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는 시기에 와서 중요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여기는 금감원과 달리 새로운 비즈니스가 많다. 시중은행에 갔다면 이만큼 하지는 못했을 게다.”
김용환 수출입은행장은 원기 넘치는 목소리로 “정책금융기관이라서 할 일이 더 많았다”며 밝게 웃었다. 시중은행은 모두 비슷한 규모에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는 데다 이익의 95%는 예대마진과 수수료 수입으로 내고 글로벌 비즈니스에선 5% 정도만을 벌어 딱히 할 게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지난해 2월 금감원을 떠나 수출입은행을 맡은 그는 단기간에 은행을 확 바꿔놓았다.
“이곳이 엄청나게 변하는 시기였다”고 했지만 사실 그 자신이 변화를 주도해 수출입은행을 새 경지에 올려놓은 것이다.
“임기 중 수출입은행을 글로벌 프로젝트 금융의 키 플레이어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취임 직후 2팀의 금융자문실을 만들었고 지난 7월엔 4팀의 금융자문부로 확대 개편했다. 이 금융자문부가 지난 8월까지 16건에 228억달러의 금융자문·주선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가 일을 벌이자 곳곳에서 이의 제기가 들어왔다. 일각에선 조심하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김 행장은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기업들 기술은 좋은데 파이낸싱 능력 약해
“시중은행은 100억, 200억(달러) 프로젝트를 하지 못한다. 이런 프로젝트에 지금은 시중은행들을 끼워주고 있다. 장기 투자를 해야 하는 콜롬비아 보고타시 교통카드 프로젝트에 신한은행이나 우리은행을 끼워주고 초기 5년 동안만 투자하도록 했다. 시중은행들은 장기투자를 할 수 없기에 5년만 하게 했다. 그렇게 트랙 레코드(실적)를 쌓도록 도와준다. 금융은 네트워크 비즈니스다. 네트워크가 없으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거기에 넣어주고 있다.”
오랜 경륜의 금융 관료 출신답게 수출입은행만이 아니라 국내 금융기관 모두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은행 보험 증권 실무자 회의를 열도록 했고 산업은행이나 정책금융공사 등과도 프로젝트를 함께 하도록 한 것도 그래서다.
“과거엔 해외 IB들이 이런 프로젝트를 주도했는데 이제는 우리 프로젝트에 해외 IB들이 들어온다. 그들을 프로젝트에 넣어주니 수수료를 준다.”
그가 프로젝트 파이낸싱에 주력하는 것은 이것이 받쳐줘야 국내 기업들이 해외 플랜트를 수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전소 같은 대형 플랜트는 우리가 LOI(의향서)를 주어야 일을 할 수 있다. 우리 기업들은 기술은 좋은데 파이낸싱 능력은 약하다. 그것을 도와줘야 한다. 중국은 국부펀드까지 들어와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지원한다. 20억 달러 정도는 단독으로 지원할 정도다.” 그는 지금 우리 기업들은 가는 곳마다 중국이나 일본 기업들과 부딪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내수가 안 좋으니 해외에서 먹고 살 것을 찾는다. 이 때문에 중동이나 중남미 등에서 자주 부딪친다. 아프리카는 중국이 이미 선점했고 중국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라틴 쪽에 우리가 간다. 중앙아시아에도 이미 중국과 일본이 많이 나갔다.”
금융이 받쳐줘야 그런 곳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금까지는 우리 기업들의 기술력이 좋아서 가능했지만 이제는 중국과 경합하는 부문이 많아졌다. 기술을 요하는 대형 프로젝트에선 아직 중국이 우리를 따라오지 못한다. 그러나 기술력이 약한 부문은 결국 금융 싸움이다. 조건도 좋아야 하고 또 얼마나 빨리 해주느냐가 관건이다.”
김 행장은 얼마 전 베트남 원전 수주경쟁에서 일본에 놓친 적이 있다며 그만큼 갈수록 파이낸싱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경우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이 85%를 지원한다고 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려는데 국내 규제가 발목을 잡았다고 했다.
“우리는 동일인 여신한도에 묶여 있었다. 외국의 수출입은행은 동일인 여신한도란 것 자체를 모른다. 그래서 법을 바꿔달라고 청원했는데 법은 바뀌지 않았고 한도만 늘어났다.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BIS 비율을 넘어섰다. 그래서 정부를 찾아가 출자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자본금을 1차로 1000억원 늘리고 8000억원을 더 늘려 총 9000억원 증자를 마쳤다.”
김 행장은 올해 중동 건설 수주가 목표치의 50%에 불과하다며 그동안 자금을 지원하던 유럽이 금융위기를 맞아 돈을 대지 않아 발주가 줄어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줄어든 물량을 따내려니 경쟁이 더욱 치열하다는 것.
수출 어려울수록 금융이 받쳐줘야
또 자동차나 스마트폰이 좋아서 올해 1조달러 무역은 가능하겠지만 연말이나 내년 초엔 수출이 어려워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럴수록 금융이 받쳐줘야 한다고 했다.
“금융기관이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시중은행은 바젤Ⅲ 때문에도 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조선에 5조원을 더 줬고 중소·중견 건설사의 해외진출에 수출 팩터링으로 5000억원 정도를 줬다. 해운사에도 중고 선박 구입을 지원했다. 해운사의 용선료 등을 보고서 일정 부분을 실적으로 잡아서 지원하고 있다. 조선엔 제작금융도 지원한다. 지금 20%를 선지급하고 있다. 그동안 처음에 적게 주고 나중에 많이 주는 방식을 택했는데 지금은 1조6000억원을 추가로 지원했다.”
무역금융을 받기 어려운 중소기업도 신경을 쓴다. 김 행장은 수출 중견·중소기업에 제공하는 원화 파이낸싱 규모를 지난해 5조2000억원에서 올해는 7조4000억원으로 확대했다고 밝혔다. 금융위가 독려해도 시중은행은 주기가 어렵기에 수출입은행이 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수출입은행은 40억달러에 달하는 우즈베키스탄 수르길 유전 프로젝트를 따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프로젝트엔 직접 대출 7억달러, 보증 3억달러 등 모두 10억달러를 지원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니 일각에선 IB 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우리는 프로젝트에 한해서 자문한다. M&A 자문은 하지 않는다.”
그 많은 자금을 지원하려면 조달 실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수출입은행은 그동안 80억달러를 하던 외화자금 조달을 지난해 103억달러나 했고 올해는 110억달러를 조달할 계획이다. 8월 말까지 이미 89억달러를 조달했다. 상반기 일본에서 사무라이본드로 1000억엔, 우리다시본드로 12억달러를 들여왔고 지난 7월 호주 캥거루본드와 홍콩 딤섬본드를 한국 최초로 발행하는 등 조달처도 다양화했다. 김 행장은 “누구든 해보고 싶으면 하라”고 한다. 해외 정책금융은 누구나 하는 게 아니란 것. 수출입은행엔 35년의 노하우가 쌓여 있다고 했다.
“얼마 전 맥쿼리에서 두 명을 스카우트했다. 그 친구들이 우리가 쌓은 해외정보 데이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만큼 방대하다.”
이런 노하우를 바탕으로 국내 기업이나 유관기관과 전략적 협력체계를 강화한다는 게 김 행장의 구상이다. 최근 중동 아프리카 대사 세미나를 연 것도 그런 차원에서다.
그는 기업의 해외 진출이나 수주를 위해 수출입은행이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하는데 규제가 여전히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했다.
“정책금융공사는 네거티브 시스템의 적용을 받는데 수출입은행법은 포지티브 시스템이다. 법을 빨리 바꿔야 한다. 정책금융을 지원하지 않으면 조선이고 해운이고 건설이고 모두 어렵다. 정책금융을 지원할 수 있는 곳은 우리뿐인데.”
미국은 금융위기로 IB가 위축되자 USEXIM의 업무 범위를 넓혀 지원에 나섰고 일본 JBIX도 적극적이며 중국도 마찬가지란 것. 규제만 풀리면 뛸 실력은 충분하다고 했다.
“우리 인력은 대단하다. 맥쿼리에서 2명을 스카우트했지만 이제는 수출입은행 직원들이 나가서 자문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 직원들이 로펌이나 회계법인의 스카우트 대상이다.”
수출입은행의 자문 업무는 외국 법무법인이나 회계법인도 탐낼 정도라고 했다.
“자문부에 외국 법무법인도 여러 곳에서 파견 나와 있다. UAE 원전 등의 법률자문은 그동안 외국 로펌이 다 했다. 이젠 우리 로펌도 배우라고 파견을 받고 있다. 국내 은행들도 자문 업무를 배우라고 파견을 받고 있다.”
현재 수출입은행 자문부엔 알렌&오베리 등 글로벌 로펌의 변호사 4명과 김앤장의 변호사 외에 국내은행의 과장급 직원 3명이 나와 있다. 이젠 외국 IB와 대등한 위치에서 자문을 하거나 아예 주도적 입장에서 할 만큼 성장한 것이다. 그 노하우를 국내은행들에 가르쳐 주려고 해외채권 발행 시 국내 IB도 끼워주고 있다.
김 행장은 국내은행들이 해외 채권을 받아다 또 다른 상품을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국내 금융기관들은 해외 상품을 받아다 또 다른 상품을 만들어 팔 수도 있다. 또 그런 것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수출입은행은 최근 산업은행과 함께 한국 기업의 미국 텍사스 가스전 인수에 매장량기초금융방식(RBF)으로 5000만달러를 지원했는데 이것도 새 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글로벌 IB 네트워크 구축
김 행장은 글로벌 IB의 기반이 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주요 은행들과 협의체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운영하면서 글로벌 IB 업무를 서로 지원하자는 것. 이미 중국은행이나 교통은행 공상은행 건설은행 농업은행 등 중국계 은행과 협의체를 만들었고, 일본 미쓰비시나 미즈호 스미토모은행 등과도 협의체를 구성했다. 이런 네트워크가 있어야 자금을 모을 수 있고 또 반대로 투자를 할 수도 있다는 것. 이와는 별도로 홍콩에선 IB 회의를 매년 열고 있다. 역시 자금을 모으고 파는 네트워크 구축 차원에서다. 김 행장은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중소·중견기업 지원도 강화하고 있는데 특히 직접 지원보다 대기업을 통한 간접 지원에 힘을 기울일 뜻도 밝혔다.
“중소·중견기업 수출 비중은 32%다. 그래서 직접 지원은 거기까지만 하라고 했다. 그보다 고용과 성장에 영향력이 큰 사업에 집중하려고 한다. 원전이나 대형 플랜트 같은 데 대기업이 나가면 협력업체가 줄줄이 나간다. 실제로는 이게 중소기업에 더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하면 실질적으로 중소기업에 40% 이상을 지원하는 셈이다. 게다가 고용과 성장에 미치는 효과도 크다. 중소기업의 직접 지원은 시중은행이 할 일이다.”
이런 경로를 통한 중소기업 지원을 체계화하려고 김 행장은 돈을 바탕으로 한 동반성장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동반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중소기업이 납품하면 바로 대금을 지급한다. 26개 대기업과 5000여 협력업체가 협약을 맺어 중소기업이 만들면 대기업이 바로 사주도록 했다. 올해 1조원의 상생금융을 제공한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벌써 5000억원이 나갔다. 이게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니다. 아이디어만 던져줬고 직원들이 한 달 간 연수원에 들어가 고민해서 만들어냈다.”
김 행장은 고용 창출 효과가 큰 지식서비스 산업에도 집중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조업은 갈수록 로봇화가 되어 고용 창출이 줄어든다. 그보다는 영화나 드라마 등의 고용 창출 효과가 훨씬 크다. 부가가치와 고용 창출 효과가 모두 큰 곳이 투자 대상이다. 이런 곳을 시중은행은 하지 않는다. 재무제표가 없고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한다. 문화콘텐츠 산업 세미나도 할 것이다.”
그린에너지 산업에 과감히 투자
그는 특히 태양광이나 물 관련 산업 등 그린에너지 산업이 우리의 미래를 밝혀줄 것으로 보고 이 부문에도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태양광이나 물산업 등은 우리가 후발주자다. 지금 유럽 금융위기가 한창이다. 내년 후년이 앞선 유럽 업체들을 따라잡을 기회다. 과거 조선도 후발주자였으나 집중투자로 따라잡았다. 그린에너지 산업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수출입은행은 2010년 2조4000억원이었던 녹색금융을 연평균 35%씩 늘려 2015년까지 40조원을 지원한다는 GPP(Green Pioneer Program)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녹색 선도기업 10사와 녹색히든챔피언(수출 3억달러 이상) 40사를 육성한다는 것. 대외경제협력기금 자금과 수출입은행 자금을 사업 특성에 따라 결합해 경쟁력을 최대한 높인다는 게 수출입은행의 구상이다. 이와 관련해 수출입은행은 이미 인도네시아 왐푸 소수력발전 프로젝트에 1억3100만달러를 투자한 바 있다. 인도네시아 최초로 한국 기업들이 민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이 프로젝트는 연 23만톤의 탄소배출권까지 확보할 수 있어 의미가 크다.
“그린에너지 산업도 조선처럼 집중할 방침이다. 시중은행이 못하는 것을 우리가 끌고 가야 한다. 그린펀드는 말만 요란했지 안 된다. 수출입은행이 해줘야 가능하다.”
이처럼 적극적인 투자를 하지만 부실은 0.5%에 불과하다고 했다. “부실 비율이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게 김 행장의 설명이다.
특히 수출입은행의 최대 고민거리 중 하나인 성동조선도 정상화되고 있다고 했다.
“처음 발령 받고 올 때 성동조선과 UAE 원전만 잘하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다 잘 됐다. 성동조선은 내년부터 돈이 많이 들어온다. 8000명 직원이 있는 곳이라 과감하게 지원했다. 현재 2조원의 여신이 나가 있다.”
자칫 의혹을 살 수 있는 일이라 그는 모든 과정을 공개해서 진행했다. “성동조선에 가서 TF 회의를 하도록 했다. 공개적으로 하라고 했다. 성동조선이 나쁜 회사는 아니다. KIKO에 1조4000억원이 날아가 문제가 됐을 뿐이다. 지금 조선이 어렵다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조금만 견디면 된다. 어려운 기간만 넘기면 살아난다. 1800 넘던 BDI(발틱운임지수)가 600까지 떨어졌다. 지금이 바닥이다.”
김 행장은 그런 과정만 연상하면 지금도 즐거운 듯 밝게 웃었다. 금융위 시절 생명보험사 상장이나 현대투신 매각 등 난제를 소리 없이 처리해냈던 그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내가 겁낼 게 무엇인가. 일주일에 한 번씩 TF 회의를 열어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처리했다. 직원들은 아주 똑똑하다.”
어떤 어려운 일이든 소신을 갖고 즐겁게 하는 것. 그게 김용환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일들이 시작일 뿐이라고 했다. 수출입은행은 지난해 10년 계획인 비전 2020 경영전략을 선포한 바 있다. 대한민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글로벌 금융파트너가 되겠다는 것. 이미 지난해 702억달러의 승인액으로 중국수출입은행(690억달러)을 누르고 세계 70여 수출신용기관(ECA) 중 1위를 차지했다. 1인당 여신 승인액(9000만달러)에서도 캐나다의 EDC를 큰 차이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수출신용기관을 넘어 금융자문이나 주선 등 다양한 업무영역을 모두 다루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김 행장이 최근 대외정책금융기관으로서의 이미지를 잘 나타내는 ‘한국국제협력은행(KBIC)’으로 행명 변경을 추진하는 것도 그래서다.
조용히 일을 추진하는 그가 얼마나 더 큰 성과를 낼지 주목된다.
김용환 수출입은행장
서울고와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나왔고 행정고시 23회로 공직에 들어왔다. 재정경제부 복지생활과장, 금융감독위원회 증권감독과장, 공보관, 감독정책2국장,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 금융감독위원회 상임위원, 금감원 수석부원장을 거쳐 2011년 2월 수출입은행장에 취임했다. 어려운 현안이라도 조율을 거쳐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공직에 오래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겸손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