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월, 샤넬코리아가 조용히 숫자 하나를 바꿨다. 그렇게 ‘클래식 맥시 핸드백’의 가격이 1892만원에서 2033만원으로 7.5%나 올랐다. 앞자리가 달라진 순간, ‘2000만원 샤넬 백 시대’도 막을 올렸다. 소비자의 반응은 엇갈렸다. 가격이 오르기 전 백을 사려는 이들은 백화점 매장으로 달려갔고, 또 다른 이들은 스마트폰을 꺼내 중고 플랫폼에 오른 동일 모델의 시세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사실 명품 시장의 변치 않는 명제 중 하나는 ‘비싸도 팔린다’ 혹은 ‘비싸야 팔린다’였다. 하지만 이젠 ‘팔린다’란 동사에 조건이 붙기 시작했다. ‘꼭 공식 매장에서 정가로 살 필요가 있을까’란 인식이 낳은 결과다. 이른바 N차 가격 인상에 지친 이들은 리세일과 빈티지,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엔트리 럭셔리로 시선을 돌렸다. 명품이 달라진 게 아니라 명품을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명품 브랜드의 가격 인상은 이미 연중행사가 됐다. 과거엔 연 1~2회, 연초와 하반기에 집중됐지만 2024년 이후 패턴이 달라졌다. 샤넬은 지난해에만 1월(가방), 3월(화장품), 6월(가방·주얼리), 9월(가방·지갑·신발), 11월(가방) 등 다섯 차례나 가격을 올렸다. 루이비통은 1월, 4월, 11월, 불가리는 4월, 6월, 11월, 티파니앤코는 2월, 6월, 11월, 까르띠에는 2월, 5월, 9월, 12월 등 분기마다 가격표를 다시 썼다. 명품 시장엔 “지금이 가장 싸다”는 말이 돌았다. 가격 인상 소식이 들리면 백화점 매장 앞엔 어김없이 오픈런이 발생했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팬데믹 이후 전열을 정비하던 글로벌 명품 시장과 달리 한국 시장은 비싸도 팔린다는 인식 때문인지 가격이 우상향하기 시작했다”며 “비싸도 팔리니 당연히 역대급 실적이 따라왔다”고 전했다. 실제로 N차 가격 인상은 브랜드에 유리했다. 고가 3대 명품으로 손꼽히는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의 국내 실적을 살펴보면 이러한 결과가 도드라진다.
지난해 에르메스코리아의 매출은 1조1251억원. 전년 동기 대비 16.7%나 증가하며 사상 첫 ‘1조 클럽’에 입성했다. 영업이익은 3055억원으로 14.6%나 늘었다. 루이비통코리아의 매출은 1조8543억원, 영업이익은 5256억원이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6.1%, 35.1% 늘어난 수치다. 샤넬코리아는 지난해 매출 2조130억원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2조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백화점의 한 명품 브랜드 매니저는 “최근 고소득층의 명품 소비가 늘고 있다”며 “부동산과 주가 상승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상황을 전했다. 에루샤 세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서 거둔 매출은 약 5조원. 글로벌 본사의 성장세가 둔화된 것과는 정반대의 흐름이었다. 에르메스는 지난해 매출 160억 유로에 영업이익 66억 유로로 각각 8.9%, 7% 성장하며 선방했지만, 루이비통을 거느린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매출(808억 유로)은 5% 감소했고, 순이익(109억 유로)도 13%나 줄었다. 아직 2025년 실적이 공개되지 않은 샤넬의 2024년 매출과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각각 4.3%, 30% 내려앉은 수준이다. 한국이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실적 방어막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과연 명품 시장의 호실적은 브랜드에만 유리한 걸까. 최근 중고 시장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먼저 숫자가 말한다. 올 3월 리커머스 플랫폼 번개장터가 발표한 ‘2025 K-럭셔리 세컨핸드 리포트’를 살펴보면 국내 중고 명품 거래 규모가 전년 대비 52%나 성장했다. 연간 신규 등록 상품 수는 3900만 건. 더 인상적인 데이터는 거래 속도였다. ‘불가리 비제로원 화이트 골드 목걸이’는 등록된 지 53.39초 만에 팔렸다.
‘페라가모 켈리 백’은 73.51초, 중고도 100만원이 넘는 ‘생로랑 모노그램 숄더백’은 69.52초 만에 새로운 주인을 만났다. 번개장터 측은 “세컨핸드(중고)는 더 이상 대안적인 선택이 아니다”라며 “소비자는 새것보다 자신의 취향과 가치에 맞는 선택을 기준으로 소비하고 있으며, 세컨핸드는 그 기준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방식으로 자리잡았다”고 전했다.
또한 “취향을 중심으로 한 거래는 지역과 국경을 넘어 확장되고 있고, 이는 ‘새것 아닌 내 것 찾기’라는 소비 태도로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한정판 거래 플랫폼 크림(KREAM)의 행보도 이러한 흐름이 선명하다. 크림은 지난해 8월 기존 중고 명품 서비스를 ‘빈티지’로 리뉴얼하며 브랜드 라인업을 확장하고 이용자 접근성을 강화했다. 개편 이후 올 1월 31일까지 6개월간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빈티지 카테고리의 전체 거래 건수가 전년 동기 대비 203%, 거래액은 93% 증가하며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크림 측은 거래 품목이 하이엔드부터 니치 아이템까지 확장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격대와 취향 스펙트럼을 동시에 넓히며 이용자 수요를 폭넓게 흡수했다는 것이다. 거래 품목을 보면 실제로 ‘에르메스 버킨 25 에토프 금장’이 3900만원에 거래되며 최고가를 경신했다. 롤렉스 등 프리미엄 시계 카테고리도 전년 동기 대비 거래량이 363%나 늘며 성장세를 뒷받침했다. 중고 명품 전문 플랫폼 구구스의 데이터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2025년 1~11월 누적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70%나 증가했다. 브랜드별 거래총액 순위는 에르메스, 샤넬, 롤렉스, 까르띠에, 루이비통 순으로 집계됐다. 가격 인상이 빈번한 브랜드일수록 중고 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된 셈이다.
이러한 플랫폼들이 경쟁하는 지점은 하나로 요약된다. 바로 진품 인증이다. 번개장터는 정품 검수 서비스를 핵심 차별점으로 내세우고, 크림은 자체 검수 센터를 통해 모든 상품을 심사한다. 구구스는 ‘보고구매 서비스(온라인 예약 후 매장에서 실물 확인·결제)’를 진행 중이다. 소비자들이 중고 명품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가 가품 리스크인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전략이다. 그리고 신뢰 인프라가 누적되자 거래량이 폭발했다.
등산을 즐기는 20대, 발레가 취미인 60대, 에르메스 스카프와 다이소 소품을 함께 구매하는 30대….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가 <트렌드 코리아>에서 제시한 옴니보어(Omnivore) 소비자의 초상이다. 옴니보어는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다. 잡식성(雜食性)이란 의미에서 파생했다.
옴니보어 소비자란 잡식성 소비, 취향의 무한 진화, 집단의 경계가 사라지고 개인의 취향이 더욱 뚜렷해진 사람을 말한다. 같은 연령대와 성별이라도 소비 형태가 완전히 다른 시대, 럭셔리 소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례로 고가의 에르메스 버킨이나 샤넬 클래식 백에 손이 닿지 않는 이들은 같은 브랜드의 엔트리 라인으로 진입한다. 에르메스의 실크 스카프, 샤넬의 선글라스나 립스틱, 루이비통의 SLG(Small leather goods·소가죽 소품류)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품목은 수백,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제품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에 브랜드 경험을 제공한다. 까르띠에의 ‘러브 브레이슬릿’, 불가리의 ‘비제로원’, 티파니앤코의 ‘러브 링크’ 등 주얼리 라인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등장했다. N차 가격 인상에 따라 엔트리 라인의 가격도 빠르게 오르고 있는 것. 명품에 진입할 수 있는 가격 자체가 올라간 상황. 그럼에도 수요는 꾸준하다.
명품을 경험하려는 욕구는 여전하다. 그리고 소비 방식이 다양해졌다. 가격 인상은 막지 못했지만 소비자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더 영리한 경로를 찾았다. 브랜드의 가치는 원하면서 지불 방식은 스스로 선택했다. ‘명품도 가성비를 따져 구매한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명품 브랜드 입장에서 중고시장의 확장은 득일까 실일까. 명품 브랜드의 한 임원은 “중고 시장이 커질수록 브랜드의 희소성은 높아질 수 있다”며 “단 브랜드의 신뢰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