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시골 흙길을 빠르게 달리고 있습니다. 뒤에서 쫓아오는 아이들이 소년에게 돌멩이를 던지며 괴롭혔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년의 이마에서 한 줄기 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겁을 먹은 소년은 더 빠르게 전속력으로 질주합니다. 소년의 단짝 친구인 소녀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런(Run), 포레스트. 런!”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유명한 한 장면입니다.
‘바보 소년’의 일생을 다룬 영화인 <포레스트 검프>는 1994년 개봉 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톰 행크스의 대표작으로 기억되는 작품입니다. <콘택트>를 연출한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장식한 영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관왕에 오른 명작이기도 하지요. 이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덜 알려졌지만 미국 소설가 윈스턴 그룸의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바보로 취급됐던 한 사내의 삶을 통해 인간 운명의 예측 불가능성을 묘사하며 20세기의 걸작으로 남은 <포레스트 검프>를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주인공 포레스트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떨어지는 지능을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척추가 휜 탓에 걸음걸이가 불편해 주변으로부터 크고 작은 놀림을 받았고, 지능지수(IQ)는 70 남짓이어서 평균치(80)를 늘 밑돌아 일반학교 진학이 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배움의 속도도 느려 때로 ‘저능아’란 슬픈 놀림까지 받았습니다. 그런 소년 포레스트를 둘러싼 운명은 가혹했습니다. 따가운 시선과 멸시는 일상이었고, 또래들이 돌을 던지며 괴롭히기에 소년은 늘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포레스트의 어머니는 아들 포레스트를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입학시키려 분투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바보’ 취급을 당하는 소년 포레스트. 그러나 소년의 발걸음은 오히려 남들은 결코 달성하지 못하는 놀라운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아이들을 피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달리던 포레스트는, 실은 자신이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음을 깨달았고 전국 미식축구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며 놀라운 세상을 경험합니다. 기적은 소년 포레스트의 삶에서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그는 폭격으로 죽어가던 수많은 동료 군인을 구출해 무공훈장을 받고 심지어 탁구 국가대표로 발탁돼 ‘핑퐁 외교’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도 합니다. 놀라운 이야기의 중심에 선 그는 세상의 갈채와 찬사를 뒤로 한 채 죽은 동료 버바와의 약속을 지키려 전 재산을 털어 새우잡이 사업에 손을 댔다가 역시 우연한 기회로 인해 막대한 부를 거두기도 합니다. 그는 애플사(社)에 투자해 더 이상 돈 걱정 없는 삶을 살기도 하지요. 영화엔 나오지 않지만 포레스트의 놀라운 업적은 소설 속에서 더 자세합니다. 포레스트는 탁구 국가대표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강가에서 허우적대는 마오쩌둥을 구해내 ‘중국 인민의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심지어 포레스트의 발걸음은 지구 바깥을 향하기도 합니다. 왜소한 외모로 설정된 영화와 달리 소설 속 포레스트는 ‘신장 198㎝, 체중 110㎏’의 거구로 묘사되는데, 그 때문에 미국 휴스턴 항공우주센터로 보내져 우주비행까지 다녀올 정도였습니다.
남들은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거나 아주 어렵게 성공하는 일들을 포레스트는 전혀 의도하지 않음으로써 성공시킨 것이지요. 신체적으로도 지능적으로도 열위에 놓인 포레스트를 남들은 죄다 ‘바보’라고 놀려댔지만 사회의 정상성에서 이탈된 바보가 이 모든 성취의 주인공이라는 삶의 놀라운 역설이 <포레스트 검프>의 주제였습니다. 좀 더 깊게 들어가 볼까요.
소설과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바보 포레스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단어 ‘바보’는 차별적인 의미를 담은 멸칭이지만, 이 작품에선 ‘바보’를 전면에 드러내기에 이 용어를 그대로 쓰기로 하겠습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만 보면 ‘저런 바보가 저렇게 놀라운 일을 이뤄냈단 말인가?’라는 놀라움이 작중 포레스트가 건네는 감동과 뒤섞이는데, 소설 <포레스트 검프>까지 읽어보면 ‘왜 바보 주인공을 내세웠는가?’라는 의미가 깊어지면서 ‘바보’의 의미도 한층 더 강화됩니다. 심지어 포레스트의 1인칭 독백체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첫 문장부터 이렇습니다. ‘바보 노릇도 쉽지않다는 말을 하고 싶다.’(7쪽)
소설 속 포레스트는 첫사랑이자 어린 시절 이후 단짝인 친구 제니가 재학 중인 하버드대를 기웃거리다 제니가 듣던 수업을 청강하게 됩니다. 수업을 지도하는 퀘이켄부시 박사의 강의 주제는 ‘세계 문학에서의 바보의 역할’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바보 혹은 광대들, 윌리엄 포크너 소설에 나오는 바보 벤지, <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부 래들리도 ‘심각한 바보’였습니다. ‘세계문학 속 바보‘란 주제는 수백 년간 지속됐던 하나의 문학적 화두였음을, <포레스트 검프>의 원작 소설가 윈스턴 그룸은 퀘이켄부시 박사의 입을 통해 이야기한 것이지요. 퀘이켄부시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가들이 작품 속에 바보를 등장시키는 것은 바보들로 하여금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들고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어리석음보다 큰 의미를 밝혀내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간혹 셰익스피어 같은 위대한 작가는 바보를 통해 주요 등장인물의 하나를 비웃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의 유식함을 비꼬기도 하고.”(101쪽)
따지고 보면 바보는 허위와 위선이 없기에 바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허황된 헛소리가 아닌, 진실에 가까울 때가 많습니다. 바보들의 툭 내뱉는 말이나 계산 없이 하는 행동은 허울만 좋은 뿐이지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인간 사회를 꼬집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진실의 거울’ 역할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바보의 말, 바보의 행동처럼 진실인 것도 없지요. 이런 점에서 <포레스트 검프>는 단지 바보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바보의 눈에 비친 세상’이 본질적인 주제가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가 놀라운 성과들을 연이어 이룩할 수 있었던 동력을 반어적으로 바라보게 하니까요. 포레스트가 바보가 아니라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의 일원들이 오히려 ‘똑똑한 척하는 바보’가 아니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하얀 깃털 하나에서 시작됩니다. 깃털이 행인들 사이를 떠돌다가 벤치에 앉은 포레스트의 발 아래에 떨어집니다. 포레스트는 그 깃털을 자신의 가방에 든 책 사이에 소중히 끼워 넣습니다.
노란색 표지의 그 책은 <호기심 많은 조지(Curious George)>란 어린이 그림책으로, 호기심 많은 원숭이 조지의 모험을 담은 책이었습니다. 이 깃털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를 통해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합니다. 포레스트의 삶 처럼 말이지요.
이 깃털은 소설엔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운명과,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하는 대목이 두드러집니다. 댄 소위(영화에선 중위)를 통해서 말이지요. 베트남전 폭력으로 두 다리를 잃은 댄 말입니다. 소설 속 댄은 포레스트에게 이런 편지를 씁니다. “포레스트, 지금 넌 네 인생에서 의미심장한 순간을 맞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저 기분전환거리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네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할 사건일 수도 있으므로 그 기회를 반드시 붙잡고 놓치지 말아라. 지금 돌이켜보면 네 눈에서 이따금씩 조그만 불꽃이 번쩍이는 것을 본 기억이 나는데 주로 네가 미소를 지을 때였다.”(77쪽)
댄은 포레스트에게 인생이란 어떤 방향으로 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시킵니다. 삶이란 그 누구도 다음 행보를 알 수 없는 요물인데, 대개 사람들은 자기 삶의 미래를 무형의 굴레 속에 안착시키고 그 바깥을 상상하기를 거부합니다. 울타리 밖으로 나서는 일을 주저하며 그러다 생을 마감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댄은 운명이란 없으며 지금 이 순간 내딛는 한 번의 발걸음이 삶의 방향성을 결정할 아주 중대한 사건일 수 있음을 포레스트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리를 떠도는 깃털처럼 아무도 신경을 쓰려 하지 않지만 그 작은 사물로부터 의미를 획득하려는 사람에게만 운명은 모습을 드러냄을 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두 다리를 잃고 병실에 누워 있던 댄은 포레스트에게 크게 화를 냈습니다. “네가 내 운명을 갈취했다”고 말이지요. 전장에서 죽었어야 했던 나의 운명을 네가 방해했다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댄의 주장이 틀렸음을, 포레스트는 자신의 삶과 댄의 바뀐 삶으로 증명해냈습니다. 인생이란 이처럼 그 다음을 결코 알 수 없는 속성임을 포레스트의 삶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감동을 주는 이유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소년 포레스트의 단짝인 제니의 한 마디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런(Run), 포레스트. 런!” 우리가 도망쳐야 했던 건 ‘나 자신’이 아니라 운명을 획정하는 모든 현실이었겠지요. 우리가 달리며 남기는 모든 발자국들이 우리의 운명이 될 수 있음을, 그 한 걸음이 기적으로 향하는 운명적인 발걸음일 수 있음을 <포레스트 검프>는 말해줍니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