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스타 CEO] ④ 건설장비로 승승장구 중국 최대 갑부…싼이(三一)중공업 회장 량원건(梁穩根)
입력 : 2012.10.05 17:55:04
수정 : 2012.10.26 15:40:10
량원건(梁穩根·56) 중국 싼이(三一)중공업 회장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최고경영자(CEO) 중 한 명이다.
국내외에서 발표되는 중국 부자 순위에서 단골로 상위권을 차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는 개인 자산이 700억위안(약 12조4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돼 중국내 1위에 올라섰다고 중국 재산조사 기관인 후룬바이푸가 발표했다. 전년도 1위였던 와하하그룹의 쭝칭허우 회장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중국 최대 갑부 자리에 오른 것이다.
중국 경제 고속성장 일군 주역
중국 중부 후난성의 시골 출신으로 공대를 졸업한 것이 이력의 전부인 그가 중국 최고 부자에 오르기까지 과정은 사실 생각만큼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 뒤 건설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시장이 필요로 하는 제품을 만들어낸 것이 그의 성공 요인이 됐을 뿐이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오히려 교과서적이라는 점에서 중국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통해 삶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인물로 통하고 있다.
지금도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에 일하는 것을 즐기는 량 회장은 새로운 도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바로 기업인 최초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에 도전하고 있다. 370명의 당 중앙위원이야말로 13억5000만명의 중국인을 대표하는 지도자다. 중국을 이끌어가는 총서기를 비롯한 당 상무위원이 바로 이들 중앙위원 중에서 선출되기 때문이다.
량 회장의 싼이중공업은 고속 성장을 거듭해온 중국 경제를 상징하는 기업이다.
중국의 고속 성장 배경으로 꼽히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가장 기여한 기업 중 하나가 바로 싼이중공업이기 때문이다.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건설 분야에서 싼이중공업은 외국 기업이 차지하던 건설 중장비 시장을 완전히 국산으로 대체하면서 외국 기업의 코를 납작하게 눌렀다.
외국계가 주도하고 있던 중장비 시장에 토종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중국의 자존심을 살려준 주인공이 바로 량 회장의 싼이중공업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중국을 호령하던 우리나라 중장비 업체들도 싼이중공업에 크게 당했다. 2009년만 해도 중국 굴착기 시장은 일본 고마쓰와 히타치, 코벨코, 한국의 두산인프라코어와 현대중공업 등 외자계 ‘빅5’가 67%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는 40% 수준까지 떨어졌다. 중국 경제 둔화까지 겹치면서 한국 중장비 업체들은 현재 혹독한 시련기를 보내고 있다.
지금 싼이중공업은 굴착기 시장에서 점유율 10%를 훌쩍 넘으면서 외자계를 줄줄이 제치고 단일 기업으로는 1위 자리에 올라섰다. 다른 건설 중장비도 상황은 비슷하다. 건설에 꼭 필요한 콘크리트 컨베이어 펌프의 경우 수입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10여년 전에는 전체 시장의 95%에 달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입품 비율이 5%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역전극의 연출자는 물론 싼이중공업이었다.
중국에서는 “싼이중공업이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 기계 제조업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을 정도다.
싼이중공업이 이처럼 큰 성과를 거둔 배경은 국가적인 지원과 함께 뼈를 깎는 기술 향상이 동반됐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순익 6년 만에 32배 성장
싼이중공업 공장 앞에 도열해 있는 기중기들
우선 토종기업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적 지원이 많았다. 국영 건설기업들이 자국 정부의 토종 메이커 지원 정책에 따라 의도적으로 구매를 늘렸다는 것이다. 주요 지방 정부에서는 싼이중공업을 조달분야 공급업체로 선정하는 등 다각도의 지원이 있었다는 게 업계의 전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이런 지원만으로 싼이중공업의 성공을 해석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아무리 국가적 지원이 있다 하더라도 품질 등 제품 경쟁력이 뒤떨어지면 거래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요즘은 싼이중공업 특유의 성공 요인을 지원보다는 기술력에서 찾고 있다.
이제는 외자계 기업의 기술을 거의 따라잡아 범용 제품의 경우 품질 면에서 격차가 거의 사라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구나 품질은 비슷하면서도 가격은 상대적으로 저렴해 중국 건설시장에서 싼이중공업 제품을 찾는 고객들이 급증하고 있다.
그 덕분에 싼이중공업은 지난해 507억7600만위안(약 8조9800억원)의 매출에 86억4900만위안(약 1조5200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이 17%에 달한다. 일부 IT분야를 제외하면 제조업체의 이익률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싼이중공업이 2005년 25억3700만위안(약 4500억원) 매출에 2억6900만위안(약 470억원)의 순이익을 거둔 것과 비교하면 6년 만에 각각 20배와 32배 성장한 것이다.
이처럼 단기간에 건설 중장비 시장에서 공룡기업을 일군 량 회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1956년 후난성 롄위안시 마오탕진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집안의 돌림자인 융(永)자를 써 량융건으로 불렸다.
그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꾼 것은 사업가의 길로 접어든 뒤의 일이다. 그 스스로 이름의 가운데 글자를 지금의 원(穩)으로 바꿨다. 보다 진중한 사람이 되고 사업의 안정적인 발전을 꾀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량 회장은 후난성의 중난광야대학에서 재료학을 전공했다. 1983년 고급 엔지니어(박사급)로 전공을 마친 뒤 국영기업인 훙위안기계공장에 입사했다. 특유의 성실성을 인정받아 회사에서 승승장구했다. 3년만에 기획처 부처장에 이어 체제개혁위원회 부주임까지 맡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업가의 DNA가 흐르고 있었다. 안정적인 국영기업의 잘나가는 간부 자리를 포기하고 1986년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싼이(三一)는 ‘세 개의 일류’ 라는 뜻
딱히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지 않았던 그는 회사를 나온 첫 해 “양 한 마리를 팔면 20위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중국 내륙 각지로 가서 양을 사들였다.
그러나 양 값이 급락하면서 큰 손해를 보고 곧바로 양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술과 유리섬유 사업에도 손을 댔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그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종잣돈 6만위안을 마련한 그는 탕슈궈, 마오중위, 위안진화 등 동료 3명과 함께 롄위안시 마오탕진에서 용접재료 사업에 나섰다. 지하공장에서 숱한 실패를 경험한 끝에 결국 금속접착제를 만들어냈지만 이마저도 품질 기준 미달로 다시 주저앉을 뻔한 위기를 맞았다. 첫 제품을 랴오닝성의 한 공장으로 보냈지만 곧바로 반품돼 돌아왔기 때문이다.
량 회장은 이때 모교를 찾아가 은사인 자이덩커 교수로부터 조언을 구했다. 이를 발판으로 품질을 개량했고, 결국 그 제품이 시장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986년 9월께 첫 납품 대금으로 8000위안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는 “사업을 함께 시작한 동료들과 서로 손을 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처음으로 성공을 맛본 그는 사업을 확대할 방안을 마련하느라 골몰했다.
이때 그가 눈을 돌린 곳이 바로 건설시장 분야다. 당시는 덩샤오핑이 주창한 개혁·개방이 가속화하면서 중국 내 인프라 스트럭처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한 때였다. 그는 인프라 건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기계 설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계획을 만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중국에서 건설장비 분야는 국영기업이 독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민영기업이 넘볼 수 없는 분야에 뛰어들었고, 결국 1989년 동료들과 함께 작은 공장을 창업해 1000만위안 이상의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1993년에는 회사 이름을 싼이중공업으로 변경하고 본격적인 건설 중장비 제조에 나섰다.
‘싼이’라는 이름도 량 회장이 직접 지었다. 싼이(三一)는 ‘세 개의 일류’를 뜻한다. 일류 기업 창조와 일류 인재 육성, 일류 공헌활동 수행 등 3가지 목표를 향해 뛰겠다는 량 회장의 의지가 담겨 있다.
량 회장은 본사도 후난성의 성도인 창사 경제기술개발구로 이전했다. 그는 싼이중공업으로 출발한 첫 해 콘크리트 컨베이어 펌프 등 건설 공정기계 제조에 성공했다.
동시에 그는 중국만이 아니라 일찌감치 세계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우리는 외국 기업 수준의 자금과 기술, 인재 그리고 기업 운영 관리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며 “해외기업의 약점을 극복하고 우리의 장점을 극대화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회사는 설립 첫 해에 매출액 1억위안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싼이중공업은 지금 건설업체들이 필요로 하는 장비 대부분을 생산한다. 콘크리트 기계는 물론 도로건설 기계, 파일링 기계, 굴착기, 도로건설 기계, 풍력발전 설비 등이 포함된다. 그 중에서 레미콘과 펌프카 등 콘크리트 기계와 기중기 등은 중국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펌프카의 경우 국내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어서면서 전 세계 판매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건설장비 세계 최고 수준 기술력 확보
생산기지는 중국 내에만 베이징과 상하이, 셴양, 쿤산, 창사 등 5곳에 있다. 미국과 독일, 브라질, 인도에 글로벌 연구개발센터도 보유하고 있다.
현재 130개국에 진출해 있고, 80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해외에 30개 자회사와 15개 물류센터가 있다.
싼이중공업은 잇단 세계 최초 제품 개발로 세계 건설장비 업계를 놀라게 만드는 등 건설장비 분야에서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했다.
지난 2002년 홍콩 국제금융센터 건설 때는 406m 높이로 콘크리트를 올려보내 세계 기록을 세우더니 2007년 12월에는 초고압 펌프카로 상하이 금융센터 492m 높이로 콘크리트를 수직으로 올려보내면서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해는 전체 팔 길이가 86m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긴 펌프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런 기술 혁신이 가능했던 것은 ‘품질로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경영 이념에 따라 매출의 최대 7%를 연구개발(R&D) 비용으로 투자하기 때문이다. 현재 회사가 보유한 특허만 1200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량 회장은 아침형 인간이다. 새벽같이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하루 중 오전이 가장 일하기 좋은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습관은 싼이중공업을 창업한 후에도 줄곧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회사 임원들과 조찬을 함께 하면서 업무보고를 받는 일이 잦다. 일상적인 회사 업무는 대개 이런 조찬회의에서 결정된다고 한다.그는 인재를 중시하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와 함께 회사를 설립할 때부터 힘을 합친 3명의 동료를 비롯해 주요 임원들이 20여년간 줄곧 그와 함께 일하고 있다.
량 회장이 민영기업 경영자로서 특별한 것은 그가 국가의식과 당성이 아주 강하다는 사실이다.
“나라에 대한 책임이 회사 이익보다 우선이다”
공장 내 휴게실
그는 평소에도 “나라에 대한 책임이 회사의 이익보다 우선이다”라거나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산업으로 보국한다”는 말을 많이 해왔다. 2005년 중국 CCTV가 선정하는 중국의 경제 인물로 뽑혔을 때도 “사회가 나한테 햇빛을 주었다. 내가 은혜로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심지어 회사 간부들에게 아침마다 국기 게양식에 참석하게 할 정도다. 사내에서는 혁명가요 경연대회도 열고 있다.
그는 정식 공산당원이 되기 위해 18년간 피나는 노력을 한 끝에 2004년에 드디어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그는 2007년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의 후난성 대표로 선출됐다. 이어 민간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제18차 공산당 대표대회 때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될 것이 유력시되고 있다,
이미 전국공상연합회 상무 집행위원과 중국청년기업가협회 부회장을 맡는 등 정치적 행보를 병행하고 있다.
그가 맡을 것으로 보이는 당 중앙위원은 8260만 당원 중 370여명으로 구성된 최정예 지도부에 해당한다. 중국을 이끌어가는 정치국 위원(25명)이나 상무위원(9명)도 바로 이 중앙위원들 중에서 결정된다.
량 회장은 이미 제18차 당 대회에 참석할 후난성 대표로 선출됐다. 5년 만에 열리는 이번 당 대회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2270명의 대표들이 모여 중앙위원을 선출하는데 량 회장이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후난성 당 위원회는 지난해 9월 이미 량 회장이 중앙위원 후보로서 인사검증을 통과했다고 발표했다. 공산당 특성상 당 대회에 참석하는 대표들 중 누가 중앙위원을 맡을 것인지는 내부적으로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량 회장이 인사검증을 통과한 만큼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당 핵심 지도부에 오르는 영광을 누릴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렇다고 그가 사업가로서의 길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가 정치를 하더라도 사업을 겸할 것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업가로서 그는 여전히 성장에 대한 갈증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싼이중공업은 지난해 독일 서부 쾰른에서 초대형 산업단지 건설에 착수했다. 총 면적 24만ha에 공장과 사무빌딩, 기숙사 건물 등을 건설하는 일이다.
이 단지는 회사의 해외 사업을 총괄하는 본사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지난 2월에는 독일의 콘트리크 펌프업체인 푸츠마이스터를 인수합병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량 회장은 2세 경영 구도도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다. 외동아들인 량예중을 회사 경영에 참여시키고 있다. 영국 워릭대를 졸업한 그는 현재 회사 부총재로 재무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또한 중국 공산주의청년단 싼이중공업 위원회 서기를 겸직하고 있다. 량 회장 부자가 대를 이어 경영과 정치 동시 참여라는 새로운 전례를 만들어 낼 것인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