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美 PBS·디스커버리채널·링크TV 프로그램 진행자 (2006년 미국 인기 프로그램 '서바이버' 우승자)
“절 보고 실망하지 않으셨나요? TV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키가 작아서….”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겉치레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치고도 남았다.
2006년 미국 CBS 인기 프로그램인 ‘서바이버’에서 5만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전무후무한 아시아계 우승자가 된 권율(36) 씨 얘기다. 지난 10월12일 세계지식포럼에서 열린 그의 특별 강연에는 유독 젊은 청중들이 몰렸다.
그는 두 가지 리더십 모델을 제시했다. 하나는 과학자나 변호사처럼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한국의 부모들이 늘 강조하는 바로 그 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미술과 음악, 그리고 기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능력을 가진 ‘르네상스 모델’을 따르는 것이다. 스스로를 르네상스 모델 리더라고 칭한 권율 씨는 “아시아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델이지만 이제 한국에도 르네상스 스타일의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모두 발언을 생략한 채 강연을 모두 질의응답으로 이어나갔다. 영어로 진행된 강연 내용을 최대한 현장의 맛을 살려 정리해봤다.
본인의 삶에 대해 얘기해 달라
서울대를 나온 아버지는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왔다. 나는 1975년에 미국 뉴욕 플러싱에서 태어나 6살 때 캘리포니아로 이사했다. 로펌 변호사, 조 리버먼 상원의원 입법보좌관, 연방 항소법원 판사 시보, 맥킨지 경영컨설턴트, 구글 전략담당 등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5년 전 '서바이버' 프로그램 출연 제안을 받아 2006년에 우승했다. 아직까지 아시아계 미국인 가운데 우승자는 내가 유일하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 대선 캠페인에 참여했고,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연방통신위원회(FCC) 소비자보호 담당 부국장으로 일했다. 올 초 PBS에서 '아메리칸 리뷰' 진행자 제안을 받아 일하게 됐다. 미국에 관한 쇼 가운데 한국계 미국인이 진행하는 유일한 프로그램이다. 한국계 미국인의 지위를 높이고 미국 전역에 우리도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 보여주기 위해 프로그램을 맡았다.
다양한 여정을 걷게 된 계기가 있나
두 가지 경험이 내 인생의 방향을 정했다. 어렸을 때는 부끄럼을 많이 탔다. 한국계라 따돌림도 당했다. 항상 조금은 스스로를 창피하게 여겼다. 심지어 밖에서 화장실도 가기 두려워할 정도였다. 어느 날 너무 행복하지 못하고 고립돼 있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스스로 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형의 친한 친구가 이사를 갔는데 외로움에 자살했다. 앞이 창창한데 왜 자살할까 생각했다. 내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극복하지 않는다면 같은 길을 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 도전 과제를 만들어 극복하기로 노력했다. 실패 경험도 많았지만 실패해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얻으면서 다시 도전했다. 변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경험은 대학 룸메이트이자 가장 친한 친구가 2학년 때 백혈병에 걸려 죽은 일이다. 당시 백인 골수공여자는 많았지만 아시아인 골수공여자는 찾기 힘들었다.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좋은 학교와 직업 찾는 데 집중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 주는 데는 관심 갖지 못했다. 그 사건 이후로 삶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변호사가 돼서 다른 사람 특히 아시아계 미국인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10년간 갖고 싶은 직업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5년, 10년짜리 계획을 세우는 게 좋은 사람도 있다. 저는 해마다 계획이 달라진다. 새로운 기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장기적 목표는 한결같다. 다른 사람, 특히 아시아계 미국인이 꿈을 성취하도록 돕고 싶다.
당신 같은 르네상스 리더가 전문가 리더와 어떻게 경쟁할까
특정 분야 전문가와 일대일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국적 기업 CEO는 전 세계 지사를 갖고 있어 다양한 지식, 폭넓은 이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다.
'서바이버 시즌3'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사실 내가 신청한 게 아니라 초청을 받은 것이다. CBS에서 출연진을 인종별로 팀을 짰다. 미국 TV 역사상 이런 시도는 처음이었다. 아시아계 사람들 특성 때문인지 출연 신청을 많이 안했다. 나처럼 아시아계 출연자 대부분은 초청받은 사람이었다. 출연 할까 말까 생각을 많이 했다. 리스크가 컸다. 출연 결정을 했던 것은 아시아계 미국인 특히 남성에 대한 편견, ‘공부벌레에 영어 못하고 체력은 약하다’는 편견이 내 삶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대나무 천장’이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골드만삭스나 맥킨지 같은 좋은 회사를 취직한 이후 승진을 해도 결국 리더는 되지 못한다. 아시아계 남성과 여성은 리더가 될 수 없다는 편견 때문이다. 나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리더십이나 소통 능력이 부족하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당시 아버지는 ‘미쳤다’고 했다. 창피당할 수 있는 출연이라고. CBS는 부모에게도 동의서를 요구했다. 아버지가 사인을 하려하지 않자 “1500만 명 시청자에게 노출될 것이다. 수천명의 잠재적 한국인 신부에게 노출되는 것”이라고 해서 싸인 받았다.
'서바이버'에서 우승한 비결은
변호사 출신이라 설득을 잘 했고 컨설턴트여서 전략을 잘 세웠다. 정치권에서 일해서 연합을 만드는 데 능수능란했다. 항상 주류에 소속되지 못했던 경험들이 다른 사람이 위협받거나 배제된다는 느낌을 가질 때 공감하면서 그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도움이 됐다. 결국 TV를 이용해서 한국 사람도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리얼리티 쇼의 폐해는
쇼에 출연해 잘 못하고 인기를 끌지 못해 내적 손상을 입는 젊은이들이 많다. 자아가 폭발할 수 있다. (출연 희망자들이) 유명세에 집착하게 되면 공허한 인생이 된다. 하지만 다른 목표의식이 있다면 출연해도 좋다. 나는 TV에서 계속 유명세를 타지 않아도 굉장히 행복했다. ‘서바이버’ 출연의 가장 큰 성과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한국 아버지였다. 출연 이후 “(네 능력을)의심해서 미안하다, 남자가 됐구나”라고 해서 둘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한국의 많은 어린이들이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공부 스트레스를 받으며 행복하지 않은 방향으로 인생이 진행된다. 한국에는 ‘침묵의 문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항상 이야기한다. 외롭거나 두렵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것 모두 괜찮다고. 다른 사람도 다 겪는다고.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야 한다.
한국계 미국인이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는데
내가 자랄 때 우리 부모님이 한국말을 하면 창피했다. 주류 사회에 못 들어가는 게 답답했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인 커뮤니티에서는 내가 너무 미국인 같다고 생각했다.
한국계 미국인은 늘 선택해야 한다. 그냥 한국인 커뮤니티에 머물거나 아니면 ‘바나나’라고 불리며 백인 커뮤니티에 합류해야 한다. 한국인 커뮤니티에 머물면 지역사회 밖에서는 주류화되지 못한다. 나는 둘 다 틀렸다고 생각한다.
두 문화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이라는 전체 사회에서 리더십 능력을 배우고 멘토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서 한국인이라는 문화적 유산을 그대로 간직해야 한다.
(바나나라고 불리는) 주류화 되는 한국계 미국인은 한국이라는 뿌리를 버린다. 지나치게 한국계이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류화해야 하지만 다른 한국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한국인들을 멘토링해야 한다.
나는 한국계 미국인 리더십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제 모두가 협력해서 한국계 유산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 36세 권율, 변신 또 변신
1975년 뉴욕 플러싱서 출생 스탠포드대 졸업
2000년 예일대 로스쿨 졸업/로펌 변호사/조 리버맨 상원의원 입법 보좌관/연방항소법원 판사 시보/맥킨지 경영컨설턴트/ 구글 전략담당
2006년 '서바이버' 프로그램 출연 아시아계 최초 우승
2008년 버락 오바마 대선 캠페인 참여 미 연방통신위원회(FCC) 소비자 보호 부국장
2011년 PBS '아메리칸 리빌드' 진행자 링크TV 주간 뉴스프로그램 '링크아시아' 진행자
[조시영 /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psy75@mk.co.kr│사진 =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