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세계 금융사에 한 획을 그을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 국세청(IRS)은 스위스에 본부를 둔 UBS자산운용의 펀드매니저인 브래들리 버켄펠드가 포브스 400대 부자로까지 선정된 억만장자 이고르 올레니코프와 짜고 스위스 비밀계좌를 통해 720만달러의 미국 세금을 포탈한 사실을 적발했다. 이 사건을 기회로 미국 정부와 의회는 스위스 정부를 압박했고 이듬해인 2010년 스위스 최대 은행 UBS로부터 탈세 혐의가 있는 미국인 4450여 명의 명단을 넘겨받는 데 성공했다.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의 빗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는 역외탈세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검은 돈의 ‘종착지’로 추앙받아온 스위스 은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스위스는 1934년 계좌 비밀 보장을 법으로 제정한 이후 70여 년간 은행 비밀주의를 고수해왔다. 스위스 은행에 예금된 유대인 자금을 노리는 독일 나치정부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이런 주장에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역외탈세를 꾸준히 추적해온 저명한 저널리스트 니콜라스 색슨은 “거슬러 올라가면 유대인 자금 보호라는 주장을 처음 내놓은 곳이 스위스 은행들”이라며 “오히려 스위스 은행들은 비밀계좌를 통해 나치정부의 비자금과 전비를 보관해왔다”고 밝혀 역사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쌍두마차는 바로 UBS와 크레디트스위스. 전체 스위스 예금 중 50%를 차지하는 두 은행이 보유한 비밀계좌는 수많은 영화에 등장할 정도로 관심의 대상이다.
국내에도 스위스 은행 계좌를 보유한 사람이 적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2월 스위스 국세청이 한국에 배당 세금 58억원을 돌려줬다. 이를 역으로 환산하면 스위스 은행을 거쳐 국내 증시로 들어온 수상한 자금이 1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세무당국은 추정했다.
하지만 정작 돈의 주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스위스 과세당국이 그 세금을 누구에게서 거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제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VIP고객을 상대하는 시중은행 PB들은 “스위스 은행 계좌 개설은 생각보다 간단하다”고 입을 모은다. 오히려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정보가 새어나갈 염려가 없다는 것. 심지어 이름 없이 계좌번호만 있는 무기명 계좌도 개설이 가능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계좌 개설에 들이는 공은 만만찮다. 한 PB는 “스위스 은행 계좌 개설을 숨기기 위해 프랑스나 독일까지 항공기로 이동한 뒤 기차 편으로 스위스로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다”며 “스위스에서도 현금만을 사용하며 자신이 스위스에 왔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정작 스위스 은행들이 무기명 계좌를 허용하는 진짜 목적은 개인정보 보호와는 무관하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예금자의 ‘유산’이다.
한 외국계 은행 관계자는 “비실명 고객이 사망한 뒤 계좌 정보가 상속되지 않아 스위스 은행에 귀속되는 돈이 짭짤하다는 후문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사망한 유대인들 자금이 계좌주를 모른다는 이유로 유가족에게 전달되지 않아 1999년 세계유대인연합회가 스위스 은행을 상대로 12억달러의 반환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스위스 은행의 비밀의 문은 점차 열리고 있다.
이런 세계적 분위기에 편승해 한국도 스위스와의 조세조약 개정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7월 25일부터 국세청이 스위스 은행 계좌 정보를 받아볼 수 있게 됐다. 특히 이름 없이 계좌번호만으로도 정보 조회가 가능해져 스위스 은행을 통해 탈세 행각을 벌이는 부유층과 기업이 조사망을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현행 조세조약에는 금융정보 교환에 대한 규정이 없어 역외탈세 등에 대한 세무조사 과정에서 스위스 은행 계좌가 나오더라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만약 정보공개 요건에 예금자 이름이 포함됐다면 차명·법인계좌를 통한 탈세를 잡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스위스 계좌를 정부에 신고하는 사례도 조금씩 늘고 있다. 정부는 해외금융계좌 신고제를 통해 매년 10억원 이상 해외 계좌 보유자들로부터 신고를 받고 있지만 아직까지 신고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다.
하지만 스위스와의 조세조약이 개정되면서 올해 스위스 계좌 신고금액이 급증했다.
국세청이 지난 6월 해외 금융계좌에 대한 신고를 받은 결과 스위스 계좌 신고액이 지난해 73억원에서 올해 1003억원으로 14배 가까이 늘었다. 신고 인원 자체는 2명에서 5명으로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수백억원대 금융자산을 보유한 ‘큰손’들의 신고가 늘어난 셈이다.
다만 최소 1조원으로 추정되는 비밀자금을 생각하면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더욱이 스위스를 빠져나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검은 돈의 흐름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하는 소위 ‘풍선 효과’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이미 금융전문가들은 스위스의 검은 돈이 아시아, 특히 홍콩과 싱가포르로 움직이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싱가포르는 스위스나 리히텐슈타인 등에 가려 있지만 아시아에서 은행 비밀주의가 가장 높은 국가로 꼽힌다.
홍콩도 거주자의 역외소득에 대해 소득세를 물리지 않는 데다 예금 등 거래내용을 금융회사가 국세청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 요인으로 꼽힌다. 더욱이 아시아 금융 중심지인 홍콩은 스위스 은행들의 지점이 많아 돈을 맡기기도 편하다.
수법은 주로 스위스 등에서 돈을 빼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자금을 세탁한 뒤 홍콩 등으로 옮기는 방법이 많이 쓰인다. 후진적인 개도국의 금융시스템이 자금 추적을 오히려 어렵게 한다는 설명이다. 정부도 이를 의식한 듯 싱가포르, 홍콩과의 조세정보 공조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어 언제까지나 이들 지역이 탈세의 안전지대로 남기는 어려울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