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출장이 잦은 편인데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 유럽을 제외하고도 일본에서도 와인을 모르면 CEO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하더군요. 선호하는 와인 한두 개 정도는 알아야 당당히 말하면서자리가 부드럽게 넘어가더라고요. 그래서 큰맘 먹고 소믈리에에게 특강도 받아봤지요. 그런데 이름 익히기가 만만찮았어요. 그러다 외우기 쉽고, 선물하거나 권해도 좋아들 하는 깊은 맛의 와인을찾았어요. ‘샤또딸보’였지요.”이상준 호텔 프리마 사장이 기자에게 털어놓은 얘기다. 한국의CEO들이 소위 얼마나 ‘와인스트레스’에 시달리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더불어 샤또딸보가 어떻게 국내 시장에 일찌감치 안착할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있다. 쉬운 이름이 그 비결로여겨진다.‘딸보’는 영국사람 이름 ‘탤벗(Talbot)’의 프랑스식 발음이다.
그럼 탤벗은 또 누굴까. 때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지금의 보르도 지방을 두고 백년전쟁을 벌였다. 그때 잔다르크의 진군에 맞섰던 인물이 바로 영국 장군 탤벗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지역은 프랑스령이 됐다. 하지만 보르도 지역 사람들의 뇌리엔 탤벗 장군이 크게 자리 잡았다. 그래서 보르도의 와이너리(포도원) 중 하나가 비록 ‘적장’이지만 그를 기려 만든 와인이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여기에 더해 한국 시장에서 특히 더욱 극적인 스토리텔링까지 갖추면서 일약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다. <매일경제> 본사를 찾은 장 폴 비뇽 대표에게서 샤또딸보가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사랑받게 됐는지 직접 들어봤다.
한국 사람들, 특히 CEO들 사이에서는 샤또딸보의 인기가 상당히 높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우선 발음이 쉽다는 점이 최대 강점이다. 유럽에서도 젊은 사람들은 와인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너무 고루하고 이름 외우기도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샤또딸보는 상당히 경쟁력을 갖췄다고 본다. 이는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더불어 ‘2002 한•일 월드컵’이 이 와인을 더욱 극적으로 성장시켰다.
기자가 짐짓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장 폴 비뇽 대표는‘히딩크 감독 덕분’이라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히딩크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 국가대표가 16강에진출하자 축배주로 샤또딸보 1998년산을 마셨다는 일화가 알려지면서 판매량이 급증했다는 것이다.“전 세계 시장을 돌아다니는데 한국 시장에서 샤또딸보 성장기처럼 극적인 곳은 없었습니다. 온 나라가 열광하던 축구감독이 언급한 후 소비량이 더욱 급증했지요. 의도치 않았지만 ‘명사 마케팅’의 성공사례가 된 거죠.”
외국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었나.
제2차 세계대전 50주년 기념행사 때 영국 여왕이 주재한 만찬에등장해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미국, 프랑스 정상들에게 서빙 됐는데 영국과 프랑스 간에는 (백년전쟁이라는) 불편한 역사가 있지만 이를 불식시키고 평화와 번영을 생각하자는 의미에서 샤또딸보를 내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샤또딸보를 찾았다.
금융위기 이후 와인 시장이 주춤했던 것이 사실이다. 샤또딸보는 영향이없었나.
연 3만 케이스(1케이스당 12병)만 생산하는 프리미엄 와인이다.그래서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물량 자체가 워낙 적기도 하지만한국처럼 확실한 ‘딸보팬’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은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시장이다. 게다가 1988년 수입사를 통한 본격 수입 이전인 1980년부터 약 8년간 대한항공의 퍼스트클래스에 제공된 걸로 보면 한국인의 ‘샤또딸보’ 사랑은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한-EU FTA가 발효되면 더욱 경쟁력이 있을것으로 본다.
한국에 자주 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 시장만의 특성은 무엇인가.
샤또딸보를 마시는 사람들의 계층이 상당히 다양하다는 데 일단놀랐다. 한국에서는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추석에 선물을 주고받는풍습이 있는 걸로 안다. 그때 특히 CEO나 기업인들이 샤또딸보를선물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이는 ‘히딩크처럼 좋은 리더십을 갖춘 사람이 되라’는 뜻이라고 들었다. 더불어 젊은 여성들 역시 즐긴다는 게 고무적이다. 최근에는 한국 음식과 와인을 매칭 하는 사례가 많다는 얘기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는 와인이 별다른 공식이 있다기보다는 그 나라의 음식과 조화롭게 자리 잡길 바란다. 한국의 갈비와 샤또딸보를 함께 먹은 일이 있는데 아주 근사했다. 한정식집에 갔는데 26개 접시에 각기 다른 음식이 나와서 와인과 잘 어울리는지 하나하나 먹어보는 ‘실험’도 해봤다.(웃음)
샤또딸보 외 다른 와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샤또딸보는 꼬르디에 가문이 4대째 이어오고 있는 가업이다.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을 많이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런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내가 사실상 홍보대사 역할을 하고 와인메이킹은 낸시 꼬르디에(아내)와 처제 로렌 꼬르디에가 하고 있다.최근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다. 로렌이 ‘크뤼 브로주아’급인 세네작(Senejac)을 매입해 보폭을 넓혔고 나는 아내와 함께 남프랑스로제와인인 ‘도멘 생 앵드리유(Domain Saint Andrieu)’를 매입해서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에 나섰다. 조만간 한국에서도 맛볼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은 와인 소비가 주춤해졌다. 막걸리 등 전통주의 매력이 부각된탓도 있지만 와인 자체가 ‘공부하며 마셔야하는 술’로 인식된 탓도 크다.
(장폴 비뇽 대표가 갑자기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소위 알려진 대로 와인잔의 다리 부분(stem)을 잡는 게 아니라 그냥 우유컵 쥐듯이 와인이 담긴 볼 부분을 두툼한 손으로 감싸든 모습이었다.)유독 한국 시장에서는 와인을 마실 때 엄숙함이 있어 보였다. 이렇게 와인잔을 쥐는 건 체온이 와인에 전해져 와인 맛을 상하게 한다고 하는데 사실 유럽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와인이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최고의 품질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와인을 대하는 태도는 바뀌어야 한다. 와인이 만남의 주제가되면 안 된다. 나는 샤또딸보가 정장을 갖춰 입고 시음한 후 평가를 내리는 와인이 아니라 오후 4시에 넥타이를 풀고 편한 복장으로 야외 테라스에서 즐겁게 마시는 와인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