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최고의 한류스타로 통하는 배우 이민호. 그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와 ‘상속자들’의 연속 히트 이후 중국에서 누구보다 인기 있는 배우로 자리를 잡았다. 중국 CCTV가 매년 설(춘제) 전날 밤에 방영하는 최대의 쇼 프로그램 ‘춘제완후이(춘완)’에도 한국 연예인으로는 처음으로 출연했다. 중국 최대 인터넷 쇼핑몰인 타오바오의 광고 모델로 선정되는 등 중국 기업들로부터 CF섭외 요청도 쇄도하고 있다.
이민호의 이 같은 중국 내 활약에 숨은 조력자가 있다. 바로 화이브라더스라는 중국 최대 엔터테인먼트 회사다. 한국으로 치면 SM엔터테인먼트에 비견되지만 사업 영역이나 규모 면에서 SM보다 보폭이 크다. 이민호와 손을 잡은 화이브라더스는 그만을 위한 독자 법인까지 만들었다. 덕분에 이민호의 중국 연예활동이 날개를 달았다. 화이브라더스는 블록버스터 3D 영화인 한국의 ‘미스터 고’ 투자자로도 유명하다. 김용화 감독이 만들어 지난해 개봉한 ‘미스터 고’의 총 제작비 중 25%에 달하는 53억원을 투자했다. ‘미스터 고’가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3D 영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할 수 있었던 데는 화이브라더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 영화·연예계에 대해 말할 때 이제 화이브라더스를 빼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적도 매년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은 전년도에 비해 45.2% 증가한 20억1300만위안(약 3340억원), 순이익은 172.7% 증가한 6억6700만위안(약 1100억원)을 기록했다. 현재 시가총액은 무려 290억위안(약 4조8000억원)에 달한다.
이 회사의 지난해 실적 호조는 주요 개봉 영화들의 흥행 성공 덕분이다. 화이브라더스가 작년에 영화 8편으로 판매한 티켓은 30억장에 달했다. 영화 제작사로는 중국내 1위다. 지난해 중국 영화시장에서 15%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했다. 올해는 연말까지 영화 10편 개봉을 예상하고 있다.
드라마와 버라이어티 등 연예기획 사업에서도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했다. 중국 유명 연예인들 중 상당수가 이 회사 소속이다. 판빙빙, 리빙빙, 후쥔, 퉁다웨이, 런취안, 루이, 야오천, 덩차오, 쑤유펑 등 중국에서는 이름 석 자로 모든 것이 통하는 스타들이다.
이런 화이브라더스를 창업한 사람이 바로 왕중쥔(王中軍·54) 회장이다. 왕중쥔은 화이브라더스 지분 26.1%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그의 사촌동생인 왕중레이가 7.3%,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인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이 5.0%를 보유하고 있다.
왕중쥔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발을 내딛었지만 특유의 사업 감각으로 화이브라더스를 중국의 월트디즈니 혹은 워너브라더스와 같은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키워나가고 있다.
왕중쥔은 1960년 베이징의 한 평범한 군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림을 잘 그리다보니 그의 꿈은 일찍부터 중국 최고 미술대학인 중앙미술학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형편상 미술을 전공하지는 못했지만 어릴 때의 열정 덕분에 지금도 아마추어 화가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유명 TV 아나운서인 리융을 만났을 때 현장에서 직접 소묘 그림을 그려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왕중쥔은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하기 전인 17세의 나이에 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 군인인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결정이었다.
6년간의 군 복무를 마친 뒤 사회로 나와 처음 시작한 일은 국가물자총국 산하 물자출판사에서 미술과 촬영이었다. 군 복무 중에도 미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다 보니 그가 제대할 때 군에서 알선해준 일자리가 국가기관의 미술 담당이었다.
그는 1986년에 중국융러문화발전총공사라는 문화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광고부 책임자로 일했다. 이때 광고 일을 하면서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1989년 29세의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미시건대학교 미디어학과였다. 석사 과정은 뉴욕주립대로 옮겨 역시 매스미디어를 전공했다.
미국 유학하며 사업 구상
미국 유학은 만만치 않은 일상이었다.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려운 형편 때문에 그는 하루 15시간씩 일하면서 공부를 했다. 식당 서빙과 배달 일이 대부분이었다. 학비와 책, 기본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했음은 물론 남는 돈은 열심히 저축도 했다. 석사 학위도 따고 돈도 모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1994년 드디어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의 주머니에는 부인과 함께 아르바이트로 벌어 차곡차곡 모은 돈 10만달러가 들어 있었다.
그해 5월 16일은 역사적인 화이브라더스 창업일이었다. 그보다 열 살 어린 사촌동생 왕중레이가 10만여 위안을 보태 왕중쥔의 부인 류샤오메이와 함께 초대 이사가 됐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광고 분야 일을 먼저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정보 잡지를 발간해 이런저런 광고를 실었다. 잡지는 고급 빌딩과 대사관 등에 주로 배포됐다. 그런 대로 회사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수익이 났지만 큰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회사를 유지하려면 지출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중교통비도 아까워 회사까지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당시 베이징 대로에서 장관을 이루던 엄청난 자전거 출퇴근 대열에 그도 끼어 있었다.
그럭저럭 유지되던 회사는 대형 국유은행인 중국은행의 이미지통합(CI) 광고를 수주하면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중국은행이 전국에 보유하고 있는 지점 수가 1만5000개에 달했던 만큼 당시로서는 엄청난 광고 물량을 따낼 수 있었다. 이 광고 수주를 계기로 화이브라더스는 광고계의 큰손으로 부상했다. 이후 국가전력, 중국석화, 농업은행, 화샤은행 등 국유기업과 대기업 광고 물량을 연달아 수주했다. 덕분에 창업 3년 만에 중국의 10대 광고회사가 됐다. 왕중쥔이 미디어 분야에서 6년간 공부하면서 익힌 실력이 영업 현장에서도 그대로 발휘된 순간이었다.
광고로 돈 벌어 영화 진출
광고회사 창업자로 잘나가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8년 어느 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과거 함께 일했던 류사오링이라는 친구를 만난 것. 영화와 드라마 쪽에서 일하던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왕중쥔은 서서히 그 분야로 빠져들었다. 그에게는 생소하던 영화, 드라마 분야에서 어떻게 비즈니스가 이뤄지고, 어떻게 돈을 버는지에 대한 류사오링의 얘기는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광고 영업은 재미가 없어졌다.
왕중쥔은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이 꽤 있었던 만큼 드라마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왕중쥔이 난생 처음으로 투자·제작한 드라마가 바로 ‘심리치료소’였다. 드라마 촬영·제작 경험은 전무했지만 광고분야 경험을 살려 작품 홍보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결국 첫 드라마 투자에서 그는 100% 수익률을 기록했다. 매력적인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본격적으로 드라마 제작·투자 사업에 나섰다.
드라마 사업의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영화산업에도 뛰어들었다. 이쯤에 그에게는 중국의 대표 영화감독인 펑샤오강과 손을 잡는 행운이 찾아왔다. 1998년 왕중쥔이 돈을 대고 펑샤오강 감독이 제작한 ‘메이완메이랴오’라는 영화가 대히트를 친 것이 화이브라더스가 영화제작사로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3300만위안의 흥행수입을 기록했다. 왕중쥔이 처음에 투자한 영화 3편 중 펑샤오강의 ‘메이완메이랴오’만 성공했다. 이후 최근까지 화이브라더스는 58명의 감독과 함께 75편의 영화를 제작해 92억위안(약 1조5300억원)의 영화 티켓 판매 수입을 달성했다. 2009년에는 중국 엔터테인먼트 회사로는 처음으로 증시에 상장도 했다.
화이브라더스는 2000년 연예인 매니지먼트 사업에도 착수했다. 처음에는 판빙빙과 리빙빙 등 7명으로 시작한 소속 연예인 수가 지금은 400여 명을 넘어서고 있다. 중국 연예계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큰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왕중쥔은 영화·연예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답지 않게 매사에 느긋하고 여유가 넘치는 스타일이다. 저돌적인 사업가라기보다는 느긋한 예술가 쪽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창업한 이래 지금까지 하루 10시간 정도 숙면을 취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편안한 스타일이다. 그러나 깨어 있는 14시간 동안은 무서울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일에 몰두한다.
영화 촬영장을 방문해서도 현장에서 지시를 내리기보다는 멀리서 지켜보는 편이다. 그는 중국 잡지와 인터뷰에서 “촬영장을 직접 찾아가는 일이 거의 없지만 가더라도 밖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촬영이 끝나면 스태프들에게 밥이나 사준다”며 “촬영장 안에 있으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말했다. 식사시간 때는 프로듀서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소통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틀에 한 번 정도는 제작자들을 불러 함께 식사하고, 시나리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즐긴다. 여럿이 모여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도 주로 식사시간을 이용하는 편이다.
왕중쥔은 얼마 전 회사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사업 다각화에 강한 열망을 드러냈다. 그는 “영화를 만들지 않거나 좋은 작품을 제작하지 못한다면 화이브라더스라고 할 수 없지만 영화만 제작하는 것도 화이브라더스라고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영화만 제작해서는 위대한 그룹이 될 수 없다. 월트디즈니를 배워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화이브라더스의 미래는 중국판 월트디즈니인 셈이다.
그가 지금 새롭게 주목하고 있는 분야는 모바일 게임이다. 그는 2010년 1억4800만위안을 들여 웹게임 개발업체 청취커지 지분 22%를 인수하면서 2대 주주 자리에 올랐다. 2012년 청취커지가 상장하면서 주가가 오른 덕분에 4억위안의 평가차익을 올렸다. 지난해 5월 주식 보호예수기간이 끝나자마자 일부 지분을 매각해 3억4000만위안의 현금을 챙겼다. 지난해 화이브라더스가 거둔 순이익의 절반에 달하는 금액이다. 새로운 투자를 모색하기 위한 자금확보 차원이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청취커지 지분 가치만 22억2000만위안에 달한다.
지난해 7월에는 모바일 게임업체 광저우 인한커지 지분 50.9%를 인수했다. 투자금액이 대략 12억위안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한커지는 중국 모바일 인터넷 게임 시장에서 텅쉰(텐센트)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알짜기업이다.
지난 3월에는 할리우드 영화사인 스튜디오8에 1억5000만달러를 투자해 지분 일부를 매입했다. 이 영화사에서 제작한 각종 영화의 중화권 지역 배급을 화이브라더스가 맡는다. 역대 중국 기업의 할리우드 진출 사례 중 최대 규모에 해당한다. 앞서 지난해 5월에는 할리우드 제작사인 QED와 공동 투자해 브래드 피트와 샤이아 라보프 주연의 액션영화 ‘퓨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빠른 성장세 시기하는 음모론도
화이브라더스의 성장세가 워낙 빠르다보니 시중에서는 음모론도 활개를 치고 있다. 예컨대 CCTV 설 특집 춘완 배후에 화이브라더스가 있다는 소문 등이 그것이다.
한 중국 기자가 자신의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 ‘화이브라더스 이익을 대변한 춘완’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춘완 총감독 펑샤오강 감독부터 한류스타 이민호, 새 MC 장궈리 등 출연진 대부분이 화이브라더스와 이런저런 관계로 얽혀 있다”고 주장한 것이 발단이 됐다. 실제로 펑샤오강 감독과 장궈리는 화이브라더스 주식을 갖고 있다. 이민호 역시 화이브라더스의 지원으로 중국 활동을 펴고 있다. 이 밖에 춘완에 출연한 가수 야오베이나와 양쿤 등 상당수 출연진이 화이브라더스 소속 연예인들이다. 결과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비방으로 확인됐지만 화이브라더스의 중국 내 위상을 재확인해주는 사건이었다.
화이브라더스를 말할 때 왕중쥔보다 두 살 더 많은 펑샤오강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펑샤오강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화이브라더스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화이브라더스가 너무 펑샤오강에 의존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펑샤오강 역시 왕중쥔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펑샤오강은 군인 극단에서 8년간 무대 그림을 담당하다 1985년 베이징텔레비전아트센터의 아트 디자인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1991년 미국 내 중국 이민자들의 삶을 그린 소설을 각색해 연출한 TV 시리즈 ‘뉴욕의 북경인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감독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이어 영화감독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때 왕중쥔을 만났다. 왕중쥔이 펑샤오강을 만난 것만큼이나 펑샤오강이 왕중쥔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이후로 두 사람이 모두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