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ation] 두산의 미래는 박용만 회장으로 통한다…프로야구단만큼만 한다면 톱 5는 시간문제
입력 : 2011.03.22 19:39:49
수정 : 2011.08.26 16:14:33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두산그룹이다. 1896년 8월 서울 종로에서 ‘박승직상점’으로 출발했으니 그 역사가 올해로 114년이 됐다. 100년 넘은 기업이 드문 우리나라 실정에서 114년을 이어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두산의 저력을 알 수 있다.
국내 기업 중 나이는 가장 많이 먹었지만 두산의 이미지는 꽤 젊다. 두산이 114년이나 된 우리나라 최고(最古) 기업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을 정도다. 두산이 젊어 보이는 까닭은 프로야구단 두산 베어스의 활약과 이미지, 과거 식음료와 의류 같은 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기업에서 중공업•건설•기계 중심 기업으로의 성공적인 변신 등을 들 수 있다.
엄밀히 말해 현재 두산의 주축 사업인 중공업•건설•기계에서는 신선하고 젊은 느낌을 받기 어렵다. 오히려 이전에 하던 식음료•프랜차이즈•의류 사업이 젊은 감각과 더 어울린다.
그럼에도 두산이 젊어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박용만 (주)두산 회장은 그 이유를 한 인터뷰(세계경영연구원 'IGM비즈니스리뷰', 2010년 5월9일)에서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저희가 114년 됐는데 현재 저희 두산그룹의 직원을 보면 97% 정도의 임직원이 입사 10년이나 그 이내입니다.… (중략) … 중공업 인수하고 난 다음에 옛날에 가지고 있던 소비재는 다 매각해버렸기 때문에 그 전에 있던 사업은 다 나가고 새로 인수한 사업이거나 최근에 뽑은 신입사원만 다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는 그 100년의 무게가 조직 안에는 거의 없습니다. 그게 있다면 오직 이 사업을 경영하고 있는 저희 패밀리 내에나 있을까 싶습니다.”
다시 말해 조직원들이 젊기 때문에 젊어 보인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두산의 이미지를 젊게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박용만 회장 자신이다.
젊은 두산을 이끄는 패기 있는 리더 박용만 회장은 ‘얼리어답터’, ‘트위터 마니아’라는 별칭을 들을 만큼 스마트폰을 비롯해 IT 기기에 관심이 많으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대중과 소통한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것들을 기업 회장이 직접 선도하고 공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젊은 이미지가 생겨난 것이다.
박 회장은 재벌가 오너 중 일반인과 가장 친숙한 사람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동안 우리나라 재벌 오너의 이미지는 일반인이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폐쇄적이었다. 게다가 함부로 나란히 할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박 회장은 다르다. 박 회장은 자택과 집무실을 공개하는가 하면 자신의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기도 한다. 또 이따금 국토횡•종단 행사에 참여해 일반인과 함께 어울려 우리 국토를 걷는다. 특히 박 회장이 즐기는 트위터의 힘은 대단하다. 박 회장의 트위터에는 6만 명이 넘는 팔로어가 수시로 드나든다. 박 회장은 그들과 생활을 공유하고 있다. 자신의 트위터에 신변잡기를 거리낌 없이 올리는가 하면 ‘채팅용어’들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친근감을 더하고 있다. 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을 좇아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시작했다는 박 회장의 트위터 활동은 이제 국내 으뜸에 속한다.
그렇다고 박 회장이 무척 젊은 사람도 아니다. 1955년 2월5일 서울에서 출생했으니 올해로 만 55세다. 롯데 신동빈 부회장과 동갑이다. SK 최태원 회장, CJ 이재현 회장보다도 연배가 높고 또 다른 트위터 마니아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등과 비교한다면 한참 선배다. 이렇게 보면 박 회장이 얼마나 젊게 사는지 알 수 있다.
박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MBA(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77년 외환은행에서다. 이후 두산그룹 계열사를 골고루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1995년 두산그룹 기획조정실장에 오르며 마침내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주)두산 부회장,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회장, 두산중공업 부회장•회장 등을 맡으며 두산그룹 변신에 앞장섰다.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한-스페인 경제협력위원회 회장 등 국내외 경제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지난해부터 (주)두산 대표이사 회장직을 수행하며 변신한 두산그룹의 패기 있는 리더로 각광받고 있다.
박 회장은 두산그룹 고위직을 거치는 동안 계열사 매각과 M&A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네슬레, 한국3M, 한국코닥의 주식을 매각하며 변신을 꾀하던 두산은 외환위기를 계기로 마침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음료사업부문을 미국 코크에 매각했고, 서울 을지로 그룹 사옥도 매각했다. 그룹의 대표 브랜드였던 OB맥주 지분을 1998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매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선대부터 이어온 두산의 전통•주축 사업을 깡그리 매각하는 것에 당시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두산그룹의 앞날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두산은 부정적•비관적인 시각에 정면으로 맞섰다.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인수를 시작으로 2003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2006년 연합캐피탈(현 두산캐피탈), 2006년 영국 미쯔이밥콕(현 두산밥콕), 2007년 밥캣을 포함한 미국 잉거솔랜드 3개 사업 부문을 잇달아 인수하면서 그룹의 모양새를 탈바꿈시켰다. 이후에도 BNG증권중개(2008년), 노르웨이 목시(2008년), 체코 스코다 파워(2009년) 등 국내외 M&A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를 진두지휘한 사람이 박용만 회장이다.
당시 두산의 잇단 M&A에 대해 재계와 증권가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과연 익숙한 사업을 버리고 전혀 생소한 사업을, 그것도 이전 사업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큰 사업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었다.
두산의 변신을 이뤄낸 ‘M&A의 귀재’
하지만 박 회장을 비롯해 대부분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엘리트 두산가(家) 사람들은 보란 듯이 변신을 성공시켰다. 현재 두산은 10년 전보다 23배 높아진 기업 가치와 약 10배 늘어난 매출을 자랑하고 있다. 재계 순위에서도 당당히 12~15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 두산은 ‘구조조정의 모범’, ‘변화와 혁신의 전범’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이 같은 결과는 박용만 회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박 회장은 두산의 변신이 ‘위기의식’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그룹의 존망이 불투명해지자 박 회장은 결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두산의 변신과 변화를 박 회장 혼자 이뤄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안타깝게 고인이 된 박용오 전 회장은 물론 두산가 사람들, 모든 임직원이 함께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그 역할로 볼 때 박 회장의 공이 제일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한 M&A 전문가는 박 회장에 대해 “그룹 경영에 참여하는 두산가 3세 중 가장 젊고 M&A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지난 10여 년간 이룬 두산의 구조조정과 M&A는 박 회장이 중심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을 가리켜 ‘구조조정 전문가’, ‘M&A의 귀재’, ‘Mr. M&A’라고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 회장은 다양한 방면에 흥미를 느끼고 취미도 여러 가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사진이다. 고등학교 1학년 소풍 때 사진경연대회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돼 시작한 사진은 한때 그의 인생행로를 바꿀 수도 있었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전문가 급으로 정평이 나있는 형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의 영향도 컸다고 알려진다.
박 회장이 느끼는 사진의 가장 큰 매력은 ‘소통’이다. 박 회장은 스스로 “사진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을 배웠다”고 말했다. 현재 트위터 활동 역시 ‘소통’이 가장 큰 매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박 회장이 인생에서나 기업 경영에서나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소통’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과 소통, 직원들과 소통, 형제들과 소통, 소통경영…. 박 회장이 누누이 강조한 바 있는 ‘투명성과 정직’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현재 연강원(두산연수원)에 전시된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4장의 사진, 가수 양희은의 앨범 <1991-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일부 사진도 박 회장의 작품이며, 박 회장 스스로 이를 자랑삼아 말하기도 한다. 양희은씨와 박 회장은 친분이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회장의 고백에 따르면 “시장통을 돌아다니고 판자촌을 누비며 사진을 찍는 것이 위선적이라는 느낌 때문”에 사진을 포기했다. 재벌가에서 태어난 자신이 다큐사진을 찍는다는 게 스스로 말이 안 된다고 여긴 듯하다. 평소 집에서는 가벼운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배를 벅벅 긁으며 지낼 만큼 소탈하지만, 또 트위터로 일상을 주고받으며 일반인과 가깝게 어울리지만 결국 태생 자체를 어쩌지는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일지 모른다.
이따금 박 회장은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재벌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가령 노사문제에 대해 “No Work, No Pay”라고 한다든가, 삶이 두려울 때 어떤 선택을 했느냐는 한 트위터의 질문에 “삶이 왜 두렵지요? 죽음이 더 두렵지 않나요?”라고 답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런 발언들은 노동자와 서민의 팍팍한 삶과 괴로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해석될 만하다.
박 회장의 가족사랑은 지극하다. 특히 ‘뷘마마(부인마마)’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아내에 대한 사랑은 이미 트위터를 통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짜르르하다. 아들 박서원 빅앤트인터내셔널 대표를 자랑할 때는 영락없이 자식 자랑을 최고 낙으로 삼는 평범한 한 명의 아버지다. 박서원 대표는 광고계에서 알아주는 실력파다. 재벌가에서 태어나 기업 경영보다 디자인, 광고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사진에 푹 빠져 있던 젊은 시절 박용만 회장을 쏙 빼닮았다. 비록 자신은 사진을 포기했지만 박 회장은 아들의 가장 열렬한 응원자 중 한 명이다.
아픈 질문에는 말이 짧은 ‘트위터 마니아’
물론 박 회장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많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곱지 않은 시선이 또 트위터 활동이다. 응원군도 많지만 ‘안티’도 많은 셈이다. 주로 비판을 받는 부분은 그룹 차원의 문제점이나 본인의 아픈 부분을 상쇄하기 위해 트위터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아픈 부분이 언급될 때 트위터 활동이 뜸해지는 것도 이와 관련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극명하기 보여주는 예가 중앙대 사태에 대한 박 회장의 자세다. 기업식 구조조정 논란과 구조조정에 반대하다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을 불법사찰했다는 의혹으로 문제가 된 중앙대 사태는 두산으로서는 아픈 부분이다. 두산 측에 따르면 당초 중앙대 인수는 사회공원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두산 측 말마따나 사회공헌 차원이라면 왜 굳이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느냐는 질타를 받을 수 있다.
시간 날 때마다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트위터에 올리던 박 회장은 중앙대 사태에 대해서는 꽤 오랫동안 침묵했다. ‘시골의사’ 박경철씨가 “중대 학생 사찰 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라고 직격탄을 날렸음에도 한동안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팔로어들의 질문에 곧바로 답변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결국 박 회장은 트위터에 “중앙대 일은 박범훈 총장께서 발표를 하셨더군요. 그것이 fact입니다”라는 막연한 답변만 했을 뿐이다.
박 회장은 또 틈만 나면 ‘투명성과 정직’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박 회장 자신이 2005년 두산의 이른바 ‘형제의 난’ 당시 회계분식과 거액의 자금 횡령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형제경영’을 내세워 가족 간, 형제 간 인화와 우애를 자랑으로 삼았던 두산은 ‘형제의 난’이 터지면서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형제끼리 서로 고소하는가 하면 경영권•재산 분쟁을 벌이면서 두산의 이미지는 일순간에 추락했다. 지난해 박용오 전 회장의 자살이 ‘형제의 난’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되기도 했다.
박 회장의 공(功)으로 인식되고 있는 M&A에서도 밥캣 인수는 과(過)로 평가되고 있다. 두산 측은 여러 차례 문제없다고 밝혔지만 밥캣 인수는 무리였다는 평가가 많다. 한 M&A 전문가는 “M&A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수 가격”이라며 “시너지 효과가 아무리 중요해도 인수 가격이 높으면 시너지 효과보다 금융비용 등 재무 부담이 훨씬 크다”고 단언했다. 이 전문가는 또 “시너지 효과를 낼 때까지 재무 부담을 이겨낸다면 다행이지만 효과를 내기 전에 부담을 덜어내지 못한다면 큰일”이라며 “대우건설을 무리하게 인수한 금호가 좋은 예”라고 말했다. 즉 “밥캣을 너무 높은 가격에 인수해 그로 인한 재무 부담이 두산을 계속 괴롭힐 것”이라는 게 이 전문가의 진단이다. 번번이 튀어나오는 두산의 유동성 위기설도 무리한 밥캣 인수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저런 비판과 질타가 있긴 하지만 박 회장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시선이 더 많다. 앞서 말한 대로 박 회장은 일반인과 소통하는 일을 즐기면서 기존의 폐쇄적•권위적인 재벌의 이미지를 무너뜨린 사람이다. 박 회장의 트위터 활동 이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 재벌 오너와 CEO들이 잇따라 트위터에 합류했다.
박 회장은 멀게만 느껴졌던 재벌과 일반인 사이를 가깝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비록 밥캣 인수가 걸림돌이긴 하지만 소비재 중심 기업이던 두산을 중공업•건설•기계 등 중후장대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공도 인정받아 마땅하다. 이런 이유로 박 회장은 일반인들에게 가장 친밀감 있고 닮고 싶은 재벌 오너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다만 여전히 의욕을 보이고 있는 M&A에 대해서는 우려와 걱정이 혼재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두산의 변신은 누가 뭐라 해도 성공적”이라며 “그러나 의욕이 너무 앞서 무리수를 두는 것만은 경계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두산은 오랜 기간 형제가 회장 자리를 이어가는 ‘형제경영’을 하고 있다. 기업인이 아닌 의사 출신으로 서울대병원장까지 지낸 현 박용현 회장도 그룹 회장직을 수행할 정도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형제경영의 전통은 계속 될 것이다. 이 같은 전통으로 미뤄볼 때 그룹의 다음 회장은 박용만 회장이 될 것이 자명하다. 주변 평가를 종합해보면 박 회장은 ‘합리적이고 전투적인 사람’이다. 또 파이팅 외치고 패기와 뚝심으로 뭉친 프로야구단 두산 베어스와 가장 잘 어울리는 오너이기도 하다.
2020년까지 ‘포춘 200 기업’에 진입하는 것이 박 회장의 목표 중 하나다. 차기 그룹 회장직을 수행하는 와중에 목표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박 회장 스스로 두산의 지난 100년보다 앞으로 100년을 내다봐야 한다고 강조했듯 두산의 미래는 박 회장으로 통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거 소비재 사업에서 탈피한 두산의 현재 인프라는 퍽 탄탄하게 구축돼 있다.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관건이다. 두산 사정에 밝은 한 증권가 관계자는 “프로야구단(두산 베어스)을 운영하는 것만큼만 그룹을 운영한다면 국내 톱 5에 드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