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들에게 유튜브가 있다면 중국인들에게는 유쿠투더우가 있다. 전 세계 누구라도 유튜브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불가능하기에 더욱 그렇다.
중국 정부는 유튜브 접속을 전면 차단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와 블룸버그 등 일부 뉴스 사이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내용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티베트인 등 소수민족 자치구의 분리독립 운동을 부추기는 내용을 가장 경계한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이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유튜브 못지않은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쿠투더우(www.youku.com)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올린 동영상은 물론 영화와 드라마, 뮤직비디오 등이 모두 서비스된다. 이 사이트에선 볼 수 없는 동영상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동영상 공유에 치중하는 유튜브에 비해 쓰임새가 더 많다는 평가도 있다.
유쿠투더우의 모체인 유쿠닷컴은 2005년에 설립됐다. 인터넷 포털과 검색 사이트가 주도하던 인터넷 시장에 동영상 전문 사이트가 뒤늦게 뛰어든 것이다. 시장을 선점한 종합포털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많았지만 유쿠닷컴은 보기 좋게 시장을 잠식해 나갔다. 2009년에는 시장조사 전문기관 아이리서치로부터 가장 경쟁력 있는 인터넷TV 사이트로 선정되면서 유쿠 시대를 화려하게 열었다.
유쿠닷컴은 초기부터 전략적 접근으로 네티즌들의 이목을 붙잡았다. 중국인들이 큰 관심을 가질 만한 핫뉴스를 추적해 보도하는 동영상에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사이트 지명도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인지도를 어느 정도 높인 다음에는 인터넷TV 시장을 넘어 스마트폰 시장을 먼저 치고 들어갔다. 스마트폰 기초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 덕분에 유쿠닷컴 프로그램은 현재 중국 스마트폰 내장 프로그램의 50%를 점유하고 있다.
소년기부터 도전 정신 익혀
유쿠닷컴의 중심에는 창업자인 구융창 회장(48)이 있다. 그는 중국 본토에서 사업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홍콩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해외 유학 생활을 하면서 글로벌 감각을 갖출 수 있었다. 홍콩에 살던 그는 14세의 나이에 호주로 홀로 유학을 떠났다.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기차를 타고 3시간을 더 가야 나타나는 작은 마을이었다. 300여 명의 학생 중 중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던 시골 동네였다. 아시아인 전부를 다 합쳐봐야 그를 포함해 3명뿐이었다. 구 회장은 등교 첫날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그가 학교에 들어섰을 때 학생들이 교실 창문에 몰려서서 자신을 구경하듯 바라봤던 것이다. 집을 떠나 처음으로 한 독립생활은 그렇게 쉽지 않게 시작됐지만 그는 학교에 잘 적응했다. 무엇보다 주변으로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을 정도로 공부를 잘한 것이 학교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고등학교에서는 아예 한 학년을 뛰어넘어 호주 명문인 뉴사우스웨일스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이 무렵 그의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홍콩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던 아버지는 그에게 함께 따라갈 것인지를 물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간 대학이었지만 그는 화학공학 전공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전공을 바꾸기로 마음먹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곳은 미국 서부 명문 UC버클리대학이었다. 그는 UC버클리 경제학과 편입을 지망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두 번째 입시에서도 떨어지자 주변 사람들은 좀 더 쉬운 곳으로 대학을 바꾸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주변 사람들 만류에도 삼수 끝에 UC버클리 3학년에 당당히 편입했다. 2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졸업을 할 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택한 첫 직장이 컨설팅업체인 베인&컴퍼니였다. 다양한 업종의 기업과 서로 다른 고객들을 접촉하다 보면 평생 할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는 컨설팅회사에서 반도체와 수력발전, 음료 등 다양한 분야 기업체 관계자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 중에는 잘나가는 기업도 있었고, 부실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기업도 있었다. 그에겐 좋은 학습 수단이었다. 컨설팅사에서 일하다 보니 그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어떤 상황에서든 먼저 행동하기 전에 사유하는 습관이다. 컨설팅 일이라는 게 기업이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문제점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업무가 대부분이다. 기업이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는지를 분석하면서 발굴해 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습관이 됐다. 다양한 측면의 문제에 대해 미리 고려해 보는 것도 이때부터 몸에 배었다. 베인&컴퍼니에서 일한 지 3년이 넘었을 때 그는 회사의 지원을 받아 서부 최고 명문인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MBA)에 입학했다. 실리콘밸리에 위치해 있는 스탠퍼드대학은 창업의 산실 같은 학교였다. 그 역시 2년간의 MBA 과정을 밟으면서 창업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많은 창업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MBA를 졸업할 때 그에게 남겨진 선택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창업을 하거나 창업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벤처캐피털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창업의 꿈을 키우고 있었지만 스스로 경험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중국 베이징의 벤처캐피털인 푸궈투자에 들어갔다.
MBA 졸업 후 벤처캐피털행
회사 지원으로 MBA를 다닌 탓에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야 할 판이었다. 그럼에도 벤처캐피털행을 결정했을 만큼 그는 창업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행히 그를 뽑아준 푸궈투자에서 위약금의 일부를 지원해주기로 했다. 푸궈투자에 들어간 첫 해부터 그는 여러 기업에 직접 투자할 수 있었다.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제조업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었다. 그는 베이징국제호텔을 아지트로 삼아 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창업자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일생일대의 인연이 그에게 다가왔다. 바로 중국의 대표적 종합 포털 중 하나인 소후닷컴(www.sohu.com)의 창업자 장차오양 회장을 만난 것이다. 미국 동부에서 유학생활을 보내고 귀국한 장 회장과 서부에서 경험을 쌓은 구 회장의 베이징 조우는 기막힌 우연이었다.
창업자와 벤처캐피털리스트로 만난 둘은 만나는 순간부터 인터넷기업의 창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면서 서로의 생각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라고 말할 것도 없이 둘은 한 배에 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구 회장은 공식적으로 소후 이사진들의 면접을 거쳐 1999년 3월부터 소후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소후에서 승승장구하며 최고재무책임자(CFO)와 최고운영책임자(COO)를 거쳐 총재 자리에까지 올랐다. 모두 6년 만에 이뤄진 일이다.
하지만 구 회장은 소후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장 회장에게 3가지를 말했다. “집사람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하는데 동행하고 싶다. 오랫동안 일만 했더니 몸이 지쳤다. 잠시라도 쉬고 싶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창업 환경을 물색해보고 싶다.” 구 회장의 진심 어린 말을 들은 장 회장은 그를 만류할 방도가 없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구 회장은 소후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곧바로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의 부인이 뉴욕대에서 1년간 연수를 받는 동안 그는 모처럼 자유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일은 장기간의 해외여행이다. 그는 3개월간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뉴질랜드, 호주, 남아공, 이집트 등을 여행했다. 멕시코 카리브해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페루에서 장거리 기차로 마추픽추까지 갔다. 아르헨티나 농장에서는 독서 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1년간의 휴식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새로운 창업 아이디어였다. 이때 그가 주목한 것이 바로 동영상이었다. 당시는 유튜브가 막 창업해 시장에서 조금씩 인지도를 넓혀가던 때였다. 그의 눈에는 유튜브 같은 동영상 사이트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인간은 아름다운 것이면 뭐든지 기록하고 싶어하고, 그것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어한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카메라는 순간을 포착하기만 할 뿐 순간의 절묘함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없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해답은 동영상에 있었다.
일찍부터 동영상 사업성에 눈떠
그는 동영상 사이트 사업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분석했다. 동영상을 통해 사물을 자주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동영상에 대한 수요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동영상은 사이버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사용 도구가 될 것이며, 그에 기반한 비즈니스의 확장 가능성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2005년 유쿠닷컴이 탄생했다.
그는 중국에서 온라인 동영상 업계의 선구자다. 2006년부터 6개월에 한 번씩 온라인 동영상 발전 방향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끝에 2010년 12월에는 중국내 동종업계 최초로 미국 증시에 상장했다. 상장 첫날 주가가 공모가 대비 무려 161% 상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지금 유쿠투더우 이용자는 4억명을 넘어서고 있다.
2012년 3월에는 경쟁사인 투더우와 합병하는 결단을 내렸다. 유쿠와 투더우가 주식을 100% 교환하기로 한 것. 미국 나스닥에 상장돼 있는 투더우의 중국 A주와 B주는 상장 폐지되고, 투더우 주식 1주당 유쿠 A주 7.177주가 부여됐다. 그런 성과에 힘입어 구 회장은 베이징의 대표 언론인 신징바오 등이 선정한 ‘2012년 중화권 경제 리더 10명’에 포함됐다. 유쿠투더우는 지금도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 4월 알리바바와 제휴한 것이 대표적이다.
유쿠투더우는 알리바바 산하 윈펑캐피털로부터 12억2000만달러를 투자받는 대신 지분 18.5%를 넘겼다. 알리바바의 루자오시 CEO를 유쿠 이사회 멤버로 파견받았다. 양측은 합작 파트너십 체결을 계기로 공동으로 ‘오투온(오프라인 to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유쿠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화면 속에 나오는 제품을 클릭하면 바로 알리바바가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 매장으로 연결되는 서비스를 개발할 계획이다. 이런 시스템은 유쿠가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으로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구 회장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소후의 제2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소후라는 기업의 정수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 주효했다. 그가 소후의 기업문화를 유쿠에 잘 녹여낸 것이다. 소후는 직원들 간 평등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점을 유쿠에 잘 적용해 유쿠에서는 모든 직원들의 사무공간 면적이 똑같다. 회장도 예외가 아니다. 직원 전원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도 소후가 처음 시작했을 때와 똑같다. 구 회장이 이처럼 소후로부터 훌륭한 기업문화를 도입했지만 시장 진출 전략에서는 소후와 전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소후는 종합 포털사이트로 크고 전면적인 것을 추구했지만 유쿠는 동영상 전문 사이트 하나에 집중해왔다. 광범위한 협력을 추진하는 것도 다른 점이다. 구 회장은 국내외에서 다년간 쌓은 인맥을 활용해 창업 1년 만에 바이두 등 다른 인터넷 기업들과 강력한 협력 파트너십을 맺었다. 그의 목표는 대외 역량을 결집해 사이버 세상에서 유쿠의 인기를 높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