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국제정세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단초를 마련한 얄타회담이 열렸던 크림반도에선 지금 부동항을 확보하고 흑해의 지배권을 쥐려는 러시아와 이에 맞선 서방의 갈등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다. 아시아에선 북핵위기가 상존하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틈타 일본이 핵무장을 시도할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 틈바구니에 낀 한국에선 극한의 이념대결이 이어져 국론이 양분된 상태다. 원로들은 오늘날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까. 우리가 나갈 방향을 모색하려고 국내 여성 최초로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핀란드 대사와 주러시아 대사까지 역임한 이인호 전 서울대 교수를 찾았다.
101세 친정어머니께 얹혀(?)산다는 이 교수는 “오늘날은 삶의 방식이 산만한데 어른들은 삶에서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체계가 잡혀있다”는 얘기로 세태를 개탄했다. “사람이 열심히 산다는 게 사람답게 살기 위한 것인데 너무 몰두하다 보니 왜 그 일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최근의 전월세 대책을 비롯한 많은 정책들이 전체가 아닌 부분만 보고 만들어졌다는 말로 정책의 맹점을 지적했다.
“나이를 먹다 보니 병원에 있는 친구들이 많다. 그런데 지금 의료 체계는 사람을 전체로 보지 않고 부분만 보고 대응해 제대로 치료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전체가 아닌 한 부분만 보고 거기에 집착하다보니 전체를 깨는 정책까지 나온다.”
기본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응급조치처럼 정책을 쏟아낸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다양한 위원회에 참여하다보니 잘못된 정책들을 수없이 보았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 놓으면 그게 목표에 기여할 대안인지, 얼마나 효과적으로 기여하는지, 다른 영역과의 부작용은 없는지 등을 세밀하게 검토하는 과정이 없다. 이 때문에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 교수는 특히 공직자들이 민간위원회조차 악용한다고 질타했다.
“YS 때 세계화추진위원회 같은 실질적 힘을 가진 위원회도 많았다. 위원회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그런데 실무진에서 전혀 엉뚱하게 진행해 시정을 요구해도 그대로 나가곤 했다. 그들이 의도한 정책을 진행하면서 이름만 빌린 것이다.” 국가정책이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기 보다는 개인이나 정파의 이해에 휘둘린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교수는 공직의 공정배분은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공직은) 사회적 생산성 면에서도 우수한 인재를 잘 발탁해서 좋은 자리에 배분해야 한다. 자리의 공정 배분은 말도 안된다. 그런 요구를 하는 건 공직에 대한 이해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공직은 일하는 자리지 먹을 자리가 아니다.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 일하게 해야 한다.” 그는 이 점에선 구소련에서조차 배워야 한다고 했다.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모든 것을 잘못한 것만은 아니다. 아나톨리 도브린은 주미대사를 25년이나 했는데 일을 잘 하니 그렇게 오래 하도록 했다.”
그렇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대립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길은 무엇인가.
“국민의식이 중요하다. 국민으로 살아남으려면 우리 주변의 강대 세력들을 경계하면서 어느 한쪽이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운신의 폭이 커진다. 세계질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든 자국의 이익을 챙긴다는 점이다. 세계는 계속 변한다. 그 속에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느 나라든 믿고 의지해선 안 된다. 국제관계는 현실적으로 인식해야지 감성적이거나 시대착오적이어선 안 된다. 개항기 일본은 재빨리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룬 반면 우리 선조들은 중국에 전적으로 의지해 대응 능력이 떨어져 망국의 설움을 안았다.”
지금 상황도 비슷하다고 했다. “한반도 내에서 어떤 한 세력이 압도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러시아와 협력해 미국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 안이 분열돼선 곤란하다는 점이다.”
지식인 집단 가장 큰 죄인
그런데도 국론이 사분오열되는 데는 지식인과 언론의 잘못이 크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역사는 꼭 의도가 나빠서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선택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최선의 선택은 가장 나쁜 것을 피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사회는 지식인과 언론이 국민을 흥분시키고 감정적으로 나가게 한다. 지식인은 여러 집단 중에서 가장 큰 죄를 지었다.”
이 교수는 요즘 민주주의가 아닌 ‘우중주의’가 생기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지도층이 현실을 직시해야 되는데 “감정에 날뛰고 있다”는 것이다. 사학자로서 그는 특히 “지금 역사분야의 논의는 논의도 아니다”라는 강도 높은 말로 지식인 집단을 비판했다.
“1948년 건국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1919년 건국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까지 나온다. 그 때 건국했다면 왜 우리가 식민통치를 받았고 독립운동은 왜 했는가.” 하버드에서 러시아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지역 대사까지 역임한 국내 최고의 러시아 전문가인 그는 핀란드가 한국에 비해 훨씬 현명하게 대처했다며 사례를 들었다.
“핀란드는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소국이다. 스웨덴의 속국이었던 핀란드는 러시아와 스웨덴 전쟁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됐다. 그들은 러시아 통치시기를 스웨덴과 결별의 기회로 여겼다. 러시아에 감정이 있었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았다. 덕분에 러시아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아 조용히 실력을 쌓다가 러시아가 흔들리자 독립했다. 미소 냉전으로 한창 어려울 때 우르호 케코넨 전 핀란드 대통령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25년 동안 강력한 통치를 했다. 핀란드 사람들은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걸 받아들였다. 대조적으로 한 때 러시아를 넘볼 만큼 대국이었던 폴란드는 과거에만 취해 러시아에 들고 일어났다가 두 번이나 패배해 자치권마저 빼앗겼다.”
국제정치는 자존심보다 실리가 필요한데 국내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우리끼리 날뛰고 밖에 대해서는 설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누가 대안인지도 검증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에 더 나쁜 대안조차 무조건 쏠리고 있다. 그게 혁명 전 러시아와 비슷하다. 당시 러시아도 대안이 필요했지만 모두가 평등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시민들이 흥분하다 결국 비극의 러시아 혁명을 초래했다.”
러시아도 개항기 한국처럼 근대화에 실패해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 이 교수는 오늘날 상황도 같다고 했다. “우리도 냉정하게 현실을 봐야 한다. 과격한 구호만으로 진보나 복지가 되는 게 아니다. 복지를 하려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정치인들이 많은 것을 약속할수록 더 많이 빼앗아간다.”
갈수록 삐뚤어지는 역사 교육
원로사학자로서 그는 역사 교육이 오래 전부터 잘못돼 가고 있다고 했다.
“1980년대 초, 중학교 교과서 편찬에 관여한 적이 있다.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하라고 해서 갔다. 그때 교과서를 교수 네 명에게 쓰라고 했다. 세계사의 방대한 내용을 몇 페이지 내에 다 집어넣으라고 해서 이야기는 다 빠졌고 사실만 간략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다. 교육부에서 준 지침은 역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그냥 쓰라는 게 훨씬 나았다. 네 사람이 쓰는데 역사적 관점에 대한 논의도 하지 못한 채 3개월 만에 탈고하라고 했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역사교과서에 비해 우리 역사 교과서는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서양 역사 교과서는 이야기로 풀어 분량이 많다. 우리 역사 교과서와는 비교가 안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또 비용 줄인다고 이야기를 다 빼버렸다. 이건 진정한 책이 아니다. 긴 게 더 효율적이다. 지금 역사 교과서엔 스토리가 없다. 이야기로 읽으면 분량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최근엔 개념 가르친다며 무의미한 사료를 집어넣어 교과서를 심각하게 왜곡시켰다고 한다.
“미군의 포고문은 전쟁 상대국 일본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차원에서 사회 질서를 잡으려고 발표한 전형적인 군인들의 포고문이다. 반면 2차 대전 막바지에 잽싸게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점령하러 들어온 소련의 포고문은 ‘당신들을 해방시키러 왔다’는 상투적 선전문구로 되어 있다. 실제는 전혀 다른데 이것만 보면 실상이 잘못 전달될 소지가 크다.”
한 마디로 역사를 왜곡시켜 가르치고 있다는 얘기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비판하는 것부터 가르쳐 이상한 교육이 돼 버렸다. 386세대의 좁은 경험으로 아래에 전달하는 기막힌 반교육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우리의 역대 지도자들을 나쁜 사람으로 인식시키는 책이 대부분이다.”
세계 각국의 역사교과서를 두루 섭렵한 그는 러시아조차 그런 식으로 역사를 가르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공산주의 시절조차 러시아 왕정까지 다 가르쳤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이 컸을 때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시각으로 해석하게 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아예 기초를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는 이야기인데 어느 날 갑자기 골치 아픈 교육이 됐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옛날이야기 식으로 가르치는 게 낫다.”
이 교수는 교육계 내부의 알력이나 입시제도도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대학입시) 출제하라고 해서 들어가니 세계사가 선택과목 중 하나였다. 세계사가 얼마나 방대한가. 아무리 쉽게 내도 세계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과목이다. 대조적으로 사회문화는 아무리 어렵게 낸다고 해도 상식으로 선택하면 되는 거다. 그렇다보니 선택에서 역사교육이 사라져 버렸다.”
한때는 대학에서, 그것도 일부만 배우는 교육학이 국사와 동일하게 고등학교 선택과목으로 등장한 적도 있다고 한다.
“교육학을 어떻게 역사와 동격에 넣을 수 있느냐니까 사학 하는 사람들 이기주의라고 반격이 들어왔다. 역사는 세계인 모두가 공통으로 배우는 과목이다. 그에 비해 교육학은 전문가들만의 얘기다. 이게 어떻게 동격이 될 수 있나. 사실 교육학 가르치는 사람들의 이기주의 때문에 역사의식이 심하게 왜곡되었다.”
이런 이유로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조차도 시대적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우리가 해방된 데도 국제관계는 절대적이었다. 일각에선 독립운동해서 독립했다고만 하는데 국제관계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립이 쉽지 않았다. 분단에 대한 이해도 이 차원에서 해야 하고 대외관계의 이해도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미국은 일본을 패퇴시킨 나라다. 소련은 눈치보다가 잽싸게 북한으로 들어왔다. 그 때 미국이 일본에만 주둔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공산주의는 스탈린 치하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동구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 때 북한식 체제를 도입했다면 지금 대한민국도 북한 같을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 공과 재평가해야
이런 맥락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공과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소련의 야욕을 직시했다. 이 때문에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여러 곳에 애원도 했다. 이 박사가 그렇게 한 것은 1923년 ‘공산당 당부당(當不當)’이란 논문에서 공산당의 모순을 조목조목 비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공산주의의 위험을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 박사를 지식인들이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박사는 분단의 원흉이 아니라 독립 유공자다.”
이 교수는 특히 “자기 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분을 역적으로 모는 역사관은 인정할 수 없다”며 “그 때 분단이 안 됐다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 치하가 됐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이나 구소련 시각에서 보면 이승만이 철천지원수다. 그런 면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북한의 세뇌공작의 일환이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지령한 것은 모두 문건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도 말도 안되는 시각으로 역사를 인식하는 이 민족이 한심하다.”
이 교수는 정부조차 역사를 모르기에 미래를 제대로 볼 줄 모른다고 했다.
“그 동안 정부는 이념도 없었고 현실감각도 없었다. 북한과의 관계도 무원칙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 햇볕정책을 펼 만한 경제적 능력이 됐기에 실험삼아 해볼 수는 있었다. 다만 도발은 절대 안 된다는 것과 한미관계는 유지한다는 대원칙 하에 하라고 했는데 모스크바에서 보니 말이 아니었다.당시 이산가족 상봉 한다며 그들이 단장으로 보낸 이가 대한민국을 배반하고 월북한 인사 중 최고위인 최덕신 전 외무장관의 처 유민영이었다. 대남공작 책임자를 단장으로 보냈는데도 우리는 남북이 만난다는 데만 흥분해 들떠 있었다. 한 마디로 밸이 없었다. 이쪽에서 황장엽 씨를 보냈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었겠나. 그들은 우리를 테스트 한 것이다. 그게 통하자 어떻게 하든 남측이 받아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때부터 북은 우리를 얕잡아보고 핵개발을 했다. 대한민국의 국체를 허물어버린 것이다.”
논리 결핍의 보수에도 책임
이 교수는 사태가 이처럼 악화된 데는 한국의 보수가 제대로 된 논리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고려대 교수 때 최규하 전 대통령이 고려대에 와서 남북 상황과 관련해 강연을 했는데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논리를 펴 쇼크를 받았다. 그는 우리가 미국의 영향을 받아 교과서부터 ‘영희야 놀자’로 나오는 등 ‘놀자’부터 가르치며, 국가 아닌 ‘나부터’를 가르친다는 이상한 주장을 폈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분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모델로 내세웠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런 식으로 유신을 합리화했을 뿐 아니라 반공교육조차 너무나 우매하게 가르쳤다고 했다. “반공만 주장했지 소련이나 북한의 실상이 어떤지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6·25 때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수난을 당했는지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전시상황에서 불행한 일이 발생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인민재판 상황 같은 것은 전혀 가르치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반공은 했는데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이 없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없다. 상식도 없는 나라다.”
이 틈을 좌파들이 교묘하게 파고들었다는 게 이 교수의 시각이다. 그는 하버드에서 러시아 프리메이슨을 연구한 게 운동권과 북한과의 연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분단 후와 6·25 때 북에게 아주 심하게 당했기에 구세대는 반공교육이 필요 없다. 문제는 이후 세대다. 지금 지식인들은 북한의 속성을 너무 모른다. (나라에서) 안보를 너무 잘해주다 보니 눈에 보이는 군사독재만 경계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산주의는 경계하지 않는다. 러시아 사람들이 스탈린 체제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지금 역사교육을 장악하고 있다.”
“공산주의 수법은 비밀조직으로 한다. 그걸 모르고 과오를 범해 다시 불행한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신자세가 잘못되면 북한 같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칫 미국 중국 등이 대립하는 가운데 내분으로 양쪽 모두가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 게 그가 우려하는 대목이다.
이인호 교수는
전형적 유교 집안 출신으로 서울대 문리대 3학년 때(1956년) 장학금을 받고 미국 웨슬리대로 유학을 떠나 1966년 하버드에서 한국 여성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간 학비가 2000달러일 당시 달랑 50달러만 들고 가 베이비시터와 린넨 서비스(기숙사의 시트를 교체하는 일) 등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기에 스탈린 사망 후 해빙무드였던 미국에서 러시아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1957년 러시아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프트니크 1호를 쏘아올린 데 따른 충격으로 미국에서 러시아 붐이 일어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면 러시아 유학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다만 귀국을 생각했기에 하버드에서 공부를 했다고 밝혔다. 이 때 하버드는 그가 필요로 하는 자료를 러시아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떠다 줄 정도로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제정 러시아의 프리메이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바로 돌아올 수도 있었으나 “여비라도 벌어서 들어가자”며 컬럼비아대와 럿거스대 등에서 강의하다 1972년 고려대 교수로 귀국했다. 1980년 서울대 교수가 된 그는 이후 YS 때 주 핀란드 대사로 나갔고 이어 김대중 대통령 때 주 러시아 대사가 됐다.
“건강은 좋다. 잠 많이 자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다”는 그는 현재 101세인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그런데 어머니가 살림을 다 관장하고 계시기에 사실상 얹혀사는 입장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