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모리스 스탠퍼드대 역사학 교수 | 동서양 구분 사라지는 미래, 격변과 재앙이 경쟁할 것
입력 : 2014.10.31 18:56:28
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폭력의 일종으로 기록된다. 전쟁의 피해는 패전국은 물론 승전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고, 이 때문에 인류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유럽연합(EU)이나 국제연합(UN) 등과 같은 초국가적인 국제기구를 창설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역사학계에서는 전쟁이 인류 역사를 이끌어 왔고, 특히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는 이색적인 주장을 펼치는 학자가 등장해 주목을 끌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인류문명사의 대가로 꼽히는 이언 모리스 스탠퍼드대 역사학 교수다. 그는 올해 출간한 저서 <전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통해 전쟁을 깊이 고찰했다. 모리스 교수는 최근 세계 경제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선진국들의 장기 저성장 기조의 원인을 고령화나 소득불평등 심화 등이 아닌 전쟁에서 찾았다. 한마디로 전쟁을 위한 군비 확충이 성장을 촉진한
다는 게 그의 주장으로 분석됐다.
지난 10월 14~16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5회 세계지식포럼에 참가한 그의 강연을 유심히 들은 사람이라면 모리스 교수의 전쟁관이 이렇게 단순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모리스 교수는 예상대로 과거엔 전쟁이 실제 참가국들 모두에게 부를 가져왔다고 역설했다.
“1만 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보면 우리는 늘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한다”는 그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도시가 파괴되지만, 100~200년 후에는 결국 승전국이나 패전국 모두 부유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리스 교수는 사회발전이나 경제발전을 이끈 전쟁 개념이 현재 ‘변화 중’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 역사를 연구하면서 전쟁이 더 큰 사회를 창조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도 “최근 200~300년 동안 전쟁의 역할이 변했다”고 말했다.
모리스 교수는 “사회의 규모가 너무 커지고 무역규모도 함께 커지면서 사람들은 서로 정복하는 것만이 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며 “유럽 특히 영국이 이를 가장 먼저 깨달았다”고 말했다. 유럽은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닌 국제 자유무역 시스템을 보호함으로써 자유무역이 작동한다면 유럽이 부를 축적할 거라고 믿었다. 이 방식이 최근 몇 백 년 동안 효과를 보았다는 게 모리스 교수의 주장이었다.
모리스 교수는 이 같은 시스템은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경찰 역할을 하는 국가가 있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즉 미국이 경찰국가 역할을 약 50년간 해왔으나 최근 들어 그 역할이 줄어들면서 100년 전 영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잃었던 것과 비슷한 모습을 모이고 있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이 시스템은 현재까지는 아주 잘 작동하고 있지만 미국이 계속 힘을 잃을 경우 향후 30년 동안 어떻게 진행될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모리스 교수는 또 경제발전을 이끄는 전쟁의 효과가 반드시 폭력을 수반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 예로 중국을 들었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한국이나 일본을 정복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안보 장치(Security Framework)를 제공하기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평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모리스 교수는 “우리가 평화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비폭력적 전쟁효과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2103년에 동양이 서양 추월
모리스 교수는 이번 세계지식포럼 강연을 통해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라는 자신의 책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어 했다. 이 책의 영문은 <Why the West Rules-for Now>인데 마지막 부분인 ‘for Now(지금까지는)’가 번역서 제목에는 빠져서 마치 서양이 영구히 동양을 지배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모리스 교수는 자신이 고안한 사회 발전 지표에 따르면 지금까지는 서양이 동양보다 앞서 왔지만 2103년부터 동양이 서양을 앞설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세계 중심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이는 역사의 일부이고, 늘 반복돼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리스 교수가 염려한 것은 서에서 동으로의 권력 이동이 자칫 폭력이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역사적으로도 파워시프트가 일어날 때마다 아주 큰 폭력이 발생했다. 부와 권력이 300~400년 전 서쪽으로 이동했을 때에도 큰 전쟁이 있었다.
그는 “지금 그 같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 하지만 역사가 반복되고 전쟁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이게 가능하다는 여러 징후가 존재한다”고 경고했다.
모리스 교수에게 이 같은 파워시프트를 전쟁과 폭력 없이 넘어가기 위한 해법을 물어보니 그는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을 유지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도발적인(Aggressive) 국가들은 고립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며 “미국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고 다른 국가들과 파워시프트, 균형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을 회피하는 데에는 기술의 발전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모리스 교수는 기대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전 세계가 개인, 조직, 국가 간 그 어느 때보다 서로 연결되고 이는 전쟁 가능성을 낮춘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예를 들어,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할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게 양국이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변혁과 재앙의 경쟁시대
모리스 교수는 지금은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일반적이지만 미래에는 동양과 서양 간 경쟁이 아닌 변혁과 재앙 간 경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모리스 교수는 동양과 서양이 과거 차이가 났던 것은 지리적 요인이 큰 역할을 했지만 이제 지리적 의미가 기술의 발달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또 전 세계가 초연결 사회가 되면서 동서양 간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새로운 도전을 얼마나 슬기롭게 극복하는지가 관건이 될 거라는 설명이다.
그는 “서양이 동양보다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며 “지리적인 특성, 즉 농경을 하기 좋은 곳을 찾아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에 500년 전 미국인과 중국인들을 서로 맞바꿔 놓더라도 지리적으로 서양이 동양보다 앞설 수밖에 없었다고 모리스 교수는 주장했다.
모리스 교수는 “일부 교과서는 동양이 과거 유교 때문에 부유해질 수 없었고 서양을 앞지를 수 없었다고 설명하지만 지금 일부 교과서를 보면 동양이 유교 때문에 잘살게 되었다고 한다”며 “이는 동양의 부상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가 하나가 되고 있다”며 “그렇다고 유토피아가 이뤄지는 건 아니다.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지리적 차이가 사라지고 인류가 점점 더 통합이 되어 거대 조직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더 먼 미래에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사라지게 되면 기술 변혁이 굉장히 큰 힘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모리스 교수는 전망했다. 이 기술을 둘러싸고 부자나 부국이 이익을 볼 가능성이 크지만 이로 인한 갈등으로 다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고 덧붙였다.
모리스 교수는 “기술이 세계의 기류를 변화시키고, 여기서 대체로 이익을 보는 이들은 부자들”이라며 “과거 산업혁명 초기에 영국이 관련 기술을 장악함으로써 다른 나라보다 부자가 되고 영국의 군사력에 투자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기술 변화 초기에 세계의 안정을 해칠 우려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언 모리스 모리스 교수는 1960년 영국에서 태어나 버밍험대학에서 고대역사와 고고학을 전공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시카고대학을 거쳐 1995년부터 스탠퍼드대에서 역사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는 존 시몬 구겐하임 메모리얼 재단, 후버 재단, 위스콘신-메디슨대학 인문학연구소 등에서 우수 연구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11년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한글 번역서 지난해 출간)라는 책을 출간해 주목을 받았고 올해 <전쟁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한글 번역서 미출간)를 발간하면서 전쟁에 대한 깊은 고찰을 보여주었다.
[윤원섭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 사진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