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공지능) 열풍을 타고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시장에 과거와 차원이 다른 ‘4차 슈퍼사이클’이 도래하고 있다. AI 가속기의 스펙 업그레이드로 수요가 폭발하는 반면, 지난 수년간 누적된 공급 부족과 기술적 진입장벽이 맞물리면서 제품 가격이 치솟는 ‘장기 호황’ 국면에 진입했다는 분석이다.
그간 시장의 주목을 받던 반도체 칩 제조사를 넘어 전자제품의 뼈대와 쌀로 불리는 ‘PCB 기판’과 ‘MLCC(적층세라믹콘덴서)’가 AI 밸류체인 내 가장 극심한 공급 병목 부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PC 등 전방 산업의 수요 둔화에 동반 침체하던 과거 사이클과 달리, AI 서버향 수요가 폭발하며 단숨에 핵심 전략 자산으로 격상된 것이다.
시장에서는 이 업종을 경기순환형 산업이 아니라 데이터센터 수요의 지속성을 보유한 구조적 성장 업종으로 재평가하는 중이다. 2030년 이후의 공급 물량도 논의하는 중이다.
수요 폭발의 배경에는 엔비디아를 필두로 한 차세대 AI 칩셋의 진화가 자리 잡고 있다. 과거 MLCC가 스마트폰 탑재용으로 주목받았다면 이제는 AI 고전력과 초고속 데이터 처리가 필수적인 AI 데이터센터 환경에서 전류를 안정적으로 조절하는 MLCC의 탑재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AI 서버는 GPU 성능 향상, 전력 밀도 상승, 전원 안정화 요구 확대에 따라 MLCC 사용량이 구조적으로 증가하는 구간에 진입했다. 블랙웰 시리즈 기준 랙당 MLCC 탑재량은 약 35만 개 수준으로 추정되며, 루빈 시리즈에서는 약 55만 개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향후 전력 밀도 상승 추세를 감안하면 AI 서버 내 MLCC 탑재량은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마다 큰 폭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수요는 폭증하고 있는데 공급은 제한적이다. 대부분의 MLCC 업체 가동률도 이미 90% 이상에 도달한 상황인데 증설을 결정하더라도 주요 장비의 리드타임이 16~18개월에 달해 단기간 내 공급 확대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MLCC는 세 차례의 사이클을 경험했다. 1차는 2013~2015년 스마트폰 시장 성장, 2차는 2017~2018년 자동차 전장화와 스마트폰 고사양화, 3차는 2020~2021년 코로나로 인한 이연 수요와 5G 확산이며 지금은 AI 서버 투자가 확대되는 4차 사이클이라고 할 수 있다. MLCC 사용량이 구조적으로 확대되는 명확한 계기가 있는 셈이다.
특히 4차 사이클의 초입에 들어선 지금, 이번 사이클은 과거 사이클보다 훨씬 강하고 오래 지속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황지현 NH투자증권 연구원은 “ 일본 수출 데이터(METI, 일본 경제산업성)상으로는 MLCC 평균판매단가(ASP)가 일시적으로 하락하는 모순적인 현상이 나타난다”며 “이는 업황 회복 초기에는 수출 물량 회복이 가격 상승보다 먼저 나타나기 때문인데 이후 공급 부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면 ASP가 상승 전환하고, 이때부터 MLCC 업황은 본격적인 호황 국면에 진입한다”고 말했다.
영업레버리지 효과도 삼성전기 등 MLCC 기업의 이익 전망을 키우는 요소다. MLCC는 고정비 비중이 높은 장치산업의 성격을 갖고 있어, 가격 상승분이 이익으로 반영되는 과정에서 큰 폭의 마진 개선이 나타난다. 실제로 2차 사이클 당시 주요 MLCC 기업들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2017년 14%에서 2018년 27%로 확대된 바있다. 이후 다운사이클 진입과 함께 수익성은 일시적으로 둔화됐으나, 3차 사이클이 전개된 2021년에는 평균 영업이익률이 다시 21%까지 상승했다. 작년 8% 수준이었던 삼성전기의 영업이익률이 내년부터 대폭 증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수요는 폭발하는 반면, 지난 4년간 전 세계 MLCC 업계의 설비투자(CAPEX)가 보수적으로 집행되어 생산능력(Capa) 자체가 제한적이다. 여기에 ‘HBM(고대역폭 메모리)효과’와 유사한 생산성 저하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AI용 초소형·고용량 MLCC는 낮은 수율과 적층 수 증가로 인해 공정상 생산능력 손실(Capa Loss)이 크게 발생하는 제품 특성 때문이다.
선두권 업체들이 한정된 기존 생산라인을 고마진의 AI향 제품으로 발 빠르게 전환하면서, 스마트폰이나 가전 등에 들어가는 범용(IT용) MLCC의 공급 여력마저 급격히 축소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범용 제품까지 수급 불균형이 확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MLCC의 대표 기업이라고 하면 시가총액이 현대차를 넘어설 정도로 주가가 고공 행진한 삼성전기다. 삼성전기는 일본의 무라타와 함께 글로벌 MLCC 시장을 선도하는 초일류 기업이다.
삼성전기는 지난 6월 30일 약 4500억원 규모의 MLCC 단일 판매·공급계약을 공시했다. 이번 계약은 미국의 대형 클라우드 서비스 공급자(CSP) 한 곳을 대상으로 하며, 오는 2027년 1년간 AI 데이터센터용 초소형·고용량 MLCC를 집중 공급하는 내용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 수주는 단순히 대규모 계약을 넘어 시장의 판도 변화를 보여주는 중대한 시사점을 지닌다. 업계에서는 AI 서버용 초소형·고용량 MLCC의 공급 부족(쇼티지)에 대한 밸류체인 전반의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로 보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 간의 ‘MLCC 물량 선점 경쟁’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는 방증이다.
특히 AI용 초소형·고용량 MLCC는 적층 수를 극대화하면서도 높은 신뢰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사이드 갭(Side-Gap) 축소 특수공법’이 필수적이다. 현재 이 기술을 양산에 적용할 수 있는 업체는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전기와 일본의 무라타제작소(Murata) 단 두 곳뿐인 것으로 알려진다. 기술적 난이도가 워낙 높아 후발 주자들의 진입이 사실상 제한된 만큼, 향후 AI향 MLCC 가격은 강한 하방 경직성을 확보하며 상승세를 탈 전망이다.
이번 계약은 삼성전기의 펀더멘털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양승수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기존 삼성전기의 MLCC 매출에서 단일 고객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 수준이었으나, 이번 계약은 단일 기종만으로도 기존 MLCC 전체 매출의 10% 전후에 달하는 초대형 규모다”라며 “그만큼 AI향 MLCC 수요가 기존 IT 기기나 전장(자동차 전자장치) 중심의 수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강도와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당 제품은 다른 AI 데이터센터 고객사들의 잠재적 수요도 매우 높아, 삼성전기의 AI향 MLCC 매출 비중은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확대될 전망이다.
전체 매출의 10% 전후에 달하는 초대형 규모다”라며 “그만큼 AI향 MLCC 수요가 기존 IT 기기나 전장
(자동차 전자장치) 중심의 수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강도와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당 제품은 다른 AI 데이터센터 고객사들의 잠재적 수요도 매우 높아, 삼성전기의 AI향 MLCC 매출 비중은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확대될 전망이다.
증권가는 오는 2028년 삼성전기의 서버·파워·네트워크향 MLCC 매출액이 기존 주력인 IT향을 넘어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고마진 제품인 AI 중심의 믹스(Mix) 개선 효과 덕분에 MLCC 사업부의 수익성 역시 가파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기의 핵심 강점인 ‘사이드 갭(Side-Gap) 축소 특수공법’을 통해 AI 가속기 및 데이터센터용 초소형·고용량 MLCC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삼성전기 외에도 MLCC 관련 기업들은 올해 주가가 큰 폭으로 올랐다.
종합 콘덴서 전문기업 삼화콘덴서는 AI 데이터센터 가동에 필수적인 ‘고전압 전력기기용 MLCC’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전력기기 시장의 호황에 따른 낙수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으며, 현대차·기아를 비롯해 글로벌 부품사에 전장용 MLCC와 DCLink를 공급하며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특히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에 탑재되는 우주용 MLCC 국산화 개발을 주도하는 등 극한의 환경에서도 작동하는 초고신뢰성 제품군에서 강점이 있다.
아모텍은 최근 전장용에 이어 AI 서버·데이터센터용 MLCC로 체질 개선에 성공하며 주목받고 있다. 특히 고속 광·전기 케이블 모듈에 적용되어 고주파 노이즈를 억제하는 ‘광대역 커패시터(BBC)’ 분야에서 강점을 지닌다. 아모텍은 작년 하반기 미국 반도체 기업으로부터 AI용 MLCC 공급 승인을 받아 초도 물량 납품을 시작했으며, 네트워크 장비 업체들과 추가 협의해 2027년까지 관련 매출을 800억원 규모로 키우겠다는 전략이다.
MLCC에 특화된 ETF는 찾기 힘들다. 있더라도 삼성전기나 LG이노텍에 치중되어 있지 다른 종목의 편입비중은 거의 없는 편이다.
RISE 네트워크인프라는 AI 서버들이 서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네트워크 인프라’와 고대역폭 데이터 처리를 지탱하는 부품에 집중하는 ETF다. 7월 초 기준으로 삼성전기 비중이 22%, SK하이닉스 22%를 비롯해 삼성전자, LG이노텍, 이수페타시스, 리노공업 등 반도체 관련주의 비중이 높다.
그 외 대한광통신, RFHIC, 쏠리드, 케이엠더블유 등 국내 광통신·통신장비주의 비중이 높아 올 상반기 수익률이 230%에 달한다.
HANARO Fn5G산업은 원래 5G 통신 산업 테마로 출발했으나, AI 시대가 열리면서 초고속·초저지연 통신 인프라와 온디바이스 AI(On-Device AI) 수혜주를 동시에 담는 포트폴리오로 재해석됐다. 삼성전기는 9%를 담고 있으며 KT 9%, 삼성SDI 8% 등의 비중이다. 그 외 삼성전자, SK텔레콤, 한미반도체, 이수페타시스, SK하이닉스 등 여러 종목들에 분산투자한다. 순수 반도체 부품뿐만 아니라 통신 서비스 및 네트워크 인프라 전반을 아우르고 있어, 상대적으로 주가 변동성이 안정적이고 AI 생태계의 하부 구조 전반에 투자하는 효과가 있다.
7월 초 기준으로 SOL AI반도체TOP2플러스는 반도체 ETF긴 하지만 삼성전기 비중이 26%로 가장 높다. KODEX AI반도체TOP2플러스, 1Q K반도체TOP2+, ACE K반도체TOP2+ 등에서도 20%가량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김제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