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ftsman] 이병우 롯데호텔 총주방장, “직업은 운명…나를 알아야 성공할 수 있다”
입력 : 2011.03.22 19:31:09
수정 : 2011.08.26 16:13:39
29년 동안 한 가지 일에 몰두했다. 아시안게임, 올림픽, 월드컵 등 굵직한 국제행사가 열릴 때마다 이름이 앞섰고, 표창이 뒤를 이었다. 롯데호텔 총주방장 이병우의 요리인생. 그는 올해 대한민국 조리명장에 선정됐다.
분식집 주방에서 잡일로 분주하던 청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눌러앉은 그곳에서 청년은 조금씩 욕심이 났다. 음식이 맛있단 소문에 하나둘 손님이 몰리자 진정 요리가 하고 싶어졌다. 경희호텔전문대 조리과에 입학하곤 새로운 맛과 모양에 푹 빠져들었다. 프랑스 요리를 배우자고 결심했을 땐 프랑스 문화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 했던가. 파리에 있는 음식점 주방장 자리를 소개받은 그는 난생 처음 하늘 길에 오른다. 1980년대 초반, 파리에서 프랑스 요리를 배우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귀국해 롯데호텔에 입사하고 이듬해 한국방송통신대 영어과에 입학했다. 1992년엔 경희대에서 호텔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5년간 주경야독한 끝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먹고 살기 위해 분식집 주방에 발을 디뎠던 청년 이병우. 한 세대가 지난 현재, 그는 롯데호텔 총주방장(조리부문 임원)에 오르며 이 호텔 체인 13개 레스토랑의 총사령관이 됐다. 과연 요리의 어떤 매력이 그의 열정을 끄집어낸 것일까. 그는 “일이 취미였고 즐거움이었다”며 느릿하고 또렷하게 말을 이어갔다.
지난해 국제기능올림픽 후배 양성의 공로를 인정받아 석탑산업훈장을 받은 그는 올해 ‘2010 대한민국 조리명장’에 선정되며 한식의 세계화를 이끌고 있다.
국제적인 행사가 이어지고 있는데 어느 해보다 바쁘겠다.
11월에 있을 G20 정상회의와 관련해 좀 분주하다. 올 초부터 미국과 유럽 지역을 돌아봤고, 해남의 땅끝마을부터 서울까지 메뉴 선정을 위해 훑어봤다. 보고 느낀 게 많아서 그런지 고민도 많다.
소공동 롯데호텔의 한식당 무궁화가 11월 새롭게 오픈한다던데. 어떻게 달라지는 건가.
지하에 위치했던 식당이 38층에 자리하게 된다. 당연히 대한민국의 대표 한식당이 될 것으로 믿고 있다. 실내 인테리어부터 한식당의 고정관념과는 달리할 것이다. 메뉴도 한식의 세계화를 모토로 삼았다. 하나하나 계획이 실행되고 있는데,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을 설친다(웃음).
한식의 세계화를 주도하며 아쉬운 점도 있을 것 같다.
아쉬움이라기보다 바라보는 시선이 때론 달갑지 않지. 이게 무슨 한식이냐, 전통·족보도 없는…. 이런 식의 편협한 생각이 평가로 이어질 때가 있다. 한식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최근 대한민국 조리명장에 선정됐다. 호텔 주방장으로는 첫 명장이다.
그 동안 요리대회나 국제기능올릭픽에서 좋은 일이 많았는데, 30여 년 요리해오면서 가장 큰 상을 받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명예롭고 회사로서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상이다.
처음이란 사실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다.
부담이라기보다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이나 제3자들의 시각이 좀 달라졌달까. 아, 그러고 보니 좀 부담스럽네(웃음).
어떤 일이든 기본이 중요하다. 조리명장에게 요리의 기본은 무엇인가.
첫째, 먹는 분에 대한 배려가 기본이다. 둘째, 재료의 특성에 대해 이해하고 서로 조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지식이 뒷받침돼야 한다.한식은 특히 ‘손맛’ 이라고 한다. 그건 한식뿐 아니라 일식이나 중식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만 어머니의 손맛이 있는 건 아니니까. 다시 말해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비법이다. 손맛은 곧 경험의 맛이다.
“한국 요리사의 기본은 한식”
30년간 한 가지 일에 집중했다. 비결이 뭔가.
누가 그러던데, 한 직장에 오래 있는 건 두 가지 경우인데 하나는 유능해서 놔주질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능해서라고(웃음). 난 후자가 아닐지. 글쎄, 비결이라면 결국 자기 일을 사랑하고 일을 일이 아닌 취미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 기쁨을 안다면 오래도록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실제 취미를 요리라고 소개하나.
요리는 업이니 실제 취미라 할 순 없겠지. 하지만 업이라 해서 그것을 꼭 일이라 볼 순 없으니까.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게 내겐 하나의 즐거움이다.
요리를 업으로 삼은 계기가 무엇인가. 처음 입문했을 땐 요리사란 직업이 천대받던 시절 아니었나.
좋은 소릴 듣진 못했지. 어쩌면 공부를 못해서였을 수도 있고(웃음). 하지만 직업은 운명인 것 같다. 자신의 적성을 찾아 여러 번 직종을 바꾸는 분들도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겐 요리사란 직업이 운명이었다. 궁합이 맞는 달까. 그러니 30년이나 하고 있는 것 아닌가. 1980년대 초 프랑스 요리를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한식당 오픈을 지휘하고 있다.왜 한식으로 돌아섰냐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내 나라의 요리를 모르고 어떻게 다른 요리를 만들 수 있나. 총주방장이란 직위는 요리에 영역을 둘 수가 없다. 한식, 일식, 중식 주방장을 모두 감독해야 한다. 또 한 가지, 한식의 세계화가 화두인데 세계화된 한식은 대중식당의 오리지널 한식과 차별화돼야 한다. 지금까지 오리지널 한식에 집중했던 분들에게 익숙지 않은 타국 요리와의 접목, 센스 등을 부분적으로 도입해 좀 더 색다른 맛을 만들어보고 싶다. 오늘 점심에도 강남의 한식당에 다녀왔는데, 맛보고 기록해서 G20 정상회의 관련 메뉴에 참고하려고 한다.
대중음식점에도 자주 가는가.
직원들과 소주 한잔하러 갈 때 당연히 들르는 곳 아닌가(웃음). 오늘처럼 목적을 갖고 가는 경우도 있고.
대중음식점의 아쉬운 점도 눈에 띄겠다.
잘하는 곳이 더 많지. 간혹 눈에 띄는 건 음식을 담아오는 품새인데…. 그릇이나 서비스하는 분들의 자세가 걸리곤 한다.
많은 고객을 상대했을 텐데 특히 기억에 남는 이는.
최근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클린턴 힐러리 국무장관이 기억에 남는다. 식성이 좋아서인지 어찌나 잘 드시던지(웃음). 국빈 만찬에 조금은 변형시킨 한식을 냈는데, 반응이 좋았다.
늘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회자되곤 한다. 요리도 같은 맥락인가.
프랑스 요리를 하고 있지만 늘 한식적인 소재를 가미한다. 사실 프랑스 요리사는 한식을 모르거든. 나만이 할 수 있는 프랑스 요리 아닌가. 우린 한국 사람이다. 우리 요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선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후배들에게도 항상 강조한다. 일식이든 중식이든 서양식이든, 한국 요리사의 기본은 한식이다.
요리를 공부할 땐 어땠나. 그 시절엔 체계적인 요리공부가 부족했을 텐데.
오히려 그래서 더 한식에 매달렸을 수도 있다. 요리를 알면 알수록 한식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 굉장히 아쉬웠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내 요리에 한식이 묻어났다.
“스스로 알고 배워야 전진할 수 있다”
정작 국제기능올림픽 조리 분야에선 지난해에야 금메달이 나왔다. 한국요리의 수준이 낮게 평가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다.꼭 그렇지는 않다. 평가하는 요리가 서양식이다 보니 사실 아시아 요리사들이 맛의 기준을 맞추기가 상대적으로 어렵겠지. 그러다보니 국제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이 귀했다.
지금도 롯데호텔의 주방에는 후배 양성이 한창일 텐데.
요리는 책으로 배울 수도 있지만 스승이 하는 것을 눈여겨봤다가 직접 해보고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다. 결국 나도 많이 보여줘야겠지. 그게 후배들을 위한 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집에선 어떤가. 직접 요리할 때도 있나.
거의 하지 않는 걸. 집에선 요리강습할 일도 없으니 와이프에게 제일 미안하지. 어찌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웃음).
돌아보면 어떤가. 성공했다고 생각하나.
글쎄…. 전혀 느끼지 못한다. 한 가지 무언가를 했다고 해서 그게 성공인지. 성공엔 기준이 없는 것 아닌가.
30년 후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
가장 어려운 질문인데(웃음), 우선 앞에 놓인 일들부터 차근차근 짚어가는 게 중요하겠지. 롯데호텔은 현재 세계화가 진행 중이다. 9월13일 모스크바점이 오픈하고 중국 선양, 베트남 하노이에도 오픈할 예정이다. 한국의 토종 브랜드가 세계적인 호텔 체인과 경쟁에 나서게 된다. 레스토랑의 경쟁력이 현재 당면한 과제다. 30년 후? 그때도 이 모자는 머리 위에 있겠지.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