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첫 번째 토요일 점심, 상암DMC의 팬택계열 사옥으로 박병엽 부회장을 찾아갔다. 박 부회장은 커다란 약봉투를 들고서 기자를 맞았다. 1년 전 심장혈관 스탠스 시술까지 받은 박 부회장은 지금도 약을 달고 산다. 과로가 겹쳐 몸이 많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쉴 틈이 없다고 했다. 약으로 버티고 있는 셈이었다.
사실 한 달 전인 2월7일에도 박 부회장을 만났다. 바쁘긴 하지만 너무 오래 만나지 못했으니 얼굴이나 보자며 시간을 냈다. 그런데 몸이 워낙 불편하다고 해 차 한잔만 나누고 나왔다. 한 달 열흘째 감기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몸으로 바로 해외 출장을 가야 한다며 걱정하던 그였다. 그런데 한 달 뒤에도 여전히 약봉투를 들고 있다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누가 그 건강했던 박 부회장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낙천적 성격의 박 부회장은 타고난 강골이다. 말술을 마시고도 다음날 쌩쌩한 얼굴로 손님을 맞는 그다. 타고난 건강과 밝은 성격 탓에 그는 영업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평생 영업만 할 수 없다며 팬택을 세웠다. 창업 초기는 물론이고 여유가 생겼을 적에도 밤늦게까지 고객들을 상대하고 새벽에 회사에 출근해 업무를 챙겼다. 삐삐회사 시절 남들이 한창 출근할 시간에 차 한잔 마시러 찾아가면 그는 벌써 한 차례 미팅을 끝내고 환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그 열정과 성실함으로 작은 삐삐회사를 글로벌 강자들과 어깨를 겨루는 일류 스마트폰 회사로 키워냈다. 그런 그에게 약봉지를 끼고 살게 만들다니….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뛰어난 CEO에게 주는 보상이란 이런 것인가. 가슴이 답답했다.
365일 일하는 CEO
점심 약속을 했던 터라 함께 구내식당으로 올라갔다. 토요일인데도 많은 직원들이 나와 있었다. 박 부회장은 근처에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 쉬는 날 일하러 나온 직원들이 한참을 헤매고 다녀야 해서 토요일에도 식당을 열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5년여 전 회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팬택 임직원들은 휴일을 마다하고 출근했다.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두가 머리를 맞댔다. 자장면을 시켜먹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자장면 회의를 했으니 점심시간이면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토요일에도 구내식당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박 부회장은 먼저 줄을 선 직원들 뒤로 식판을 들고 섰다. 오랫동안 겪어서인지 직원들은 전혀 어색한 표정을 짓지 않고 수다를 떨며 밥을 타갔다. 창업 때나 지금이나 박 부회장은 임직원 모두에게 영원한 맏형 같은 존재이다. 위기에 처했던 팬택이 워크아웃에 들어가자마자 오히려 이익을 내고 불과 5년 만에 워크아웃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힘은 거기서 나온 것 같았다. 어느 누가 회사가 어렵다고 한솥밥 먹고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내던 CEO를 등질 수 있을까.
비빔밥 한 그릇을 나눈 뒤 다시 사무실로 갔다. 커피를 기다리는데 박 부회장 자리 옆 벽면에 메모처럼 붙여놓은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업무가 저리 많담’ 하는 생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업무에 관한 게 아니라 좌우명이었다. 한 가지도 아니고 일곱 가지나 됐다.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도 있고 칭기스칸의 한 대목도 있었다. 틈 날 때마다,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읽는 것이라고 했다. 박 부회장은 그 가운데 특히 <밀레니엄맨 칭기스칸>(김종래 저)에 나오는 구절을 즐겨 본다고 밝혔다.
박 부회장이 와신상담을 한 이유는
좌우명이 아니라 와신상담이었다. 벽에 붙인 글귀 하나하나가 부차의 섶이었고 구천의 쓸개였다.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 부차에게 당한 치욕을 잊지 않으려고 쓸개를 핥았듯 박 부회장은 이 글들을 읽으면서 팬택의 부활을 꿈꿨던 터였다. 그렇다면 박 부회장의 부차는 누구였을까.
워크아웃 당시의 상황을 묻자 박 부회장은 지난 얘기는 접어두자고 했다. 이젠 편하게 살고 싶다고도 했다.
사실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전 팬택은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여러 경쟁자를 제치고 국내에서 확실한 휴대폰 3강 자리를 굳혔다. 외환위기 직후 잘 나가던 모토롤라와 전략적 제휴를 해 기반을 다진 뒤 현대큐리텔을 인수했고 2005년엔 SK텔레텍까지 합병해 연간 1000만대 이상을 팔 때였다.
경쟁사 임직원들까지 팬택의 미래를 밝게 보고 몰려들 정도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돈줄이 마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대출이 다 막혔다. 2006년 중반이니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표면상으론 모토롤라 레이저가 워낙 히트를 쳐 휴대폰 업체 대부분이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설득력은 약했다.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데. 30대 초반에 만들어 젊음을 바친 회사가 아닌가. 내 분신 같은 회사인데….’
박 부회장은 고민 끝에 워크아웃 신청이란 승부수를 던졌다. 4000억원 상당의 지분 전체를 내놓고 회사를 살려달라고 했다. 다만 자신이 만든 회사이니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며 경영만은 맡겨달라고 했다. 그때 돈에 대한 미련은 접었다.지금도 박 부회장은 ‘정직하게 노력해서 번 돈만이 향기가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좌우명 중에는 돈에 관한 네덜란드 속담도 있다.
좌우명 중에 박 부회장의 성향이나 이력을 잘 나타내는 글은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김덕수 저)에 나오는 대목인 것 같다. 그는 지방대(호서대) 출신이라고 주눅 들지 않았고, 맨주먹으로 시작해 대기업을 만들었으며, 워크아웃 위기에서 모든 것을 내던져 회사를 회생시키고 자신의 명예까지 되찾았다. 약을 달고 살지만 일을 위해선 몸을 아끼지 않는 것까지 이순신을 빼닮은 듯했다. 벽에 붙은 대목을 보자.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말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로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 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말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 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말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누군가 ‘월화수목금금금’이라고 했지만 박 부회장도 연중무휴로 출근한다. 그것도 월요일엔 새벽에 출근한다. 오전 6시에 회의를 주재할 정도다. 토요일도 일찍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임직원 대부분이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는’ 이라며 쉬는 일요일조차 나와 사무실을 지킨다.
그래야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무실 바로 위가 구내식당이니 점심시간도 짧다. 지척이 하늘공원이지만 산책하러 가는 것조차 그에겐 사치다. 부족한 운동을 박 부회장은 점심 식사 후 서서 업무를 보는 것으로 해결한다.
“형 이거 참 좋아. 이렇게 하면 높이가 딱 맞거든.”
누구에게나 붙임성이 좋은 그의 말투다. 그러면서 박 부회장은 의자 옆에 있던 궤짝을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 위에 키보드를 얹으니 서서 컴퓨터를 작동하기에 딱 좋은 높이가 되었다. ‘창업자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월 초 만났을 때 나눴던 출장 얘기가 궁금했다. 그간 뉴욕도 다녀오고 독일도 다녀오고, 한 달 사이에 여러 곳을 다녔다고 했다. 그의 동선 자체가 비밀일 수 있기에 어떻게 다녀왔는가에 대해서만 물었다.“뉴욕은 기본으로 무박삼일이다. 비행기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가 회의 마친 뒤 되짚어 돌아온다.”
남들은 쇼핑하고 관광하는 것을 먼저 떠올릴 해외 출장이 이쯤 되면 중노동이다. 그것도 오랜 감기로 골골하며 다녀왔다고 하니…. 무박삼일은 그래도 낫단다. 일정이 바쁘면 무박사일도 불사한다고 했다. 잠은 비행기로 이동하는 중간에 칼잠으로 해결한다고.
“이번엔 그래도 좋았어. 1박3일로 다녀왔거든.”
최근 새로운 업체와 제휴하려고 다녀왔다는 독일 출장을 놓고 그는 껄껄 웃었다. 비행기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루를 자고 왔다고 했다.
원대한 이념, 통 큰 결단
삐삐회사 시절 박 부회장에게 회사이름을 팬택이라고 지은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조그마한 중소기업에선 듣기 어려운 답변을 들었다. “기술의 범용화를 통해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뜻을 담았다”는 것이었다.
몇 번의 M&A를 거쳤고, 또 워크아웃이란 엄청난 고비를 넘겼지만 이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사무실에 붙여 놓은 창업정신 머리 부분에 ‘기술의 범용화를 통해 인류 생활의 편의를 증대한다’는 미션이 보였다. 그만큼 박 부회장의 팬택은 단순히 돈을 버는 회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팬택에 더 애착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워크아웃 시절 박 부회장은 임직원에게 이런 메일을 보냈다.
“제 필생의 ‘꿈’은 우리 팬택이 영속하고 더욱 강한 기업이 되어, 궁극적으로 ‘존경받는 기업’을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또 그 안에 담겨진 우리 모두가 서로를 자랑스러워하며, 모두가 성공한 인사라는 그런 삶을 살았다는 자긍을 갖게 하고 싶습니다.”
워크아웃에서 벗어난 지금 많은 사람들이 팬택의 지분을 누가 살 것인지 궁금해한다.
박 부회장은 이에 대해 “경영권은 없어. 경영 책임만 있을 뿐이지”라고 강조한다. 그가 생각하는 경영권은 회사를 책임지고 제대로 운영하는 권한이지 이익을 독점하기 위한 권한이 아니란 얘기다.
그래도 법률적 구분은 필요할 것 같았다. 이에 대해 그는 “지분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미 여러 곳에서 다녀갔다고 한다. 국내 투자자도 있고 외국 투자자도 있고. 모두가 돈 놓고 돈 먹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회사 일 하기도 바빠서란다.
“형, 애플이 작년 4분기에만 20조원 가까운 이익을 냈어. 그 무서운 놈들이 싸우자고 나왔으니 삼성전자는 또 가만히 있겠어. 완전히 전쟁판이야. 어지러워. 힘들고 짜증도 나고….”
워크아웃을 졸업했지만 그가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사무실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유능한 임원들한테 맡기고 건강부터 챙겨야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 임원들 진짜 똑똑하고 일도 엄청 잘해. 그렇지만 지금은 내가 나와 있어야 해.”
글로벌 거인인 애플, 삼성과 생존을 걸고 다투는 만큼 빠른 의사 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팬택 지분 인수는 M&A가 시작되고 나서나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만큼 박 부회장은 경영권 자체에 대해선 담담한 입장이다.
“회사를 키울 수만 있다면 어떤 자금이 들어오든 누가 인수하든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팬택의 ‘창업자(founder)’ 아니야? 그걸로 만족해. 직원들 장래를 열어줄 수만 있다면 누가 들어와도 그만이야. 내 자식과 같은 회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