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경부 1차관이었던 김석동 전 농협경제연구소 대표의 ‘역사 강의’가 화제다. 30년 공직생활을 접고 농협경제연구소 대표가 된 지도 벌써 만 2년. 김 전 대표는 지난 9월7일 2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식을 가졌다.
공직자윤리법은 ‘퇴직 후 취업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 퇴직공직자가 퇴임 후 2년 안에 업무 연관성이 밀접한 회사에 취업하는 것을 막는 게 핵심이다. 이제 2년을 꽉 채웠으니 그야말로 자유의 몸이다.
이전에도 ‘퇴임 후 취업 제한’ 규정과 상관없이 금융 관련 인사 하마평이 나올 때마다 늘 1순위 주자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금융실명제 대책반장, 금융개혁법 대책반장 등의 업무를 맡는 등 30년간 금융정책을 관장해온 금융 전문가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이 같은 세간 돌아가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오래도록 연구해온 역사 강의안을 가다듬고 자신의 강의를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가서 강의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동안의 한국 역사가 잘못 알려진 측면이 많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다.
사실 김 대표가 역사 강의를 시작한 시기는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올 초 교육부가 대학입시에서 역사를 선택과목으로 바꾸는 결정을 내린 후 본격적인 강의 행보에 들어섰다. 현재도 학생들이 한국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판에 역사를 필수과목에서 빼버리면 더더욱 한국역사에 무지하게 되리라는 걱정과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행보다.
물론 단순한 역사 강의는 아니다. ‘대한민국 경제와 한민족의 DNA’라는 강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경제와 역사를 한데 묶었다. 결론도 경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지난 50년간 급성장을 이룬 한국 경제가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다. 30년간 재정경제부에서 경제관료로 생활해온 이력이 어디 갈 데 있으랴 싶다.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께서 사학과 가면 학비를 대주시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상대를 갔어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학자들은 물론 역사에 관심 있는 지인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오래도록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저 혼자만 알고 있을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전 대표는 한국 경제가 놀랍게 발전한 배경을 ‘한민족의 DNA’에서 찾는다.
한국 경제는 지난 50년 동안 실로 경이로운 발전상을 연출했다. 1960년 한국 경제 실질GDP는 2008년 현재 31배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세계 GDP는 6배 증가하는 데 그쳤다. 그 결과 2008년 기준 한국 GDP 규모는 세계 15위에 달한다. 김 전 대표는 “환율 때문에 그렇지, 예전처럼 환율 800~900원대로 계산하면 바로 7위인 이탈리아 수준으로 올라선다”고 부연설명한다.
한국은 2009년 세계 9위의 수출대국이 됐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고성장인 동시에 경제 기적이다. 이런 고성장 과정을 거친 끝에 1970년 0.3%에 불과하던 한국 제품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2009년 3%로 10배나 늘어났다. 2009년 기준 반도체는 D램 분야에서 60% 이상 점유율을 자랑하는 압도적인 세계 1위다. 선박 건조량 역시 2002년부터 8년 연속 세계 1위(34%)를 지켜왔다. 이외에 TV가 1위(36%), 휴대전화가 2위(31%), 자동차는 5위(6%)다. 세계 10위권 초고층빌딩 중 1, 2, 5위 초고층빌딩을 한국 건설업체가 건설했다.
김 전 대표는 한국 경제가 이렇게 단기간에 급성장할 수 있는 저력을 한민족의 DNA에서 찾는다. ‘시장·경쟁 친화적인 문화’, ‘강한 성취동기와 의지’, ‘대외 지향성’ 등이 김 전 대표가 찾아낸 한민족의 DNA다.
한민족은 어떻게 이 같은 DNA를 갖게 됐을까? 김 전 대표는 그 배경을 ‘과거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던 유목민족, 초원제국 전사들의 DNA’에서 발견했다. 한민족이 바로 그런 DNA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경이로운 경제 상황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한민족이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던 유목민족, 초원제국 전사? 기존에 역사에서 배웠던 내용과 뭔가 잘 맞지 않는 듯 한 느낌이다. ‘한민족은 한반도에서 농사를 짓던 동이민족’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역사 시간에 배운 내용 아닌가?
김 전 대표는 “동이족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한국 역사의 기원인 고조선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고 전한다.
김 전 대표가 주장하는 고조선의 모습은 ‘기원전 20세기부터 108년까지 지금의 중국 대륙을 지배한 동아시아의 강자’다. 요서·요동은 물론 한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이 모두 고조선이었다는 얘기다.
고조선이 어느 지역에 있었는가 하는 사실은 역사가마다 관점이 다르다. 한국 주류역사의 대표주자인 이병도 선생은 대동강변까지였다고 정리한 반면, 중국 역사가인 리지린은 란하(중국 허베이 성 북동부를 흐르는 강)―만주-한반도 북부를, 유엠부찐은 고대요동-남만주-한반도 북부까지가 고조선 영역이었다고 본다. 하버드 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 박사학위를 받은 윤내현 단국대 명예교수는 고대요동-내몽고동부-만주 일대-한반도가 모두 고조선 땅이었다고 단언한다. 역시 한국의 대표적인 재야 사학자로 꼽히는 <조선 왕 독살사건>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문화역사소장 또한 윤내현 교수 이론에 동조한다.
이와 관련 김 전 대표는 “심지어 중국 역사가들조차 인정하는 고조선의 위세를 한국 주류 사학자들만 부정하는 상황이 매우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광대한 땅을 차지하고 다스렸던 고조선의 후예는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현재 한국 역사의 주류인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말갈이 하나다. 이외에 북위, 요, 금, 원, 청이 모두 고조선의 후예라는 설명이 붙는다. 이렇게 본다면 과거 중국 땅과 역사를 지배했던 것은 지금의 중국인이 아닌, 고조선인의 후예들인 셈이다. 또 유라시아 대륙을 누비고 한때 전 세계를 호령한 기마유목민족이 모두 고조선인의 후예가 된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이 같은 ‘한민족 기원설’을 얘기했다.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민족은 부여족, 선비족, 지나족, 말갈족, 여진족, 토족의 여섯인데 이 가운데 단군 자손인 부여족이 다른 5족을 정리하고 동국(한반도) 역사의 주류가 되었다”고 했다. 또 “흉노와 몽골을 비롯한 거란족, 여진족을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규정하고 우리 민족에서 떨어져나간 시기를 알아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다시 한번 의문부호가 달린다. 김 전 대표가 이렇게 단정적으로 ‘고조선은 중국을 아우르는 대제국이었고, 기마유목민족인 고조선의 후예들이 중국 역사를 수놓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김 전 대표는 1980년대 중반 중국 홍산 지역 ‘우하량’에서 기원전 3500~3000년경의 대규모 유적지가 발굴된 것이 이 같은 역사관의 기초가 된다고 설명한다. 소위 ‘홍산문화유적지’라 불리는 이곳에서는 ‘제단’ 등 초기국가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적이 발견됐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이 바로 비파형 동검, 빗살무늬토기 등 동이족만 사용하던 유물들이다. 결과적으로 ‘이 지역에 세워진 국가는 바로 고조선일 수밖에 없다’는 게 김 전 대표 생각이다.
동시에 홍산문화유적지는 ‘기원전 10세기경인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야만 비로소 국가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기원전 2333년에 설립된 고조선은 국가가 아닌 부족’이라는 기존의 이론을 뒤엎는 유적이다.
한국 주류 사학계는 그동안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왔다.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건국’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단군조선 건국 스토리는 실제가 아닌 신화로 생각했다.
그러나 홍산문화유적지는 ‘단군조선 건국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바탕이 됐다. 또 최근의 연구들은 ‘청동기 시대 이전에도 국가가 있었으며’, ‘청동기 문명의 기원이 계속 소급돼 이전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홍산문화유적지’를 통해 일부 역사가들은 ‘우하량은 과거 고조선이 존재했던 바로 ‘그 지역’이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김 전 대표는 “홍산문화유적지뿐 아니라 우리 고대사에 대한 사료들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한국 고대사를 다룬 책은 찾기가 쉽지 않다. 잦은 전쟁으로 사서가 다수 소실된 데다 일제 강점기에 조직적인 역사 왜곡, 말살 정책이 진행되는 와중에 고대사서 수십만 권이 파기됐기 때문이다.
험난한 역사 속에서 어찌어찌 살아남은 고대사 책 중 김 전 대표가 내세우는 책은 '단기고사', '한단고기', '규원사화', '조선상고사' 등이다. 물론 '한단고기' 등은 위서 논란이 있는 책으로 아직까지 한국 사학계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이덕일 소장은 “ '한단고기'를 믿고 안 믿고는 2차적인 문제다. 그 책의 진위에 대해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한단고기'에 나오는 내용들은 누군가가 지어냈다고 하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체계적이다”며 반박한다.
우리가 중국 역사라고 믿었던 역사의 상당부분이 곧 고조선의 역사라면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역사는 과연 무엇일까?
과거 중국 역사가들은 ‘기원전 2600년경 동이 국가의 치우천왕은 황제 헌원과의 탁록대전 이후 동북아시아에 대제국을 건설했다’고 했다. 붉은악마가 표상으로 삼는 엠블럼이 바로 치우천왕이다. 이처럼 치우천왕을 ‘동이족’으로 규정하던 중국 역사가들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치우와 헌원은 모두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이게 바로 동북공정의 시작이다.
김 전 대표는 “홍산문화유적지가 발견된 후 그 지역이 모두 동이족이 지배하던 땅이 아니었을까 하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그렇게 되면 과거 중국 땅과 역사의 정통성은 동이족이 갖게 된다. 고민하던 중국 역사가들은 동이족 역사마저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고 한다. 그게 바로 동북공정이다. 동북공정의 실체는 중국인들이 동이민족의 역사가 한국인의 역사임을 뿌리째 부정하고 동이족의 역사를 모두 중국 역사의 일부분으로 넣어버리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더불어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동이족의 역사마저 중국인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데 한국은 자기의 역사마저 제대로 찾지 못하고 스스로 ‘그건 우리 역사가 아니라 중국의 역사였다’고 인정하고 있으니 이 또한 통탄할만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김 전 대표 식의 역사인식을 근거로 했을 때 홍산문화는 바로 한민족의 원류다. 홍산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200년)와 하가점상층문화(기원전 1300년)를 거쳐 기원전 800년경 능하문화와 오르도스문화로 나뉜다. 능하문화가 바로 지금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부여, 고구려, 기자조선, 동예, 옥저, 선비(모용선비) 등이고 오르도스문화를 이어받은 이들이 바로 흉노족이다. 능하문화는 이후 고구려·발해/거란·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이들 중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세웠다.
선비족에서 떨어져 나온 탁발선비와 흉노족이 합쳐진 이들이 다시 돌궐·위구르·요(거란)·금(여진)·청(여진)으로 이어진다. 이 중 요(거란)에서 시작된 나라가 바로 원나라로 이들은 현재 몽골공화국의 조상이다. 위구르에 살던 이들은 현재 중국 신강유오이자치구에서 여전히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다. 위구르에 살던 이 중 일부가 오스만투르크족이 됐는데 그들이 바로 현재의 터키인이다.
김 전 대표는 “몽골과 한국은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국가이며 터키인도 우리와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터키를 형제국’이라 부르는 게 터키가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같은 조상에서 뻗어 나온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김 전 대표는 “터키에서는 역사 시간에 터키와 한국은 예전에 한 민족이었다는 내용을 배운다”고 했다. 또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몽고반점이 나타난다”고도 했다. ‘몽고반점’이야말로 같은 뿌리를 가진 민족임을 입증할 수 있는 대표적인 흔적이라는 것. 그리고 전 세계 민족 중 몽고반점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민족이 바로 지금의 한국인(약 95%)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결국 홍산문화는 일본, 중앙아시아, 터키, 한국, 중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문화의 뿌리이며, 이 홍산문화가 바로 한민족 문화의 원류’라는 얘기가 된다. 이 같은 강의안을 만들고 정리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렸다고.
김 전 대표는 “지금과 같은 역사관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역사책을 자비로 사들이느라 돈도 꽤 썼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단기고사', '조선사략', '조선역사', '한단고기' 등 수많은 책을 구해 소장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동이족의 뿌리인 기마유목민족의 실체를 보고 오겠다’며 몽골 전역을 돌며 자료를 수집해왔다. 몽골에 가서 찍어온 사진들이 중요한 강의 자료가 된 것은 물론이다.
이 같은 연구를 통해 김 전 대표가 내린 결론은 명쾌하다. “기마유목민족인 동이족은 밖으로 나갈 때 성공했다. 고조선 이후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국력과 문화에서 열세였다. 한때 유라시아대륙을 호령한 우리민족이 지금과 같이 된 것은 어느 순간부터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에서 정체된 때문이다. 반면 중국은 황허 강 중류에서 우리민족보다 늦게 형성된 문화를 기반으로 했지만 중원을 차지한 이후 이민족과 교류, 투쟁하면서 세계적인 강국으로 성장했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문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경제·과학기술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고조선 이후 한반도, 만주에 거주하던 종족들이 겨레를 이루어 살면서 ‘동질화’의 길로 나아갔다. 이는 다양성을 축소하고 반도국가를 넘어서지 않는 바탕이 됐다. 더구나 근대 초기 쇄국정책을 실시해 더욱 발전이 정체됐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할 때 우리가 나아갈 길은 명확하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한국 경제가 기적을 이룬 지난 50년은 국가가 앞서서 ‘밖으로 나가는’ 정책을 펼친 덕분이다. 그것만이 한국과 한국인이 살 길이다.”
김 전 대표는 3남3녀 중 다섯째, 둘째아들이다. 김 전 대표의 형은 한국의 대표적 건축학자로 여의도 개발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했던 김석철 명지대 석좌교수. 식도암 수술을 받은 후 대중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김 교수가 지난 8월17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제12회 경영관련학회 통합학술대회’에서 ‘아시아 도시의 경쟁력’이란 주제의 강연을 했다. “강연은 식도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일이지만, 한국 경영학자들이 총출동한 경영 관련 학회 통합학술대회인만큼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로 주제발표를 시작한 김 교수는 아파트 위주의 한국 도시개발 계획을 한탄했다.
김 전 대표는 역사 강의 말미에 늘 ‘한민족 역사의 보고이자 한국인의 새로운 먹을거리가 될 수 있었던 몽촌토성 주변을 아파트 밭으로 만들어버린 도시 개발자들의 무심함’을 통렬히 비판한다. 그야말로 ‘형제는 용감했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