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검색사이트 구글에서 일한 것도 모자라 8억 명의 사용자를 둔 페이스북에 스카우트된 사나이. 한국계로서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 이지별(41) 씨 얘기다.
경력부터 남다르다. 서울에서 태어나 10살 때 브라질 상파울로로 건너간 그는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광고,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모교인 파슨스를 비롯해 MIT, 하버드, 뉴욕현대미술관(MoMA), 구겐하임 박물관과 서울대, 홍익대에서 특별강연을 했다.
하지만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그가 전 세계인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정작 따로 있었다.
지난 2005년부터 그는 뉴욕시 광고판에 말풍선 스티커를 ‘몰래’ 붙이고 돌아다녔다. 이른바 ‘버블 프로젝트’다. 말풍선 스티커가 마치 만화 대사가 적히는 구름 모양의 거품(Bubble)을 닮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가 스티커를 붙이고 간 뒤 사람들은 비어 있는 말풍선 안에 무엇인가 적어 넣었다. 흰 도화지를 보면 뭔가 끄적이고 싶기 마련이지 않는가.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낙서를 했다. 곧 비어 있던 스티커 5만여 개는 차례차례 문장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몇몇 문구들이 걸작이다. ‘동물의 권리나 보호해라(모피 코트 광고)’, ‘나는 음악을 훔쳤다(MP3 광고판)’, ‘인도에서는 네가 신성할지 몰라도 여기는 인도가 아니야(우유 광고판에 있는 흰 소)’, ‘불법 동영상을 다운로드 받았어(IBM 컴퓨터)’ 등 사람들은 빤한 광고를 재치 있게 비꼬기도 하고 사회를 풍자하기도 하면서 통쾌함을 느꼈다.
이지별 씨는 돌아다니며 ‘멍석’을 깔아 주었고 창조성을 발휘할 공간이 생긴 시민들은 열광했다. 런던, 암스테르담 등 세계 곳곳에서 ‘수상하지만 유머러스한’ 말풍선을 찾아볼 수 있었다. 급기야는 말풍선 스티커를 쫓아다니며 채워 넣는 팬들도 생겼다. ABC뉴스, 뉴스위크, 와이어드 등의 언론들이 앞 다투어 그의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수만 달러짜리 광고판들은 아예 그의 말풍선을 따라했다. 6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버블 프로젝트’의 기획자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이씨는 “그 때 용돈을 모은 돼지저금통을 털어 손수 스티커를 만들었고 지금도 틈나는 대로 스티커를 붙이고 다닌다”며 웃었다.
매일경제가 주최한 제12회 세계지식포럼에서 그는 단 30분간의 강의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까무잡잡한 얼굴, 붉은 셔츠, 검은 재킷, 청바지와 갈색 단화 차림의 그가 연단에 섰다.
첫마디는 반갑게도 한국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지별입니다.” 그는 고향인 한국에 와서 너무나 기쁘다는 소감을 밝히며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강연을 통해 ‘창의적인 일을 벌여보자’고 호소했다. 먼저 사람들이 어떤 활동을 하며 인생을 사는지를 도표를 통해 제시했다. 그의 구분에 따르면 일 33%, 잠 29%, 여가 25%, 기타 13%로 나누어진다. 여가생활은 영화 보기, 운동, 여행 등이 포함된다. 기타 활동은 줄 서기, 세금 납부 등이다.
이씨는 “사람들은 인생의 29%를 잠으로 보낸다”며 “나머지 깨어있는 71%의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고 했다. 깨어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지가 행복을 결정하고 다른 이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는 직업적인 삶(Professional Life)과 개인적인 삶(Personal Life)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씨는 “일할 때는 돈만 벌고 사생활은 사랑하는 것으로 명확히 구분 짓는데 이 둘을 접목시킨 멋진 지점(Awesome spot)을 찾아내야 한다”고 했다.
버블 프로젝트로 창의성 알려
그에게 있어 ‘멋진 지점’은 바로 버블 프로젝트였다. 개인적인 흥미로 시작한 일이지만 그의 창의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또 이런 프로젝트가 알려지며 결국 새로운 직장에도 입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버블 프로젝트를 하기 전에도 나는 잘나가는 광고 회사 디자이너였다. 돈도 잘 벌고 큰 창이 있는 사무실도 있고 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혁신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대형 광고업체에서는 긍정적인 아이디어들이 테스트 단계에서 다 죽었다. 오직 검증을 거친 안전한 것만이 뉴욕 시내를 채우고 있었다. 내가 볼 때는 그것이 지적으로도 지루하고 시각 공해(Visual Pollution)였다”고 이야기했다.
버블 프로젝트 말고도 ‘새로운 박물관’이란 프로젝트도 2년 전 그가 기획한 ‘멋진 지점’이다. 한 광고판 위에 핑크빛 페인트가 끼얹어졌다. 처음에는 몇 줄의 선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페인트 양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광고판이 페인트로 뒤덮인 뒤에는 과연 무엇이 나타날까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블로그에 광고판 사진을 올리기 시작하는 이들도 생겼다. 핑크빛 페인트 위로는 이씨가 광고하려던 건물의 모습이 마침내 그려지기 시작했다. 박물관이 개관하는 때에 맞춰 시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지난 10월로 페이스북에 합류한지 4개월째를 맞았다. 강연 중 그는 4개월을 4년이라고 잘못 말했다. “하루가 1주일 같다 보니 제가 실수를 했네요. 하지만 배운 게 워낙 많아 정말 4년 정도는 지난 것 같습니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일을 하며 느낀 점을 세 가지 꼽았다. 첫째, ‘내 일에서 재미를 찾으면 좋은 일들이 생긴다(When I have fun with my work, good things happen).’ 둘째, ‘개인적인 일과 직업으로서의 일은 상호 보완적이다(Personal and professional project complement each other).’ 그는 “어깨 너머에서 나를 감시하는 상사에 신경 쓰지 마라. 개인적인 열정을 발휘하면 그것이 결국 내 커리어에도 도움이 된다”고 충고했다. 셋째, ‘아이디어는 아무것도 아니다. 실행이 모든 것이다(Ideas are nothing, doing is everything).’
그는 일에서 개인적인 성취감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고 했다. 페이스북의 독특한 문화 덕이다. 이씨는 “페이스북에서는 인턴이나 임원, 심지어는 마크 주커버그 대표 등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고 했다. 시간만 자유로운 게 아니다. 공간도 위계질서가 없고 수평적이다. 페이스북의 캘리포니아 본사는 열린 공간으로 돼 있다. 그가 보여준 슬라이드 속 사진에는 책상 사이 파티션이 없었다. 그가 책상 하나를 가리켰다. “마크(주커버그)도 여기 어디쯤 일하고 있겠네요. 직원들이 와서 말도 걸고 그럽니다.”
이씨는 페이스북의 모토도 들려줬다. ‘빠르게 움직여 혁신을 꾀하라(Move fast and break things)’, ‘다 해내는 것이 완벽한 것보다 낫다(Done is better than perfect)’ 등이 그것이다. 그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수도 용인하는 ‘겁 없는(fearless)문화’가 창조력의 원천이라고 했다.
그는 누구든 개인적 삶과 커리어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페이스북을 활용하라고 권했다. 그는 한 미국 여성의 사례를 들었다. 태풍이 강타한 알라바마주. 한 여성이 이웃들의 고통스러운 현장을 페이스북으로 전달했다. 그녀는 폐허 속에서 제 손으로 사람들의 시체도 건져냈다며 울먹였다. 그러나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태풍이 할퀴고 간 자리에 남은 물건의 주인을 찾으려 했다. 아기가 생겼을 때 자궁 모습을 담은 사진, 손으로 직접 쓴 카드 등 소중한 추억을 되찾아 주려는 그녀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다. 이 동영상을 보러 수십만 명이 페이스북을 방문했고 결국 많은 물건이 주인 품으로 돌아갔다. 이씨는 “플랫폼의 힘은 누구든 활용할 수 있다”며 “평범한 한 여성도 자신의 삶 속에서 ‘멋진 지점’을 찾아냈다”고 했다.
강연을 마친 그를 붙잡고 궁금증 하나를 풀었다. ‘지별’은 무슨 뜻일까. 이름만 보면 여성이라 오해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예쁜 이름이다. 사실 그의 이름은 시인이신 어머니가 지어준 순 한글 이름이라고 한다. ‘지’는 달리 뜻이 없고 ‘별’은 말 그대로 하늘에 뜬 별처럼 빛나라는 바람을 담고 있단다. 떠나는 그와 명함을 교환했다. 하얀 종이에 이메일 주소 한 줄만 달랑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지별의 명함은 그의 삶을 압축해서 보여 줬다. ‘JiLee@pleaseenjoy.com(부디 즐겨주세요).’
[서유진 / 매일경제 증권부 기자 suhyujin@naver.com│사진 =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