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를 물으면 세 가지 답이 돌아왔다. 모르는 이가 들으면 이 무슨 수다인가 싶지만 말하는 이는 조곤조곤했다. 리듬을 탄 느릿한 말투가 선봉을, 드라마틱한 삶이 본진을, 살짝 꼬리를 올린 웃음이 후방을 감싸고 나오니 답하는 이보다 듣고 묻는 이가 편했다. 소설가 신경숙은 그랬다. 우리 나이로 올해 지천명이 된 작가는 전 세계 31개국에 <엄마를 부탁해>가 번역되며 세계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공식 발매 4월5일)됐을 땐 외국인 작가로는 처음으로 초판 10만부가 발행되며 한국문학 신드롬의 주인공이 됐다. 언론에선 한류에 빗대 가슴 벅찬 ‘설렘’을 이야기했고 문학계에선 적극적인 호평이 뒤를 이었다. 그만큼 대단했다. 그 덕분에 3박4일 일정으로 일일이 세기도 힘들 만큼 많은 도시와 도서축제를 찾았다. 그 와중에 단편집 <모르는 여인들>을 출간했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4~5년 된 신인 작가가 아니잖아요.(웃음) 나이 서른에 단편집 <풍금이 있던 자리>를 냈었는데 오히려 그땐 정말 놀랐어요.
당시 반응 덕분에 책상이 생겼고 서재가 생겼고 소설만으로 생존할 수 있었으니까. 제 인생에서 너무 소중한 책이죠.”
(인터뷰가 있고서 보름 후 작가는 ‘2011년 맨 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했다. 첫 여성 수상자이자 한국인 수상자이기도 하다.)
근황이 궁금하다.
지난해 겨울 <모르는 여인들>을 출간하고서 두어달 바쁘게 지내고 있다. 이번 4월에 미국에서 <엄마를 부탁해> 페이퍼북이 출간되는데 그것 때문에 스케줄을 짜고 있고… 새 작품도 구상 중이다.
<엄마를 부탁해> 이후 작품 구상에 달라진 게 있나.
부담스럽지 않냐?(웃음) 그렇진 않고 지금껏 해온 그대로 할 생각이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도 썼고 <모르는 여인들>도 나왔는데 뭘. 내 작품을 해외에 알리는 건 번역자나 편집자들의 힘이 더 중요하지. 난 그저 작품에 매진하고 있다.
31개국에서 번역됐다. 현지 팬레터도 대단할 것 같은데.
답장을 하진 못하는데 요즘은 시스템이 달라져서 팬레터보단 인터넷상에서 접할 때가 더 많다. 대부분 블로그를 갖고 있거나 포털사이트에 리뷰를 쓰거든. 작가와의 만남에 참여해 직접 질문하는 분들도 늘었고.
SNS가 문학에도 도움이 되는 건가.
안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난 없어서 잘 모르겠고.(웃음) 작가가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마도 출판사나 관련된 곳에서 적극적인 것 같다.
1년 전 미국 데뷔 당시에도 그런 마케팅이 효과를 본 건가.
글쎄…. 어쨌든 이전에는 국내 번역원이나 재단에서 작품을 선정해 번역했는데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 출판사가 책을 내겠다고 제의했고 에이전시가 중간역할을 했다. 그 덕분에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미국 데뷔 당시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다.
컬럼비아 대학에 1년 동안 객원연구원으로 있었는데 특별히 뭐가 있었던 건 아니고.(웃음) 8년 동안 연달아 장편 작업을 해서 안식년을 갖고 싶었다.마침 남편(남진우 명지대 교수)도 안식년을 맞아 같이 떠났다. 뭘 배우려고 간 것보다 뉴욕이라는 곳이 문화적으로 많은 게 창출되고 사라지는 곳이어서 그런 곳에서 1년 쯤 지내보면 새로운 걸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책 나오는 시점하고 맞물렸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던지 출판사에서 계속 스케줄을 잡아 제대로 쉬진 못했다.
뉴욕에서의 경험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있던데.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뉴욕에서 보고 만난 이들이 지금껏 만난 이들과 너무 다르더라고. 모국어를 떠나 사는 사람들의 생활, 이민자의 삶,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열정, 뉴욕이란 공간에서 탄생되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경험했다. 그곳에서 만난 이들이 떠오르는 걸 보면 언젠가는 작품에 반영될 것 같다.
새벽 3시부터 오전 9시까지…집필에 들어가면 두문불출한다던데.
결혼(작가는 1999년 부암동의 하림각에서 결혼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 교수는 작가의 셋째 오빠와 고교 동창이다)하기 전에는 혼자 시간을 썼기 때문에 쓰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그렇게 불규칙했었지. 온종일 그랬다. 외부와는 단절이지. 전화기도 빼놓고 모든 약속도 접고 그래서 소식 끊긴 친구도 많고.(웃음) 냉장고를 마치 전쟁 난 것처럼 꽉 채워놓고 시작했으니까 지금도 비슷하긴 한데 결혼 후에는 나만을 위한 시간이 아니니 새벽 3시에 일어나 오전 9시까지 작업한다.
그러곤 9시반에 동네 요가원에서 요가도 하고 점심 먹고 낮잠도 잔다. 소설은 시(詩)가 아니어서 그렇게 시간을 내주지 않으면 완성할 수가 없다.
왜 새벽인가.
고요하고 아무것도 없고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한 서너 시간쯤 지나면 동이 트는데 창가에 서리는 새벽빛도 너무 좋거든. 환해지면 해가 뜨고…. 그 시간까지 작업하는 게 내겐 맞는 것 같다.
최근엔 외국 방문이 많아졌는데, 잠자기가 쉽진 않겠다.
시차적응이 그리 어렵다고 생각지 않았는데 무뎌서 그랬던 것 같더라고. 3박4일 일정으로 1년 동안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인터뷰한다는 게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지금은 감기 때문에 부었는데 한동안 얼굴이 좀 부어올라서….(웃음)
최근까지도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가 비일비재하다.
엊그제에도 홍콩의 한 신문과 인터뷰했는데, <엄마를 부탁해>의 주요 장소가 서울역이라고 그곳에서 사진을 촬영하자더라고. 그 때문에 그날 밤부터 감기가 심해졌다.
감성? 작가에게 그건 기본 아닌가
작업할 때 중요시하는 게 있을 법한데.
소설의 한 문장은 모든 걸 다 알아야 나온다. 예를 들어 내 서재엔 인문학이나 문학 서적만 있는 게 아니라 잡다한 분야의 책이 모두 꽂혀 있다.
작품에 거북이가 등장하면 거북이 기르는 법, 낚시꾼이 등장하면 낚시 입문까지.등장인물의 앞뒤를 다 장악해야 소설의 문장이 나온다. 그러니 끊임없이 취재해야지. 19세기가 배경이었던 <리진>은 문장을 완성하려고 파리도 몇 번씩 다녀왔는 걸. 두 줄 쓰려고 이곳저곳 두 달을 뒤지고 다니기도 한다.
소설은 픽션 아닌가.
어떤 소설을 쓰든 바탕은 현실이다. 자료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진행되는 이야기가 정말 좋은 소설이겠지. 19세기 이야기를 쓰는데 당시에는 이러이러했다고 자료가 통째로 들어가 있다면 그건 소설이 아니라 자료 아닌가. 하지만 자료가 주인공의 삶에 스며들어 일상이 되면 그게 좋은 소설이다.
흔히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소설가란 수식어가 붙는데.
그러게. 그래서 가끔 나도 정말 내가 감성적인가 돌아볼 때가 있다.(웃음)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수식어인데 남들에겐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소설가에게 감성적이라는 건 칭찬 아닌가.
좋은 것이지. 하지만 작가에게 감성은 기본이지 대표적인 게 될 순 없다. 어떻게 서정성과 감수성만 갖고 27,8년을 작가로 살 수 있나.
그럼 어떤 감각이 중요한 건가.
스스로 어떻게 얘기됐으면 좋겠냐고?(웃음) 동시대를 살면서 슬픔에 빠진 이들 곁에 작품으로 남을 수 있는 작가가 되길 바란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라든지… 공감이라든지… 그렇게 기억되길 바란다. 그러니 감수성이 기본이어야겠지.
영화, 미국 에이전시가 진행하고 있다 작품 중에 타 장르로 재탄생된 작품이 많은데, 구상 때부터 염두에 두는 건가.
연극이나 뮤지컬로 새롭게 태어나길 가장 바랐던 건 <리진>이다. 특히 영화는 굉장히 망설이곤 했는데 <리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약은 됐는데 영화화가 안되네.(웃음) 계약기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새로운 제작자와 상의해보고 싶다.
<엄마를 부탁해>는 연극에서도 인기를 얻으며 붐업됐는데.
엄마를 잃어버리고 난 후 가족이 한 사람씩 무대에 올라 그동안 엄마와 나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차례차례 말하는 구성인데 연극은 작품을 쓸 때부터 생각했던 무대였다.
영화화 제의도 있었을 텐데.
아직은… 첫째 이유는 제의가 너무 많아서 선택하기 힘들기도 하고, 또 하나는 미국 에이전시에서 영화판권은 깨끗한 상태로 기다려 달라고 해서.(웃음)
가장 소중한 작품을 꼽으라면.
<엄마를 부탁해>를 염두에 둔 질문인데.(웃음) 그 작품은 국내에서 100만부를 넘겼을 때 이미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정말 놀랐었지. 서른이 되기 직전에 쓴 작품인데… 서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강박증이 있었거든. 그땐 방송국 음악프로그램 원고를 써서 먹고 살았는데 29살이 되고서 거울을 보니 서른이 된다는 게 암담했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해보고 싶은 일을 위해서 한 번도 깊이 몰두해보지 않고 서른이 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고 1년 동안 썼던 단편집이 <풍금이 있던 자리>다. 또 마침 그때가 아버지 회갑이었는데 그래서 회갑날에 <풍금이 있던 자리>를 갖고 가려고 굉장히 서둘렀다. 그렇게 초판 찍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놀랍게도 재판을 찍는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전업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너무 소중한 책이다.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는 건 성공했다는 것소설가가 꿈이었나.
음… 고등학생 시절에 너무 오랫동안 학교에 안 나가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신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닌 학교가 산업체 특별학급(작가는 정읍여중을 졸업하고 구로공단에서 일하며 영등포여고 야간부 산업체특별학급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했다)이어서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에 갔거든. 가면 부기, 주산을 배웠다. 하고 싶지 않으니 가지 않았지.(웃음) 선생님께 그렇게 말했더니 나와서 하고 싶은 일 하라더라고. 그 대신 학교를 너무 오랫동안 안 나왔으니 반성문을 써와라 했다. 학교에 나가 그냥 책 읽었다. 그러다 선생님이 불러 가봤더니 소설가가 돼 보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그 전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게 꼭 소설은 아니었거든. 선생님 말씀에 꿈이 구체화됐다. 그 학교에서 혼자 대학에 가 1985년에 ‘문예중앙’이란 잡지로 등단했는데, 그 잡지를 들고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정말 소설가가 됐다고 깜짝 놀라셨다. 반성문이 적힌 노트를 보고 소설가를 이야기했다고.(웃음) 난 그걸 하늘에서 떨어진 별처럼 받았다.
돌아보면 어떤가. 성공했다고 생각하나.
그런 질문을 가끔 받는다.(웃음) 내 책상에 앉아서 모든 시간을 자유롭게 얽매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는 걸 느낄 때, 작품을 쓸 때도 쓰는 시간에 나를 모두 내 줄 수 있다는 걸 느낄 때, 내가 성공한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앞으로도 그러고 싶고 그러면서 독자들과 함께 근사하게 나이 먹고 싶다. 언제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작가. 그런 기다림과 기대보다 좀 더 앞선 작품을 써야 할 텐데.(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