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박수 한번 주세요.”
2008년 2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기자실. 말이 기자실이지 금융연수원 강당에 수백 명의 기자들을 몰아넣은 아수라장이었다. 그 어수선한 곳에서 이명박 정부(MB정부)가 추진할 핵심정책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지고 있었다.
산업은행 민영화도 그중 하나였다. 현직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인 곽승준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위원이 단상에 올라 열심히 정책을 설명했다. 하지만 기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정치부 기자들이 이해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전문적이었던 탓도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구성진 곽 교수의 한마디가 장독대 깨지는 듯 균형을 깼다. “자, 박수 한번 주세요” 폭소가 터지면서 분위기가 풀어졌다. 적지 않은 기자들이 그때 그 장면과 그 음성을 기억하고 있다.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을 거쳐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는 곽 위원장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평가한다. 아닌 게 아니라 심야 과외교습 금지를 비롯해 국민연금,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등 MB정부에 들어선 후 그가 건드렸던 사안들에는 무수한 뒷말이 따랐다. 하지만 스스로를 돋보이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일반 정치인과는 뭔가 다른 게 있다.
MB정부의 첫 조각을 할 때였다. 청와대 수석비서관 인사발표를 전후해 며칠 사이를 두고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발표 전에 만났던 그는 담담하게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름을 받아도, 부름을 받지 않아도 이상할 게 없다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청(淸)이든 탁(濁)이든 이 대통령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이마시고 내뿜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국정기획 수석으로 기용됐다.
곽 위원장은 서울시장 선거 이전인 지난 2001년부터 이 대통령의 최측근 정책 브레인으로 활동해 왔다. 곽 위원장의 부친이 현대그룹에서 이 대통령과 함께 일한 계열사 사장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곽 위원장이 본격적으로 이 대통령을 돕기 시작한 건 서울시장 선거 이전인 2001년부터다. 10년째 이 대통령과 한 배를 타고 있는 셈이다.
인터뷰를 위해 KT빌딩에 위치한 미래기획위원장 집무실에서 곽 위원장을 만났을 때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배어있었고, 대화에도 여유가 있었다. 최근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는 ‘안철수 신드롬’, ‘강남좌파’ 얘기로 인터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유머감각이 풍부한 곽 위원장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안철수 신드롬’이 대단하다. 안철수 교수(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가 미래기획위원회의 민간위원직도 맡고 있던데.
안 교수는 2008년부터 미래위 위원으로 있었다. 청와대에서 국정기획 수석을 할 때 영입을 했다. 2009년부터는 같이 호흡을 맞춰서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산업 생태계에 대해 논의를 해왔다. 생각과 이상을 얘기하다보면 이질감 같은 것은 전혀 없는 분이다. 최근에는 MT도 같이 다녀왔다. 안 교수가 갖고 있는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1인창조기업 등의 산업생태계 얘기는 확실히 일리가 있다. 대기업을 벤처기업 착취하는 동물원으로 비유한 것도 마찬가지다.
신문과 방송에 비춰진 안 교수는 집권세력에 불만이 많으신 것 같더라.
안 교수도 교수고 나도 선생이다. 정치는 DNA가 다르다. 최근 안 교수 관련 뉴스를 접하고 정치에 잘못 들어가면 굉장히 힘들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강남좌파’라는 말도 요즘 대유행이다.
그 말은 모순된다고 생각한다. 좌파, 좌익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것 아니냐. 강남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부정하겠느냐. 나도 강남에서 40년 살았다. (강남좌파는) 서울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일 수도 있다. 말은 안 되지만 그냥 재미있게 붙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강남제비’라는 말도 있지 않았느냐. ‘따분한 보수’들이 기득권 지키기에 열중하니까 그런 말이 유행하는 게 아닐까.
곽 위원장이 평소 강조하는 ‘쿨(Cool)한 보수’와 ‘따분한 보수’는 어떻게 다른가.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 이념적이지 않다. 자기 싫어하는 사람이 진보 또는 보수라고 말하면 자신은 거꾸로 보수 또는 진보라고 말하는 세대다. 그런데 정당은 여전히 이념논쟁을 하고 있다. 변화와 개혁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당은 굉장히 어려워질 거다. 모든 복지개혁은 보수가 했다. 따분한 보수는 쿨 보수로 바뀌어야 한다. 따분한 보수는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고, 쿨 보수는 변화와 개혁을 하면서 국민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영국 보수당이 장기 집권하는 이유는 복지개혁을 보수당이 밀고 나가면서 변화와 개혁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다소 흘렀지만 오세훈 서울 시장의 무상급식 관련 주민투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투표까지 가지 않고 합의해서 잘 끌고 갔으면 좋지 않았을까. 복지를 정쟁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정책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쨌든 긍정적인 면은 국민들한테 복지논쟁을 일으킨 건 의미가 컸다고 생각한다. 선택적 복지, 보편적 복지를 이분법적으로 취급하는 나라는 없다. 예를 들어 저출산 문제는 보편적 복지와 관련이 깊다. 고학력, 고소득 여성도 아이를 낳아야 한다. 이에 비해 집 있는 사람한테까지 굳이 반값 아파트를 줘야하나. 이 문제는 선택적인 복지와 관련된 것이다.
대학 등록금은 어떤가.
대학 등록금은 얘기가 좀 다르다. 서민들은 아예 낼 수가 없을 지경이다. 등골이 휜다. 등록금 문제는 어떻게든지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이 문제를 놓고 어떤 사람들은 ‘왜 돈 있는 사람한테까지 주느냐’고 한다. 하지만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 등록금 제도를 약간 복잡하게 만들면 된다. 대기업에서 등록금 대주는 사람은 그냥 원래대로 받도록 제도를 만들면 된다. 왜 대기업에 있는 분들이 그런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 대통령의 정책 브레인으로서 이른바 ‘MB노믹스’에 깊이 관여했다. 그런데 최근 감세(減稅) 유보 등으로 MB노믹스가 다소 퇴색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MB노믹스가 감세와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만 있는 게 아니다. 핵심은 ‘따뜻한 시장경제’다. 대선 때부터 해왔던 얘기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변화와 개혁을 통해서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지속되려면 시장경제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다시 시장경제에 올려놓아야 한다. 정부가 보듬어야 한다. 그게 MB노믹스다. 2008년 청와대에서 제일 먼저 내놓은 정책이 ‘뉴스타트 2008’이었다. 이 정책은 우리 사회에 패자부활전 시스템을 만들어 놓겠다는 것이었다.
감세 유보는 친서민 정책에 밀린 결과가 아닌가.
MB정부가 서민들을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감세를 한다고 하면서 균형재정을 한다고 하고, 세입을 줄인다고 하면서 세출도 줄이자고 했던 것이다. 무슨 돈으로 양극화 해소하고 서민정책을 하겠느냐. 약간의 부조화가 있었다. 감세기조를 유지하더라도 시기를 조절해야 하고, 재정이 건전재정으로 가는 것은 맞지만 위기상황에서는 과감하게 써야 한다. 감세를 보류했다는 것은 MB노믹스의 후퇴가 아니다. 그보다는 합리적인 시기조정의 의미다.
올 들어서 산업생태계 얘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데.
대기업에 자극을 줘야한다. 예전에는 ‘관료적이다’라고 말하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고 안주하는 것을 뜻했다. 나쁜 뜻이었다. 이제는 ‘관료적이다’라는 말 대신 ‘대기업적이다’라는 말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일을 하다 보면 기획재정부, 지식경제부가 소통이 빠르고 의사소통이 잘된다. 정부 부처가 오히려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한다. 한국 IT산업이 위기를 맞게 된 것도 대기업 관료주의 탓이다. 임직원들이 총수만을 바라보며 내부경쟁에 몰두하다 보니 외부 변화에 둔감해졌다. 한국 업체들이 스마트폰과 태블릿PC에서 CPU(중앙처리장치) 역할을 하는 AP(Application Processor)칩 시장을 조기 선점했었는데, 최근 애플과의 특허권 다툼 이후 입지가 허물어지고 있다. 애플이 그동안 100% 삼성전자에 의존해온 AP를 최근 대만 TSMC로 공급선을 50% 가량 다변화함으로써 인텔을 따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절반 정도 놓쳤다고 봐야 한다.
MB정부의 임기가 1년여 남아 있다. 앞으로 할 일은.
대통령께서는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엄청 열심히 일하실 것이다. 중요한 할 일이 많다. 역사가 평가하기에 지난 1970년대의 지도자와 기업이 대한민국의 30년 먹거리를 만들었다. 자동차, 기계, 화학, 메모리 반도체 등 그때 깔아 놓은 기반이 대한민국의 30년 먹을거리가 됐다. (MB정부가 해야 할 일은) 앞으로 30년 동안 대한민국이 먹고 살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원전, 유전, 시스템 반도체가 그 해답이다. 그것을 마무리 짓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원전과 유전은 어느 정도 성과가 나왔다. 이제는 시스템 반도체로 한국의 IT산업이 활로를 뚫어야 한다.
시스템 반도체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은 46.4%인데, 시스템 반도체 점유율은 3%다. 그런데 시장 규모는 시스템 반도체가 메모리 반도체의 여섯 배에 달한다. 그나마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에는 3%의 점유율마저 대만한테 빼앗기고 있다. 한국 전자 업계의 마지막 먹을거리인 시스템 반도체를 한국의 핵심산업으로 키우기 위한 방안을 준비 중이다. 우수 인력과 자본, 관련 업체를 움직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곽 위원장은 심야 과외교습 금지로 많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줬다.
미래기획위원회는 올해 초 중산서민층까지 포괄하는 능동적 사회안전망으로 복지 체제를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휴먼 뉴딜 프로젝트’다. 세 가지 주요 내용이 있는데 가계지출 줄여주기, 가계수입 늘려주기, 사회안전망 확충이다. 이 가운데 경제위기 국면에서 가중 중요한 게 가계지출 줄여주기다. 그리고 국민들이 가장 부담스럽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교육비다. 사교육비는 우리 경제의 가계부채와 톱니바퀴처럼 물려 있다. 심야 과외교습 금지를 비롯해 사교육비 줄이기를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내년 하반기 정도면 국민들도 직접 피부로 느끼게 될 것이다. 작년에 대한민국 개국 이후 처음으로 사교육비가 3% 줄었다. 또 지난 7월에 그동안 추구하는 학원법 개정안이 통과했다. 학원비 투명성 등을 다룬 법안이다. 개인적으로는 일단락됐다고 생각한다.
경제부문 대선 공약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금융부문은 어떤가.
금융부문도 일단락됐다. 우리금융이 2005년에 민영화하기로 했는데, 아직 못했다. 산업은행은 2013년까지 팔면 되고 정리금융공사가 산은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1단계는 온 거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제기한 우리금융 국민주 방식에 대해서도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할 일이 아니다. 주의를 환기시켜 준 효과가 있었다. 사실 MB정부가 한국 금융 산업을 발전시키려고 했는데 2008년 금융위기 때문에 주춤한 측면이 있다. 금융 산업 발전은 대기업의 투자와 깊은 관계가 있다. 금융 산업이 투자에 대한 리스크를 분담해 줘야하는데 금융 산업이 뒤떨어져서 못하고 있다. 국내 금융에는 규제가 너무 많고, 해외부문에 대해서는 너무 풀어져 있어서 문제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좀 조용하신 것 같다.
주로 해왔던 일이 여러 정부 부처에 걸려있거나, 정부 부처 이익에 상반되는 일이었다.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2009년에 가장 힘이 많이 들었다. 예를 들어 ‘국방산업 2020’을 했는데 굉장히 힘들었다. 국방부, 지경부, 방위사업청, 합동참모본부, 국방연구원 생각이 다 틀리더라. 하지만 계속 소통하니까 합의된 결과를 이끌어냈다. 융합·조합·소통하면 다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부처에서 많이 양보해주는 덕분에 일에 진척이 있다. 그래서 조용한 거다.
곽 위원장을 이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부친이 1943년 현대그룹에 근무했다. 이 대통령과 같이 근무한 기간도 상당히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가끔 만났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들’ 운운하는 것은 심하다. (이 대통령은) 굉장히 어려운 분이다. 서울시장 캠프에 합류할 때 누구라고 말씀드렸더니 ‘많이 컸다’고 놀라워했다.
정치할 생각은.
2007년부터 나와 있었지만 학교 선생이 적성에 맞는다. 교수 신분으로 돌아가고 싶다. 막말도 하고. 나 같은 ‘얼공(얼떨결에 공무원이 됐다는 뜻)’은 말도 조심해야 하고 행동도 조심해야 한다. 제약요인이 많다. 물론 국정에 대한 경험이라든지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을 학생들에게 상세히 설명해 줄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 작은 역할이었지만 대한민국을 더 나은 대한민국으로 바꾸고 행복을 주기 위해 밤잠 안자고 노력한 것에 대해서도 뿌듯함을 느낀다. 하지만 솔직히 난 백면서생(白面書生)이다.
곽 위원장의 취미가 랩이랑 격투기다. 교수님치고는 이색적이다.
2002년 고대신문사 주간교수 겸 편집인을 하면서 학생기자가 40명, 직원 4명과 함께 어울려야 했다. 소통을 해보려고 노래방 가서 '삼포로 가는 길'을 부르면 이 노래 작곡한 분께는 미안하지만 같이 삼포로 가려고 하질 않더라. 그래서 피나는 연습을 해서 랩을 배웠다. 이종격투기는 2001년부터 그야말로 취미 삼아서 해본 것이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나이에 비해 너무 과격한 운동이라고 해서 접어놓은 상태다. 하지만 지금도 자세 정도는 나온다.
■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은?
1960년 대구 출생으로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밴더빌트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7년 이명박 대선 캠프에 핵심적인 정책 브레인으로서 참여했다. 그는 MB노믹스를 설계한 주역으로 꼽힌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직 시절부터 각종 정책의 밑그림을 직접 그려온 최측근 인사다.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기획조정분과 위원을 거쳐 이명박 정부의 첫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을 지냈다. 2009년부터는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진우 / 매일경제 경제부 차장 jeanoo@mk.co.kr│사진 =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