 시대를 떠올리면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어요. 저조차 조선시대에 여자가 저 정도까지 할 수 있나? 싶었는데, 시청자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제가 그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드라마 중·후반부터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었지만 초반엔 고민을 좀 했었죠.”
능동성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여성 구해령. 실제 자신과 닮은 점이 많아 신세경으로선 더 끌릴 수밖에 없었다.
“성격 면에서 구해령과 닮은 점이 많아요. 물론 저는 사회화가 된 사람이라 불꽃을 누르고 사는 경향이 있죠.(웃음) 그렇지만 구해령이라는 친구는 현대보다도 훨씬 더 각박할 수 있는 조선시대에도 외칠 것을 외치고 사는 친구라서, 대본을 읽으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요즘 시대에는 여자가 목소리 높인다거나 보폭 넓게 걷는다고 뭐라 할 사람 없지만 그 시대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잖아요. 현대인 입장에서 볼 때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지점이라 생각했어요. 이건 단순히 성별의 문제만이 아니거든요. 그 시대에는 더 그랬을 테고, 일상에서 무심코 캐치도 못 하고 지나가는, 의식도 못한 채 저지르는 차별이 있을 텐데 그런 것들에 대한 유쾌한 일침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걸 조선시대로 옮겼을 때 가장 흥미롭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여성이라는 부분이라서, 잘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데뷔 첫 사극 도전으로 화제를 모은 파트너 차은우는 연기력에서 호불호가 갈리며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현장에서 직접 느낀 차은우의 열정, 그리고 그와의 호흡은 어땠을까. “개인적으로 리딩을 시작으로 동료로서 함께하면서부터는 캐릭터에 너무 제격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녹서당이라는 공간에 20년 동안 갇혀 있어서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이림의 모습을 너무 완벽하게 표현해준 친구라고 생각해요. 티 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듯한 순수한 느낌을, 어떤 기술로 표현한다고 해도 그게 더 이상할 수 있잖아요. 너무 완벽한 캐스팅이라 생각했어요.”
마치 ‘백지’ 같았던 차은우의 면을 높이 산 신세경. 현장에서 연기적으로 도움 받은 일도 많다고 했다. “<구해령>은 기존에 했던 사극과 달리 가벼운 작품이라 발랄하고 유쾌한 사건들, 또 한편으로는 해야 하는 이야기가 공존하는 드라마였어요. 너무 붕 뜨지 않게 균형을 맞춰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면서도 특유의 유쾌함이나 상쾌함을 살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서 차은우가 가진 표현의 참신함이 시너지가 돼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차은우가 너무 꽃미모라 사실 부담도 됐다. 어느 작품이나 비주얼적인 어울림을 고민하긴 하지만 이번에도 부담이 없었다고 말할 순 없다”며 배시시 웃었다. 드라마는 방송 내내 동시간대 1위를 달렸지만 폭발적인 호응보다는 고정 시청자의 열띤 지지 속에서 막을 내렸다. 아쉬움이 남을 법하지만 신세경은 “시청률과 관계없이 나는 <구해령>이 자랑스럽다”며 눈을 반짝였다.
“애초에 이 작품을 선택했던 건 작품이 가진 색깔이나 결이 좋았기 때문인데, 그런 점을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잘 유지해 시청자에게 잘 보여드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폭력적인 요소도, 억지 갈등도 없고 시청자들에게 무해한 드라마로 기억될 수 있어 기분 좋아요. 덕분에 정신적인 고통 없이 온전히 내가 하고자 하는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죠. 가치관에 어긋나지 않는 작품을 한다는 게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고, 아주 큰 기쁨이었어요.”
▶“사극 속 여인들, 사랑받고 사랑하는 일 외에도 분명 역할 있죠”
거의 매년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하면서 꽉 찬 필모그래피를 자랑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출연하는 사극마다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사극 여신’이라는 애칭을 얻고 있는 신세경. 그는 “사극이라는 장르를 특별히 선호하는 건 아니지만 캐릭터만이 아닌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보는 편인데, 이야기가 가진 힘을 믿고 선택했던 게 주효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세경이 연기하는 사극 속 인물이 흔히 ‘여성 사극’ 하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장희빈, 장녹수 등의 캐릭터처럼 화려한 한복을 입고 궁 안에 앉아 왕의 사랑을 구하거나 투기하고, 권력을 탐하는 보편적인 ‘궁중 여인’상은 아니라는 점은 좀 특별하다. 이러한 점에 대한 신세경의 생각은 어떨까.
“만약 (장희빈이나 장녹수 같은 역할) 제안이 온다면 영광이고 감사한 일이겠죠. 개인적으로 큰 도전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이전에 해왔던 사극 작품이나 캐릭터들을 통해 조선시대 혹은 여말선초 시대를 살아가는 여인들이 할 줄 아는 게 투기밖에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단순히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 외에,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을 연기하는 게 좋았죠.”
기대 이상의 다부진 답변. 어쩌면 구해령이 신세경보다 한 수 아래인 듯했다. 실제 자신과 비슷한 인물과 도전이라 할 만한 인물 중 연기적으로 어떤 캐릭터에 더 끌리는지 묻는 질문에도 ‘현답’이 나왔다.
“두 가지 요소 다 있는 것 같아요. 저와 비슷한 인물 혹은 도전해보고 싶은 인물. 하지만 아직 제가 연기자로서 부족한 점이 더 많기 때문에, 도전보다는 작품에 해가 되지 않게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의 캐릭터를 선택하게 되곤 해요. 내 선택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곳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역량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책임질 수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편입니다.”
전술했다시피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한 신세경은 <지붕뚫고 하이킥>(2009)부터 본격 성인 연기에 도전, 이후 <뿌리깊은 나무>(2011), <패션왕>(2012), <남자가 사랑할 때>(2013), <아이언맨>(2014), <냄새를 보는 소녀>(2015), <육룡이 나르샤>(2016), <하백의 신부>(2017), <흑기사>(2018) 그리고 이번 <신입사관 구해령> (2019)까지 공백기 없이 매년 작품으로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매작품마다 다른 이야기와 다른 캐릭터로 시청자를 만나지만 시청자에게 신세경이라는 배우가 지닌 존재감이 큰 만큼, 작품 속 인물에 앞서 그 자신의 성장을 고스란히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나날들. 그 와중에도 냉정하게 매번 ‘성장’을 바라는 시청자들도 분명 존재한다.
물론 연기 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일은 거의 없지만, 매작품마다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고민은 어쩌면 신세경 자신에게 가장 크다.
“1년 사이에 성장을 일궈내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그리고 연기라는 종합예술이 수학 문제처럼 뚜렷한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보는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향으로 고민하고 생각하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가진 문제점 혹은 단점을 나만의 마음 속 오답노트에 기록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되, ‘저 이만큼 성장했어요 잘했죠?’라고 인정받으려 하기보다, 내가 맡은 이 캐릭터로 완벽하게 분하기 위한 작업이 먼저인 것 같아요. 사실 ‘신세경이 어땠네’라는 평가보다 온전히 캐릭터로 흡수된 모습을 봐주시길 바라는 마음이고, 그렇게 봐주시는 것 자체가 성장을 의미하는 거니까요. 둘을 떼어놓을 순 없는 것 같아요.”
▶“유튜브 일상 공개 두려움 없어… 30대엔 더 행복할 것”
올해 30세에 접어든 신세경은 요즘은 “쉴 때 잘 쉬는 게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며 ‘잘 쉬는 법’을 늘 염두하고 지낸다. 쉴 땐 여행을 가거나 친구들과 카페에 가고, 집에서 요리도 하고 강아지 산책도 자주 시킨다.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제과제빵은 취미로 벌써 8년째 하고 있다고.
배우 아닌 인간 신세경의 이러한 일상은 고스란히 신세경의 유튜브 채널 ‘신세경 sjkuksee’에서 공개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유튜브에 개인 채널을 오픈하고 직접 찍은 영상을 편집해 올리며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 시작한 건 아니고, 음식 하는 걸 기록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는 신세경은 “20대 초반엔 이런 저런 것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면, 지금은 좀 더 자연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데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주로 ‘브이로그’ 일상을 공개하고 있는 신세경은 촬영도, 편집도, 코멘트도 직접 한다. 신세경은 “보시다시피 화려한 편집은 아니고 자르고 붙이기만 하는 수준의 편집이다. 편집 방법은 유튜브에서 배웠는데 직접 하려고 처음으로 노트북도 샀다”고 웃으며 말했다. 유튜브 채널 운영 이후 달라진 점에 대해서는 “일상의 큰 변화는 없는데, 알아보시고 인사하시는 분들이 ‘브이로그 잘 보고 있다’고 하신다는 점”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톱스타들이 본격적으로 유튜브에 뛰어든 초창기 깜짝 채널 오픈으로 큰 화제를 모은 덕분에, 해당 채널은 구독자가 무려 66만 명에 달한다. 그로 인해 신세경은 ‘유튜브 생태계 파괴자’라는 재미있는 호칭도 얻었다. 이에 대해 신세경은 “일종의 칭찬이라고 생각하지만 화제가 되는 건 정말 잠시다”라며 “유튜브라는 플랫폼의 장점은 구독자들이 취향 따라 때와 장소 상관없이 보실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목표는 유튜브를 개설한 목적과 의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해다.
유튜브 수익은 얼마나 될까. “생각만큼 ‘황금알을 낳는 거위’ 수준은 절대 아니에요. 업로드를 자주 하는 편도 아니고, 몇 달째 멈춰 있는데 생각만큼 많이 나오진 않아요. 얼마 전 김나영 씨가 유튜브로 얻은 수익을 좋은 일에 쓰셨다는 기사를 봤는데, 저 역시 유튜브가 좋은 소통의 창구가 될 수 있다면, 그런 식으로 수익을 쓰고 싶어요.”
30대가 된 2019년을 돌아보면 “좋은 부분이 많다”고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일해서 현장에서 막내로 지낸 기간이 긴데, 누군가로부터 ‘언니’ 소리 듣는 게 좋았어요. 이제는 동생들이 훨씬 많은 현장도 많은데, 좋아요. 잘 해주고 싶고”라며 언니미(美)를 마구 발산했다.
앞으로 펼쳐질 30대의 10년에 대해선 “지금처럼 쉴 때 잘 쉬고 일할 때 열심히 일하며,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는 소박하고도 원대한 바람을 드러냈다. “20대 초중반 때 한 인터뷰 기사를 돌아보면, 굉장히 지쳐있었더라고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그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안정감도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서른 살 이후의 내 삶은 더 좋을 것 같아요. 더 이상 내가 서 있을 자리를 위태롭게 여기지 않아도 되고, 내가 해야 할 본업의 본질에 충실해도 되겠다는 생각? 사람으로서도, 배우로서도 개인적으로 기대되는 점이 많아요.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