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매체를 공동 창업한 아리아나 허핑턴은 정치 쪽을 기웃거린 반 언론인 - 반 정치인이다. 전 공화당 상원의원의 부인이자 진보 성향의 정치평론가, 작가, 라디오쇼 진행자, 가십 칼럼니스트 등 화려한 백그라운드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 뒤에는 ‘상승 지향적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한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허핑턴을 ‘(날개를 발명한) 이카루스 이후 가장 상승 지향적인 그리스인’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950년 그리스 아테네 태생인 그녀는 16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 거튼칼리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케임브리지대 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허핑턴은 21세때 21세 연상이던 더 타임스 칼럼니스트 버나드 레빈을 만나며 인생에 전환을 맞았다. 2004년 레빈이 사망했을 때 허핑턴은 그에 대해 ‘작가로서 멘토였으며 사상가로서 롤모델이었다’고 회고했다.
1985년 영화 제작자이자 공화당 정치인이던 마이클 허핑턴을 만나 이듬해 결혼하며 현재의 허핑턴이란 성을 따왔다. 당시 결혼식에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비롯한 사회저명인사 500인이 참석하고 유명 앵커 바버라 월터스가 신부 들러리를 섰다. 남편 마이클은 1994년 상원의원에 당선됐으나 둘의 가정생활은 이후 3 년만에 파경을 맞았다. 야망이 컸던 허핑턴은 이후 직접 주정부 선출직에 출마도 했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에 200만 달러를 들고 시작한 사업이 허핑턴포스트이다.
허핑턴 포스트는 사실 초창기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최초의 미디어 블로그였던 드러지 리포트를 벤치마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아나 허핑턴의 네트워크가 여기에 보태지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월터 크롱카이트 등 당대의 쟁쟁한 논객들이 이 언론에 ‘무료봉사’로 글을 올리게 만든 것이 바로 허핑턴의 능력이었다. 지난 1월 르몽드와 제휴를 맺은 것도 허핑턴의 인맥이 큰 역할을 했다. 프랑스에 새로 설립한 허핑턴포스트 - 르몽드의 합작회사에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 부인인 안 생클레르가 편집장을 맡았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허핑턴포스트는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 진출을 확대하는 한편 아시아 쪽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캐나다나 프랑스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한국에서 제휴처를 확대하는 데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허핑턴 창업자는 “미래 저널리즘은 우리가 이상적으로 갖고 있는 기존 저널리즘의 근본적인 덕목들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IT라는 새로운 장식을 덧붙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뉴 미디어와 올드 미디어는 통합될 수밖에 없다”며 “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올드 미디어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