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수도인 모스크바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자들이 사는 도시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나 중국 컨설팅업체 후룬(胡潤)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보고서들은 모스크바를 70명이 넘는 억만장자가 사는 최대 부자 도시로 평가하고 있다. 최근 나온 ‘2013 후룬리포트(胡潤百富)’에 따르면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억만장자는 모두 76명에 달한다. 이는 뉴욕(70명) 홍콩(54명) 베이징(41명)보다 많은 숫자다.
소수의 재벌 ‘올리가르히’
생활수준이 서방에 비해 한참 낮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스크바에 어떻게 그 많은 부자들이 있을까. 해답은 1991년 소련 해체 후 진행된 엉성했던 민영화 과정에 있다.
석유, 가스, 광물, 전력 등을 다루는 거대 공기업들을 소수 기업인들이 정권과 유착을 통해 헐값에 넘겨받으면서 갑작스럽게 거부 반열에 올랐다. 이들에 대해서는 ‘소수의 재벌’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가 함축된 ‘올리가르히’로 불려진다.
현재 포브스 부호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대다수 러시아 기업인들은 민영화를 통해 공기업을 넘겨받은 뒤 몇 개 기업들을 합병하면서 몸집을 키웠다. 소련 시절 경쟁력 없는 공기업들을 민영화함으로써 효율성이 개선됐고, 이를 통해 일부 에너지기업은 세계적인 위상을 갖게 됐다.
반면 제조업을 새로 일으켜 부호 대열에 합류한 경우는 거의 없다. 취약한 제조업 여건상 러시아 ‘슈퍼리치’들은 굵직한 에너지 및 광물기업들을 소유해 부를 키우고 있다. 현재 러시아 최대 부호는 알리셰르 우스마노프로 그의 공식 직함은 철광석 생산업체인 메탈로인베스트 회장이다. 그는 2012~2013년 2년 연속 포브스가 선정한 러시아 최고 부자로 올라있다.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아스날’ 구단의 2대주주로도 유명하다. ‘첼시’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와 함께 프리미어리그에 스며든 러시아의 대표적인 돈줄로 꼽힌다. 우스마노프의 사업은 철광분야에 그치지 않는다. 페이스북, 그루폰, 트위터, 징가 등 해외 IT분야에 꾸준히 투자하고 있는 점이 다른 올리가르히와 차별되는 점이다. 그는 또 러시아 2위 이동통신 회사인 메가폰, 미디어그룹인 수프미디어 등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부호 순위 2위인 미하일 프리드만 알파그룹 회장은 알짜 석유회사인 TNK-BP를 갖고 있다. 그 외에도 통신회사인 빔펠콤과 유통업체(X5), 은행(알파방크) 등의 계열사도 거느리고 있다. 특히 알파그룹은 지난 2005년 사할린 유전 인수를 둘러싸고 국내에 불거진 일명 ‘오일게이트(Oil-gate)’와도 관련돼 있다. 당시 사할린 6광구(일명 페트로사흐 유전)를 보유한 러시아 기업 ‘알파에코’가 국제컨소시엄을 통해 개발을 추진하면서 코리아크루드오일(KCO)이 사업파트너가 됐고, 철도청(현 철도공사) 자회사인 철도진흥재단이 KCO 주주(지분율 35%)에 올랐는데 알파에코는 바로 알파그룹 계열사였다. 부호 순위 3위는 러시아 2위 가스회사인 노바텍과 석유화학회사인 시부르홀딩스 대주주로 있는 미헬손이다.
미하일 프리드만 석유회사도 소유
프리드만과 함께 TNK-BP 지분을 보유한 빅토르 벡셀베르크는 알루미늄 기업 수알을 설립한 뒤 루살과의 합병을 통해 최대 알루미늄 회사인 통합루살을 만들어냈다. 그는 노릴스크니켈(니켈 등 광물)의 주요주주이기도 하다.
로스네프티에 이어 러시아 2위 석유회사인 루코일을 만든 바기트 알렉페로프 회장도 주목할 만하다. 석유 도시인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태어난 그는 젊어서부터 석유 업무를 했고, 소련 해체 직전 연료에너지부 차관을 지내는 등 석유 전문가다. 정부부처에서 일하는 동안 시베리아에 있는 3개 석유회사를 합쳐 루코일을 만들었으며, 관료 생활을 끝낸 뒤 루코일 회장을 맡아오고 있다.
첼시 구단주로 잘 알려진 아브라모비치는 2013년 부호 순위는 13위로 크게 하락했지만 여전히 102억달러(약 11조원) 재산을 보유하며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그의 부는 헐값에 석유회사인 시브네브티를 매입하면서 시작했지만 크렘린 뜻에 따라 가스프롬에 모든 지분을 매각해 큰돈을 벌었다.
이를 토대로 철강 분야에 뛰어들어 그가 대주주로 있는 투자지주회사인 밀하우스 캐피탈을 통해 철강회사 에브라즈를 사들였다. 에브라즈는 또 다른 올리가르히인 알렉세이 모르다쇼프가 대주주로 있는 세베르스탈과 함께 러시아 양대 철강회사로 꼽힌다. 우리나라 나이로 42세(1972년생)의 젊은 재벌인 안드레이 멜니첸코는 수엑, 유로켐, SGC, 은행 등을 거느린 MDM그룹 회장으로 있다. 시베리아 석탄에너지회사 약칭인 수엑은 시베리아 광산업체들의 지분을 매입해 만든 통합회사로 러시아 최대 석탄기업 중 하나다. 유로켐은 무기질 비료를 생산하며, SGC는 시베리아에서 대단위 전력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프로호로프, 2012년 대선에도 출마
이와 함께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 러시아 최고 부자였던 올렉 데리파스카는 전 세계 최대 알루미늄 회사인 통합루살을, 블라디미르 포타닌은 노릴스크 니켈의 대주주 겸 최고경영자(CEO)로 있다. 블라디미르 리신은 철강회사인 노볼리페츠크 스틸과 선박운송회사 등을 거느리며 부를 확장하고 있다.
특히 2012년 대선에도 출마한 미하일 프로호로프는 지난 2010년 미국 프로농구협회(NBA) 뉴저지 넷츠(Nets)를 인수해 러시아인 최초로 미국 프로 스포츠계 구단주가 됐다. 그는 포타닌과 함께 노릴스크 니켈의 공동 대주주였지만 불화를 겪은 뒤 지분을 전부 팔고 대신 통합루살 주식으로 바꿔 탔다. 지난 2007년 170억달러의 자본금을 들여 투자지주회사인 오넥심그룹을 설립해 금융, 미디어, 신기술 분야로 사업을 확대했다. 특히 나노기술, 수소연료전지, 초경량소자 등 다른 기업인들이 관심을 덜 쏟는 첨단 분야에 진출해 기술개발에 나서고 있다.
지난 2011년 2억달러를 투자해 만든 러시아 최초 하이브리드카인 ‘요(Yo)’ 콘셉트 모델을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정계에 뛰어들어 친크렘린 정당의 당수를 지냈고, 지난해에는 푸틴에 맞서 대선 출마를 강행하는 등 러시아 기업인들 가운데 정치 성향이 가장 큰 올리가르히로 알려져 있다. 한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통하는 알렉세이 밀레르, 이고리 세친은 러시아 가스와 석유산업을 양분하고 있는 공기업인 가스프롬과 로스네프티 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