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경의 1막1장] 연출가 이보 반 호브의 <로마비극> 비극적 최후를 맞는 로마 영웅들을 그리는 3인3색 현대적 여정
입력 : 2019.10.29 11:06:12
수정 : 2019.10.29 11:06:27
보잘것없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찬란한 대제국으로 확장된 로마의 역사는 이탈리아 역사가 아니라 인류의 문명사이다. 로마인은 그리스인보다는 지성이, 켈트족보다는 체력이, 카르타고인보다는 경제에, 에트루리아인보다는 건축이 취약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제국건설을 했던 이유는 열린 시각, 합리적 사고의 절묘한 균형감각, 그리고 주권을 가진 로마의 이성적 시민의식 덕분이었다. 왕정, 공화정, 제정의 각기 다른 정치제도 안에서도 로마의 위정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의 최고봉을 향한 야욕을 감추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통치력으로 사랑받았을지라도 시민의 염원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는 최고 권력자는 가차 없이 로마시민의 이름으로 응징되었다.
비잔티움제국으로 발전한 동로마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멸망한 1453년, 로마제국은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반면 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 신성로마제국 등 고대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세력들을 로마제국으로 기억했다. 르네상스와 신대륙의 발견 등으로 고무된 유럽지식인들은 고대 로마를 주목했다. 특히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며 식민패권시대를 열던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영국인들은 새 시대의 물결 속에서 고대 로마제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중세가 져가면서 다시 조망 받는 로마인들
역사가였던 리비우스(BC59~AD17)의 로마사와 철학자 플루타르코스(AD46~120)의 영웅전의 번역서는 출판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이 시대적 유행을 간파한 극작가 셰익스피어(1564~1616)는 천하를 호령하던 고대 영웅호걸들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 연극은 가장 지적인 미디어였다. 셰익스피어의 유려한 펜은 로마영웅들을 천상으로 올렸다 지옥으로 떨어트렸다하고 관객은 조마조마하게 주인공이 맞이하는 비통하고 참혹한 최후를 함께 맛봤다.
그가 선택한 첫 번째 로마인은 로마의 장군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로 셰익스피어 최초의 비극작품이다. 박찬욱 영화감독이 가장 잔인한 복수극으로 손꼽는 이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잔혹한 복수극을 그대로 따라 살인만 14번 등장하고 온갖 그로테스크적인 행각이 전개된다. 셰익스피어 초기작품으로 지나치게 유행패턴을 답습해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는 작품이다. 이후 완숙기로 무르익은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본격적인 로마극(줄리우스 시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코리올레이너스)을 시의성 있게 집필한다. 셰익스피어는 사회참여의식이 결여되었다는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정파나 인물을 객관적으로 수용했다. 이것이 400년이 넘도록 많은 독자들이 셰익스피어를 읽는 이유이다. 왜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지 극적으로 전개해 관객은 광활한 로마의 역사 속에서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른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총애하는 에섹스 백작의 좌충우돌 솔직함과 과격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장소를 로마로 옮겨 <줄리우스 시저>를 내세웠다. 예민한 정치적 시기에 한쪽으로 치우쳐 풍지풍파를 일으키기보다는 편견 없이 ‘줄리어스 시저’(BC100~BC44)를 통해 정치계를 묘사했다. 시저는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로 권력을 얻었지만 공화정을 위협하고 독재자로 올라설 것을 두려워하는 정치세력에게 제거된다. 시저가 암살되며 한 셰익스피어 대사인 “브루투스 너마저?”는 어떤 역사기록에도 없는 순수 창작이지만 많은 이들은 이를 역사적 사실로 믿을 정도다.
<줄리어스 시저>의 열화와 같은 인기를 맛본 셰익스피어는 로마비극 차기작으로 시저와 밀접하게 관련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택한다. 안토니우스는 장례식 명연설로 시저의 우호여론을 형성한 그의 오른팔이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이 ‘코가 1㎝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 치명적인 팜 파탈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의 연인이었지만 안토니우스와 운명적 사랑에 빠지는 이집트의 여왕이다. 로마와 이집트를 둘러싼 급박한 정세 속에 안토니우스는 조국 로마를 버리고 사랑을 택한다. 셰익스피어는 공적인 책임감과 뜨거운 정념 사이에서 고뇌하는 두 연인을 절묘하게 그린다.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는 기원전 5세기 로마의 전설적인 장군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코리올레이너스의 기구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코리올레이너스>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정치에도 몸 담지만 안하무인으로 오만방자한 불통인 실체가 발각되어 민중의 적으로 내몰린다. 망명자가 된 그는 조국에까지 칼을 겨누지만 이내 거둔다.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베스트셀러 <로마인 이야기>에 그의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아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로마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로마공화정 초기의 대표적 인물이다.
▶고대의 사건을 중세의 눈과 현대의 손으로 만든 비극들
2012년 <오프닝 나이트>, 2017년 <파운틴헤드> 이후, 세계 연극계에서 가장 핫한 벨기에 연출가 이보 반 호브(61)가 셰익스피어의 로마극 3부작을 하나의 작품으로 엮은 <로마비극>으로 다시 한국을 찾는다. 그는 깊이 있는 해석, 탁월한 입체적 인물묘사, 무대와 영상을 아우르는 세련된 미장센(mise-en-scene)으로 자리매김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연출가다. 그는 셰익스피어 원작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메커니즘을 재발견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코리올레이너스’를 통해 시민들과 정치인, 군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이념을 지켜내며 정치폐단을 저지해 위대한 제국의 기반을 다지는 지를 보여준다. <로마비극>은 ‘위대한 업적을 인정받은 권력일지라도 민주주의에 반하면 반드시 무너진다(줄리어스 시저)’. ‘대제국건설은 전쟁, 살인, 결혼의 파괴, 우정의 상실을 대가로 한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여러 사례들을 제시하는 대규모 정치 콘퍼런스의 장(場)을 만든다. 휴식 시간 없이 논스톱으로 5시간 반 동안 공연되는 이 혁신적인 작품은 공연 중 휴대폰으로 무대 장면 또는 연기하는 배우들의 사진을 촬영할 수도 있고, 화장실을 간다거나 바깥 공기를 쐬기 위해 객석 출입문을 드나들 수도 있다. 또한 객석뿐만 아니라 무대에서도 음식과 음료를 즐기며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현실정치를 일상에서 접하듯 극의 흐름을 따라 관객은 자연스럽게 현장성을 즐기며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하게 된다.
<로마비극>은 여러 의견과 관점, 사고방식이 공존하는 다층적인 작품이다. 누가 옳은지 어느 방향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거부하는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원작을 토대로 각 작품 당 90~100여 분 정도로 농축시켰다. 이들은 시대를 아우르는 정치적 담론을 담아내며 시민이자 주권자이기도 한 관객들의 시민의식을 자극한다.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역사 속에서 관객들은 쉴 틈 없이 전개되는 흥미진진한 정치 게임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될 것이다.
인터내셔널 씨어터 암스테르담의 <로마비극> - 5시간 30분
·공연일시 : 2019년 11월 8일(금)~11월 10일(일) 금 5pm, 주말 2pm