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졸자들이 안정된 직장과 돈벌이를 위해 취업전선으로 나서고 있는데 이는 결코 올바른 길이 아니다. 즐겁고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취업과 창업은 굴레에 불과하다.”
중학교 졸업이 전부인 김원길 안토니 대표(51)는 학력을 중시하는 이 사회에서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김 대표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지금 젊은이들처럼 대학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실 그 자신이 공부와는 담을 쌓았기 때문에 대학을 가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대신 그는 남들과는 다른 쉽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18세가 되던 때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구두 기술을 연마하고 이후 독립 브랜드로 구두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숱하게 고생을 겪은 것은 물론 몇 번의 회사 부도위기로 자살을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구두에 대한 열정과 뚝심이 그를 지켜줬다.
그렇게 40년이라는 세월을 버텨온 김 대표는 어엿한 구두회사의 CEO로서 지금은 주변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의 회사는 국내 컴포트 슈즈 업계에서 확고부동한 1위를 바탕으로 이제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김 대표는 2010년 구두 본고장 이탈리아에 진출했으며 지난해에는 이탈리아 브랜드 ‘바이네르’를 인수했다.
이제 더 이상 그는 아웃사이더가 아닌 ‘자수성가형 리더’로 자본주의의 성공모델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처럼 그가 구두를 통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나 공감하지만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바로 구두가 너무 좋아 구두에 미쳤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수선뿐만 아니라 제작 판매 등 구두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지 좋았고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고 괴로워도 즐거웠다”며 “자신이 즐거워하는 일을 하느냐가 자신의 장래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도 처음엔 구두가 싫었다
지난 8월 열린 경영관련학회 통합학술대회에서 김원길 대표가 토론하고 있다.
김 대표에게 성공과 행복을 안겨준 구두는 처음부터 그에게 대단한 의미였을까.
특정 분야의 기린아로 손꼽히는 인물들은 일찍부터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는 집요함을 보여주며 그 분야를 탐닉한다.
세계 축구계의 거성인 리오넬 메시는 5세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일찍부터 재능을 보인 메시는 11세가 되던 해에 성장 호르몬 장애를 선고 받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다.
구두라는 영역으로 들어오면 살바토레 페라가모라는 역사에 빛나는 구두장이가 있다.
이미 9세 때 여동생의 구두를 만들어 주며 될성부른 떡잎임을 보여준 페라가모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100km 떨어진 작은 마을 보니토에서 고작 13세가 되던 해 처음으로 자신의 구두점을 열었다. 이처럼 특별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으며 그 일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을 보였다.
김 대표를 만나기 전 기자도 이런 특별하고 화려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부푼 기자의 기대를 허무하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김 대표는 “구두 수선을 하고 있던 작은아버지가 맨 처음 구두기술자를 권할 때만 해도 왜 그런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젊은 김원길도 힘들고 멋없어 보이는 일을 회피하는 요즘 젊은이들과 똑같았던 것이다. 김 대표는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났고 그렇게 구두와의 인연을 접는 듯했다.
꿈도 인내 없이는 열리지 않는다
그는 “그 당시 농사일, 막노동 등 구두 수선 빼고는 다 해본 것 같다. 그러나 손에 남는 돈은 쥐꼬리만큼도 안 됐고 일하는 건 너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목표 없이 그저 돈을 벌겠다고 호기 있게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돈은커녕 몸만 축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집 밖을 방황한 지 1년 만에 결국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작은아버지가 다시 구두 수선을 권하자 할 수 없이 마음을 돌렸다.
김 대표는 “그때도 구두 수선 하는 게 좋아서 구두 기술자를 선택했다기보다는 먹고살 수는 있을 것 같아 이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작은아버지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우던 김 대표는 점점 구두에 대한 눈빛이 변해갔다. 처음에는 좁은 공간에서 구두에 몰두하는 작은아버지의 모습이 초라해보였다.
그러나 점점 그 모습에서 묘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특히 구두가 좋아졌다.
김 대표는 “작은아버지에게 구두 수선 기술을 배우면서 구두가 물건으로 보이지 않고 애인처럼 느껴졌다”며 “더 큰 세상에 나가 최고의 구두 기술자가 되고 싶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연고도 없이 무일푼으로 서울 영등포와 경기 성남 등을 떠돌았다. 월급도 없는 시다(‘보조원’을 속되게 이르는 말)를 하는 등 예전 집을 떠났을 때처럼 고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힘들지 않았다. 다리를 펴면 구두 수선 도구들이 걸리적거리는 좁은 지하창고가 그의 일터였지만 구두를 만질 수 있어 행복했다.
김 대표는 돈을 좇아 그리고 좀 더 멋있어 보이는 직업을 찾아 헤맨 이후 결국 자신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 구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김 대표는 “꿈을 좇아 일을 하지 않는다면 오래 할 수 없고 오래 할 수 없으면 잘할 수 없게 된다”며 “ ‘즐겁고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기 어려운 만큼 주변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우직하게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비록 처음부터 구두를 만지는 게 꿈이 아니었지만 인내를 갖고 계속 하다 보니 그의 마음속에 꿈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난 학벌 파괴의 아이콘이 아니다
김 대표는 본인처럼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젊은이들이 무조건 사회에 뛰어들기를 바라지 않았다.
또 자신이 ‘학벌 파괴’의 아이콘으로 비춰지며 대학 무용론의 예시로 회자되기도 꺼렸다.
그는 “최근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AMP)을 수료하는 등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며 “다만 배움이라는 것은 대학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또는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만큼 왜 본인이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디서 배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배운 것을 풀어낼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배움에 대한 그의 끝없는 탐구는 매일경제신문이 주관하고 한국경영학회가 주최한 제14회 경영관련학회 통합학술대회에서 ‘강소기업가상’을 수상하며 방점을 찍었다.
그는 이 상을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받았다.
특히 김 대표는 현장에서의 배움을 무척이나 강조했다.
실제 그는 최신 경영이론을 이론이 아닌 현장에서 배웠기 때문에 머리에서 이해할 필요 없이 몸에 배어있었다.
다만 그의 유별난 직원사랑에서 비롯되는 독특한 회사 경영스타일을 보면 웬만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게 된다.
김 대표는 직원들을 위해 회사 뒤편에 승마장을 만들어 승마용 말 2마리를 키우는 한편 수상레저를 즐길 수 있도록 보트도 샀다.
특히 공장마당에서 웅장한 엔진소리를 뿜어내는 1억원 상당의 벤츠 스포츠카는 직원들이 몇 개월간 줄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다.
이 밖에 김 대표는 셋째 자녀를 낳은 직원에게는 출산장려금 1000만원을 지급하고 외국 유학 기회도 주는 등 직원들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돈이 많이 들어도 꼭 해준다.
그는 “물건을 많이 팔기 위해 그리고 직원들이 좋은 구두를 만들게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며 “경쟁이 치열한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안이다”고 말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성공모델답지 않게 봉사활동에도 인색하지 않다. 지난해 매출 400억원을 기록하며 최고의 경영성적을 올릴 때 그는 매출 1% 이상인 4억5000만원을 기금으로 내놓았다.
얼마 전에는 고액기부자모임(아너 소사이어티)에도 가입해 1억원을 내기로 약정서도 맺었다.
김 대표는 “영업을 직접 해보니 고객과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회사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얘기했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 전에도 일산 소재 군부대에서 자신의 경험을 젊은 군장병들에게 알려주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어엿한 오피니언 리더로서 사회적 책무에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장학금이나 청년 창업지원금으로 나가는 돈만 해도 1년에 4억원이 훌쩍 넘지만 전혀 아깝지 않다”며 “특히 안토니 골프 꿈나무팀을 통해 세계적인 골프선수를 키워내는 게 꿈이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의 강단 있는 목소리에서 자신의 성공 DNA를 다음 세대에 전해주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